18화. 레오폴트는 다짐합니다
아스트리드는 머리가 좋은 편에 속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서, 분노한 듯한 레오폴트가 무슨 생각으로,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지도 즉시 눈치챌 수 있었다.
옆에 선 아스테인.
여기까지 나란히 서서 걸어오는 모습을 봤는지는 몰라도, 아니, 분명 봤겠지만 그건 그거대로 또 문제의 소지가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아스트리드도 할 말이 있다.
네가 먼저 잘못했잖아.
네가 먼저 나한테 잘못했잖아.
그래서 나도 그런 거고, 무엇보다 나는 그냥 아스테인과 잠깐 같이 걸은 게 전부고 너처럼 그런, 비상식적인 말은 하지 않았어. 라는 아스트리드의 생각과는 좀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붉게 달아올랐던 레오폴트의 얼굴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누가 봐도 화났음을 알 수 있었던 그 얼굴이, 조금씩 사그라들며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레오폴트가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아스트리드를 향해 걸어왔다.
점점 좁혀지는 거리에서, 아스트리드 역시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먼저 잘못한 것은 레오폴트다.
아스트리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냥 아스테인과 잠시 같이 걸었을 뿐이다.
다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걸 레오폴트에게 증명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레오폴트가 자기 잘못한 걸 모르고 아스트리드에게 난리를 친다면.
‘한대 후려쳐줘야지.’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사이, 아스트리드와 레오폴드 사이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아스트리드, 아니. 분대장님.”
“…에?”
의외의 말이다.
레오폴트의 얼굴은 지극히 평온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것도 못 본 사람처럼 평상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조금 전 교육장에서는 제가 흥분하여 실언을 했습니다. 마음에 없는 말을 내뱉고 말았으니, 부디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분대장님.”
그러면서 꾸벅 목례까지 하는 레오폴트.
“아, 으.”
사람이 당황하니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레오폴트가, 아예 상상도 못 했던 행동을 해버리니 아스트리드로서도 뭔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분대장님, 이후로는 행동과 발언에 좀 더 조심하고 또 주의하겠습니다. 이 아카데미를 무사히 졸업하는 날까지, 만에 하나 제가 경거망동하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저를 꾸짖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숫제 허리를 깊이 숙여 깍듯하게 인사까지 하는 레오폴트.
이쯤 되니까, 아스트리드가 오히려 당황했다.
레오폴트가 분명히 난리를 칠 것으로 생각했고 그에 대한 대응까지 생각했는데, 이렇게 반성하는 모습까지 보이는 게 그게 너무 의외다.
“교관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교육장으로 돌아가시죠.”
레오폴트는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 얼굴에 단 한 점의 감정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그 모습이 어쩐지 더욱 이상했다.
*
“소란의 원인은 묻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 말을 지키도록 하마. 하지만 아스트리드 생도, 레오폴트 생도. 오늘은 교육 첫날이지? 첫날부터 그런 소란이라니,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것도 알겠지.”
“예.”
오후 교육이 끝난 뒤, 레오폴트와 아스트리드는 바리안트의 호출에 교단 앞으로 나와 있었다.
입교 후 다음날부터 벌어진 소란은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기 힘들고, 게다가 그 두 사람은 타의 모범을 보여야 할 위치에 있다 보니 그냥 묵과하기가 힘든 경우이기도 했다.
“지금 즉시 숙소로 가서 전투 배낭을 메고 숙소 앞 연병장으로 내려와라.”
전쟁 돌입 시에 필요한 개개인의 물자를 담아놓는 배낭을 의미하는 전투 배낭.
그 배낭은 지정된 숙소의 관물대 안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아직 이 전투 배낭에 대한 지시는 없었기에 꾸려진 상태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러니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생도는 별로 없을 것이다.
물론, 아스트리드는 그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지만.
“어떻게 됐어요?”
숙소로 들어서는 아스트리드를 맞이한 건 엘프, 에라냐였다.
궁수 쪽 교육도 거의 같은 시간에 끝났는지, 바리안트에게 붙들려 있었던 아스트리드보다는 좀 일찍 돌아와 있던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들으신 모양이네요.”
소문은 정말 빨랐다.
오전에는 바리안트와 힘겨루기를 해서 꺾어버린 아스트리드.
그리고 오후에는 무슨 이유에선지 책상을 반으로 쪼개버리고 황태자에게 쌍욕을 퍼부은 후 그대로 나가버린 아스트리드.
아스트리드는 본의 아니게, 이번 기수에서 가장 주목받는 생도가 되어버렸다.
“군장… 아니, 전투 배낭 메고 내려오라고 하시네요.”
관물대에서 전투 배낭을 끌어내면 의외로 무게가 그리 무겁지는 않았다.
“이게 전투 배낭이구나… 제 관물대에도 있던데, 한번 들어봐도 돼요?”
“그러세요.”
어깨끈 사이로 손을 넣어 들어본 에라냐가 이내 얼굴을 찌푸리며 살짝 내려놓았다.
“어휴, 무겁다… 이거 진짜 무거운데요.”
아스트리드가 보기에는 순 엄살이었다.
궁수만큼 완력이 필요한 직업이 어디 있다고.
제법 커 보이는 장궁을 다루는 에라냐가, 그 시위를 잘도 당기는 에라냐가 완력이 약하다는 건 말도 안 된다.
“활도 그렇게 잘 다루시면서 무겁다뇨. 엄살이 심하시네요.”
“에이, 장난친 거죠. 분대장님 기분 좀 풀리시라고.”
에헤헤, 하고 웃어 보이는 에라냐가 이 순간만큼은 참 고맙기도 했다.
기분 좋은 일이 별로 없었는데, 그래도 에라냐가 이렇게 옆에서 살갑게 굴어주니까 덕분에 기분은 좀 풀리는 느낌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걸 메고 내려와서 뭘 어쩌라는 거에요?”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지만 여기는 모를 수도 있겠지.
아스트리드는 설명하기도 좀 귀찮아져서 그냥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알겠나. 저녁 식사 집합 전까지는 그 전투 배낭을 메고, 전용 무기까지 메고 계속 연병장을 돌아라.”
“알겠습니다.”
바리안트의 징계는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역시나…’
하지만, 힘들지 않다.
이 정도 무게라면 너무 가볍다… 고 생각했고 에라냐도 별로 무겁지는 않다고 했는데 그건 아마, 두 여자들의 힘이 보통이 아니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연병장을 한 바퀴 돌자마자 레오폴트의 얼굴이 그리 좋지 않았다.
세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만큼 기본적으로 완력이 있을 테고 훈련도 계속 받았을 테니 이 정도로 힘들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일반인이 느끼기에는 이 전투 배낭의 무게가 보통이 아닌 모양이었다.
익숙지 않은 데다 길이 조절도 딱 맞게 되지 않은 어깨끈이 계속해서 어깨끈을 파고드는 모양인지, 레오폴트는 걸으면서도 계속 흘러내리는 전투 배낭을 고쳐 매기 바빴고, 또 그러면 어깨를 파고드는 끈 때문에 아픈지 얼굴을 찡그리기도 했다.
다섯 시 정도 되었을 테니, 앞으로 식사 집합까지는 두 시간이 남았다.
아스트리드는 몇 걸음 옆에서 걷고 있는 레오폴트의 얼굴을 흘겨보았다. 아무래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인다.
미운 건 미운 거고, 그래도 정이라는 게 있다.
일주일 가까이 마차에서 함께 지냈고, 또 성도에 도착한 후 황궁에서 또 일주일을 같이 지내다 보니 그래도 정이 든 모양이라, 아스트리드는 아까의 분노와 짜증보다 지금의 레오폴트가 안쓰러워 보였다.
조금 도와줄 수 있을까. 차라리 옆에 붙어서 배낭 아래를 손으로 받쳐주면 좀 편할 텐데.
하지만 말도 없이 그랬다가는 저 드높은 황태자의 자존심에 큰 상처가 날 터다.
“레오폴트… 전하.”
“생도입니다.”
지극히 사무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왜 그러나, 라던가.
무슨 일인가, 라던가.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다소 의외의 대답이기도 했다.
“이리 힘드시니, 제가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을까 하여.”
일부러 밖에서의 말투를 썼다.
레오폴트는 그 말에, 아스트리드를 쳐다보지는 않은 채 앞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으려나.
역시 자존심 강한 황태자 폐하는 어쩔 수 없나.
“아스트리드.”
“네, 전하.”
“마지막으로… 이 아카데미에서는 마지막으로, 편히 말해도 될까.”
굳이 이렇게 허락받을 필요도 없는 일인데, 아스트리드는 그 점에서 다소 의아했다.
“그리하시지요, 전하.”
“미안하다.”
“…….”
아스트리드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상당히 뜻밖의 말이라, 아스트리드는 레오폴트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내 이 욱하는 성질이, 결국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렸고.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는 너무 큰 실수를 했다. 네게서 경멸을 받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고, 볼프강 숙부님께 꾸중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아버님께는 말씀드릴 생각이ㅡ”
“그렇다면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지. 어쨌든 나는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까는, 네가…”
레오폴트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선명한 물 자국이 남아, 떨어지는 석양빛으로 반짝였다.
“아스테인과 바람이라도 피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니. 아스트리드 네가 그럴 리 없지. 너는 그런 여자가 아니니까. 내가 실언을 했고, 네게 망신을 주었고, 또 잠시나마 너를 그렇게 생각했다는 점에서.”
레오폴트의 시선이 아스트리드를 향했다.
“나는 네게 사과를 하는 게 맞지. 미안하다, 아스트리드.”
아스트리드는 입을 다물었다.
용서고 뭐고, 어쩐지 레오폴트가 미웠던 응어리가 조금은, 아주 조금은 녹아내리는 느낌.
“하지만 아스테인은 뭔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아스트리드, 약속한 대로 네가 좋은 반려자를 찾는 데에 협조하겠다고 했지만, 아스테인은 아닌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군.”
아니, 그게 아닌데요.
아직 오해가 덜 풀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