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남자로 볼 수 없는 여자, 여자로 볼 수 없는 남자
“…아, 앗.”
순식간에 적막이 감돌았다.
“…그, 노크를 했… 는데.”
아스테인의 변명같은 한 마디.
하지만 딱히 이 상황에서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니었다.
아스트리드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아니,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닌…’
거기까지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이건 누가 봐도 뒷담화였다.
앞에서 하지 못할 말은 뒤에서도 하지 말라는 말도 있는데, 지금 아스트리드는 아주 보기 좋게 그 말을 어겨버렸다.
반박의 여지조차 없을 정도로.
에라냐가 아스트리드의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한껏 낮춘 채, 사사사삭 기다시피 아스트리드와 레오폴트의 시야에서 최대한 피하여 문으로 이동했다.
아스트리드와 레오폴트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 아스테인의 손목을 잡아끌다시피 하면서 에라냐가 복도로 나가고, 이내 방 안의 아스트리드와 문 밖의 레오폴트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형세가 되어버렸다.
싸늘한 분위기에, 아스트리드가 이걸 사과해야 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있던 그 때, 레오폴트가 후우 숨을 내쉬며 씩 웃어보였다.
“…밥 먹으러 갑시다, 분대장님.”
“그, 그럴까요.”
그 와중에도 레오폴트는 딱히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복도를 걸어서 계단을 내려가 식사 집합을 하는 곳까지 가면서도 레오폴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안절부절하는 것은 오히려 아스트리드 쪽이었다.
*
“일주일이라 그랬죠.”
“네.”
식판 위에는 건포도가 군데군데 박힌 흰빵과 갈아낸 순무, 옥수수가 몇 톨 섞여있는 노란 수프가 전부였다.
일주일 한정 이벤트로 전쟁식단을 재현한다고는 하지만 이딴 걸 재현해서 뭐하나.
진짜 쓸데없는 곳에 병사들을 처박는 건 여기나 거거기나 똑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니, 나는 간부 후보잖아?’
수프를 한 숟가락 먹자마자 이게 정말 옥수수 스프인지 옥수수 수염차인지 모를 애매한 맛이 느껴졌다. 아무리 음식 투정을 하지 않고 주는대로 잘 먹는 아스트리드라고 하더라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도 이제 5일만 더 먹으면…’
아닌가, 6일인가? 일주일이 어디서부터 카운트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작이 반이라고 했으니까.
식사가 진행되는 식탁의 분위기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식사집합 직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분위기가 좋은 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잘 넘어가지도 않는 식사를 겨우겨우 끝내고 식판을 반납한 후 밖으로 나오면, 분대원들이 먼저 나와서 아스트리드의 합류를 기다리고 있다.
어쩌다보니 제일 마지막까지 밥을 먹게 됐다. 먹는 양은 제일 적으면서 먹는 속도도 제일 느리다니, 아스트리드로서는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겨우 그거 먹으면서 다들 기다리게 했다고 속으로 잠시 책망하는 마음도 잠시.
다들 모여서 숙소로 이동하면 이제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그 뒤부터는 자유시간이었다. 뭘 해도 딱히 간섭하지 않는다. 수시로 울려대던 작업집합 벨소리도 없고, 막사 내 방송도 없는 그런 평온한 휴식이 보장된다.
“레오폴트 전… 생도.”
숙소 입구로 들어가려던 레오폴트를, 가냘픈 목소리가 불러세웠다.
돌아보면, 새하얀 얼굴에 은발 머리가 아름다운 1분대 분대장 아스트리드가 슬쩍 시선을 피한 채 서있다.
“무슨 일입니까, 분대장님?”
레오폴트는 지금 이 순간 놀랍게도 침착했다.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들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다소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 느낌도 없었다.
딱히 그 말이 충격적이지 않아서인지, 아니면ㅡ
애초에 그도 아스트리드를 여자로 보지 않아서인지, 그건 알 수 없었지만.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간의 침묵 사이에 아스트리드의 말은 레오폴트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그 정도의 말이었다. 분명히 아스트리드도 그런 말을 한 걸 신경쓰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딱 그랬던 모양이었다.
“그럴까요.”
딱히 남들 앞에서 할 이야기도 아니니, 오히려 숙소에서 하기보다는 조용한 벤치 같은 곳이 좋을 터였다.
“응?”
그리고 숙소 뒤켠으로 걸어가는 레오폴트와 아스트리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안그래도 부르러 갈까 했는데…”
아케밀라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그 끝에 조랑조랑 매달린 눈웃음이, 지금 그녀는 몹시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유쾌해보였다.
“앉죠.”
솔직히 말이 좀 심하기는 했다.
아스트리드가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아스트리드가 이렇게 되기 전에 여러 번 들었던 말이기도 했다.
- 미안한데 네가 남자로 보이지는 않아.
- 그냥 친구로 남아주면 안돼?
- 마음 편한 친구 같아서…
‘근데 그 말을 내가 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지…!’
게다가 그걸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 했고.
추가로 그걸 걸리기까지 했고.
‘아으으으으으!!!!’
게다가 그 대상이, 일단은 약혼자인 레오폴트.
“분대장님, 할 얘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벤치 주변에는 딱히 사람이 없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와서 대부분 숙소에서 쉬고 있을 시간이지, 지금 레오폴트나 아스트리드처럼 나와서 돌아다니고 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다행이긴 하네.’
“그, 레오폴트 생… 아니, 전하.”
“생도로 칭해주시지요.”
선이 그어진 느낌이었다.
말로 선을 그을 수는 없겠지만 아스트리드는 그렇게 느꼈다.
“레오폴트 생도. 아까 있었던 일은…”
“아까 있었던 일이라면 무슨 일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아스트리드는 살짝 고개를 돌려 레오폴트를 쳐다보았다.
레오폴트는 처음부터 아스트리드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던 모양인지, 벤치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리를 꼰 채 벤치에 기대앉은 그 모습이 제법 그림이 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황태자다운 외모이긴 하네…’
저 밴댕이 소갈딱지만 제외하면 말이지.
아스트리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삐진 것 같았다. 같은 게 아니라 분명히 삐졌다.
아이고, 이 쫌생이 진짜.
“그, 남자로 보지 않고 볼 수도 없다고 했던 그 얘기 말입니다.”
“아아… 그거.”
레오폴트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서 똑바로 앉으며 이번에는 아스트리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자기를 빤히 바라보는 게 좀 부담스럽고 민망스러워 아스트리드는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그게 저한테 왜 미안할 일입니까?”
레오폴트의 말은 제법 의외였다.
사실, 길길이 날뛸 줄 알았다. 약혼녀라는 게, 그게 할 말이냐라던가. 일국의 황태자인 내게 감히 그런 말을 하냐라던가. 그럴 줄 알았는데 지금의 레오폴트는 아스트리드의 예상을 뛰어넘어 상당히 점잖은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네?”
“약혼자고 약혼녀고 간에. 그런 관계를 떠나서, 아스트리드 생도.”
“말씀하세요, 듣고 있습니다."
레오폴트가 몸을 움직여 아스트리드의 곁으로 붙어 앉았다.
그마저도 조금의 공간이 남아있자, 레오폴트는 더 붙어 앉았다.
엉덩이와 엉덩이가 닿을 정도로 찰싹 붙어앉은 상태에서, 레오폴트가 말했다.
“자, 어떻습니까? 뭔가 느껴지는 게 있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뭘 느껴지는 게 있냐는 거야? 뭔 소리를 하고싶은 거지?’
레오폴트의 손가락이 아스트리드의 턱을 받쳐올렸다.
그 푸르른 눈동자가 아스트리드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움직여도 입술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레오폴트의 얼굴.
“어떻습니까.”
“…아니요.”
“아스트리드, 내 약혼녀, 사랑하는 내 아스트리드.”
뜬금없는 말이었다.
‘이 자식이 갑자기 왜 이래? 미쳤나?’
“자, 어떻습니까. 이래도 느껴지는 게 없습니까?”
“딱히 느껴지는 게 없습니다만…”
레오폴트는 그렇게 말하는 아스트리드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느껴지는 게 있느냐, 하면 사실 레오폴트도 없었다.
남녀가 이렇게 착 붙어앉아서, 얼굴과 얼굴이 닿을 만큼 붙어앉아서, 사랑하는 내 아스트리드라던가 뭐 그런 대화를 하다보면 두근거린다거나 설렌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이 있어야 할 것이 자명한데, 놀랍게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레오폴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레오폴트도, 이렇게 하고 있는 레오폴트도 딱히 별 감정이 느껴지질 않았다.
아스트리드도 그런 모양이었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레오폴트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을 뿐, 딱히 뭔가 반응이 없다.
‘그래… 이 정도겠지.’
“아스트리드 생도, 알겠습니까.”
“뭘 말입니까?”
레오폴트가 아스트리드의 턱을 놓고서 다시 거리를 벌려 앉았다.
다리를 꼬고, 벤치에 비스듬히 기대 앉은 레오폴트가 아스트리드를 바라보았다.
“아스트리드 생도는 저를 남자로 보고 있지 않고, 그렇게 볼 수도 없다고 했지요.”
“그랬… 습니다. 그치만 그 부분은 저도 사과를 하려고…!”
레오폴트는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어가려던 아스트리드를 제지했다.
더 이상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사과도 필요하지 않았다.
감정이라는 게 어디 사과로 해결되는 문제이던가.
“사과는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동일하니까요.”
아스트리드가 살짝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늘 무표정하고 얼음처럼 차갑기만 하던 그 얼굴에 어렴풋이 혼란스러운 기색이 느껴졌다.
“동일하다니요.”
“말 그대로입니다.”
레오폴트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는 치기 어린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 뿐이다.
“그렇게 딱 달라 붙어서 살결의 체온이 느껴져도, 살짝만 움직여도 입술과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도,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무, 무슨.”
“아스트리드 생도, 말 그대로입니다. 저도, 저도, 아스트리드 생도를 여자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볼 수도 없습니다.”
네가 남자로 보이지도 않고, 너를 남자로 볼 수도 없다는 여자에게.
레오폴트 역시도 그녀를 여자로 봐야 할 이유가 없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은 저녁에도 올릴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