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엇갈립니다
그날의 사건이 있기 전까지 레오폴트와 아스트리드는 사이가 좋았다.
둘 다 자라면 부부가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다소 안하무인이고 제멋대로이며 방약무인하다는 평을 듣는 아스트리드가 실제로는 그저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게 서툴러서 그럴 뿐이라는 것도 레오폴트는 잘 알고 있었다.
10년 전의 일.
그날이 있기 전까지는.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는 레오폴트도 그렇고 아스트리드도 그렇고 서로를 싫어했다.
자라면서 아스트리드는 더욱더 차갑고 무정하며 냉정한 여성이 되어갔고, 오히려 성격이 급하고 불같은 데가 있는 레오폴트는 그런 아스트리드와 상극이었다.
만나면 아웅다웅 싸우기가 일쑤고, 서로의 마음을 헤집는 날카로운 말의 비수들이 오가기에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던 그즈음에, 레오폴트는 아스트리드가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문안을 하러 가야 했는데, 가고 싶었는데 막상 가려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왕복 2주나 걸린다는 그런 물리적인 문제도 있기는 했지만, 정말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얼마든지 갈 수 있었으나ㅡ
레오폴트는, 끝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아스트리드가 한 달 뒤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아카데미행이 정해지고.
함께 마차에서 생활하며 수도로 오면서 나누었던 대화가 아직도 레오폴트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저는 전하와 결혼을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아시겠나요.
그렇게 못 박아 말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 오히려 잘됐군. 이런 곳에서 의기투합하게 되다니, 실로 의외다.
나도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없었는데.
애초에 아스트리드 외에 다른 영애와 결혼한다는 건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랬었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더욱 나은 반려자를 찾는 것에 협조한다는 기이한 동맹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게, 진심이건 아니건 간에.
*
멀리서 아스테인과 걸어오는 아스트리드를 본 순간 가슴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네 옆에 설 수 있는 것은 나뿐이지 않았나.
아무리 서로 싫어한다고 하더라도, 약혼이라는 관계로 묶여있는 사이가 아니었나.
그런 내 자리를, 그렇게 쉽게 내줄 수 있는가ㅡ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휩쓸었다.
뜨거운 분노가 가득 차오르고, 당장이라도 달려가 아스테인을 밀어내고 아스트리드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래서, 아스트리드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 말 그대로, 아직 약혼한 사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버님들끼리 하신 약조일 뿐, 아직 우리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레오폴트가 했던 말이 그대로 떠오른다.
아스트리드가 듣고 있음을 알면서도,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해 그녀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을 그 말이 떠오른다.
다시 한 걸음.
- 아스트리드, 듣고 있는 거 알고 있다. 너도 뭐라고 말해보지 그러나.
그녀의 가슴에 꽂힌 비수 같은 그 말을, 이토록 쉽게 비트는 말.
레오폴트의 입에서 흘러나온 독사 같은 말.
다시 한 걸음.
- 그래, 확정이 아니라는 말이지.
비수를 비틀다 못해 다시 한번 그녀의 가슴을 찌르는 말.
다시 한 걸음.
- 아카데미에 온 것은, 내게 더 적합한 비를 찾기 위한 것도 있지. 북부 대공녀보다 더 나은 영애가 있다면 얼마든지 내 비로 맞아들일 생각이고.
분노가 차갑게 식어간다.
머릿속이 깨끗하게, 아주 정결하게 정리되었다.
내가 잘못한 것이다.
내가 잘못했다.
아스트리드의 말간 시선이 레오폴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잘못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당신이 저를 책망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시선이 레오폴트를 향하고 있었다.
레오폴트는 직감했다.
아스트리드는 이제 더 이상 내게 마음이 없다.
더 이상은 제 곁을 내게 내 줄 생각이 없다.
감정의 골은 이미 10년 전에 생겨났고, 오늘 레오폴트의 잘못으로 인해서 그 골이 더욱더 깊어졌다.
레오폴트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10년 전의 그 어린 레오폴트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매번 아스트리드에게 실망만을 안겨주고 있었다.
기이한 동맹 관계에 있어서, 아스트리드는 적어도 진심이었으리라고 레오폴트는 알게 되었다.
절대로 레오폴트와 결혼할 마음이 없음을, 제 곁을 내 줄 생각이 없음을, 파혼하고 말리라는 그 말이 진심이었음을.
연병장을 돌면서도 레오폴트는 생각했다.
이제부터라도, 내가 달라지면 어떻게 될까.
지금과는 다른 내가 된다면, 보다 더 성장하는 내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스트리드가 돌아오길 바란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레오폴트도 아스트리드를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아스트리드가 그토록 쉽게 곁을 내줬다는 게 믿기 힘들었을 뿐이다.
ㅡ라고, 레오폴트는 생각했다.
*
6시 30분.
연병장을 돌기 시작한 지 두 시간이 경과했을 즈음, 두 사람은 바리안트의 지시에 따라 연병장을 도는 것을 중단하고 숙소로 올라갔다.
“고생하셨습니다, 분대장님.”
“…레오폴트 생도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비교적 멀쩡한 모습의 아스트리드에 비해서 레오폴트는 제법 지친 모양이었다.
전투 배낭을 짊어지고 연병장을 도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레오폴트가 지치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이따가 식사 집합에서 뵙도록 하죠.”
“네, 그러시죠.”
가벼운 목례 후, 레오폴트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아스테인이 얼른 일어나 레오폴트가 전투 배낭을 벗는 것을 도왔다.
아무래도 무게가 무거우니 메는 거야 혼자 할 수 있어도 벗는 게 그리 수월하지는 않아서, 레오폴트도 아스테인의 도움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레오폴트도 아스테인이 그리 곱게 보이지는 않았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으니 저녁 식사 전까지 씻으시는 게 어떨까요?”
시계를 보면 6시 40분이 조금 넘어가는 시점.
샤워를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땀 냄새를 풀풀 풍기는 것도 좋지는 않아서, 레오폴트는 아스테인의 말에 선선히 수긍하고는 수건을 들고 샤워실로 들어섰다.
차가운 물을 틀어놓고 세수를 하면, 그 냉기가 달아오른 얼굴을 씻어내리며 상쾌해진다.
하지만 그에 비해 머릿속은 복잡해지기만 했다.
“어머, 별로 안 힘들었나보다.”
“뭐 그렇죠?”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채로, 방 안으로 들어서는 아스트리드를 향해 손을 흔드는 에라냐.
에라냐의 말대로 별로 힘들지도 않았다. 무게야 뭐 딱히 무겁다고 느껴질 것도 아니고 걷는 것도 그저 산보하듯이 걸었을 뿐이니까.
오히려 레오폴트의 걷는 속도에 맞춰서 걷느라 그게 더 신경 쓰였었다.
원래 속도대로 퍽퍽 걸어 나가면, 레오폴트가 자존심이 상해서 또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르니까.
‘뭐라고 하건 상관은 없지만.’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래도 싫은 소리를 사서 듣는 건 사양이었다.
게다가 아까 약간의 소란 끝에, 레오폴트가 의외로 자기 잘못을 선선히 인정하고 넘어갔다는 게 좀 신기하긴 했으니까.
“근데, 분대장님.”
“네?”
전투 배낭을 내려놓고, 가볍게 집어 들어 관물대 안에 원래대로 올려놓는 아스트리드를 향해 에라냐가 신기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분대장님이랑 레오폴트 생도는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아요? 약혼한 사이라면서.”
‘제국 국민뿐만 아니라 이런 엘프까지 알고 있는 건가. 대체 얼마나 떠들고 다녔길래 이렇게까지 되는 거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아스트리드는 그 말에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지금의 아스트리드는 머릿속이 남자의 의식 그 자체이니까 남자와 결혼한다는 자체가 싫다. 하지만 그건 본인 혼자만의 비밀인 거고, 다른 이들에게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걸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하려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일단 저는, 레오폴트 생도가 전혀 남자로 보이지 않거ㅡ”
“안에 안 계신 건 아닐 건데요. 어라, 문 열려있…”
“ㅡ든요. 애초에 그런 시선으로 볼 수도 없… 고…”
갑작스럽게 방문이 열렸다.
방문이 열리고, 그 앞에는 아스테인이 서 있고, 그 뒤에 보이는 레오폴트.
말을 멈췄어야 하는데, 아스트리드의 시선은 레오폴트를 향한 채 입은 끝까지 말을 이어간다.
하필이면 그 말을 하던 그 시점에, 그 타이밍에, 아스테인이 노크조차 없이 문을 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레오폴트에 대해 말하고 있던 아스트리드와 레오폴트가 딱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미 말은 입 밖으로 흘러나갔고, 레오폴트가 그 말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레오폴트의 얼굴은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으니까.
침묵이 감돌았다.
저녁 식사 집합이라서 바깥은 제법 소란스러웠지만 묘하게 이 네 사람 사이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는 듯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분대장님, 식사하러 가시지요.”
한참 만에야, 레오폴트가 그 침묵을 깨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