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레오폴트는 못마땅합니다
목표는 산 정상.
산 정상에 깃발이 하나 꽂혀있고, 그 깃발을 회수하면 종료된다.
산이 그리 험하지는 않아서 오르는 데에 힘들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그 사이사이에 마물들이 제법 많았다.
처음 조우했던 고블린부터 시작해서 오크라던가 코볼트, 중형으로는 놀 정도의 하급 마물들이 주로 나타났지만 다행히 개체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아서, 여전히 아스트리드가 선돌입을 하고 시간텀을 두고 레오폴트가 돌입, 그 뒤로 아스테인의 마법과 에라냐의 화살이 지원사격을 하면서 무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어느덧 해가 산 중턱에 걸리던 그 즈음이었다. 이제 조만간 점심시간이 되는, 허기가 찾아드는 그 즈음.
“…사슴이다, 사슴.”
인기척이 있다며 나무 등걸을 타고 올라갔던 에라냐가 폴짝 뛰어내리며 아스트리드의 양 손을 꼭 붙들었다.
그 눈빛이, 여기서 반드시 저 사슴을 잡아 배를 채우고 가자는 강렬한 열망이 가득했다. 그 열망은 아스트리드를 비롯하여 다른 분대원들도 동일해서, 장장 일주일만에 보는 고기라는 생각에 사슴을 반드시 잡자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후우, 후우… 에라냐, 할 수 있어. 자랑스러운 세계수의 딸, 에라냐…!”
‘언제는 세계수는 그냥 큰 나무라더니.’
다시 나무 등걸로 올라가 심호흡을 하며, 에라냐는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었다. 자세가 몹시 불안정해보이는데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시위를 힘주어 당기는 그녀의 모습이, 반드시 고기를 먹겠다는 집념이 느껴져 웃겼다.
“후우…”
다시금 길게 심호흡을 하더니, 에라냐가 시위를 놓았다.
피슝!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라냐가 양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누가 보면 금메달이라도 딴 줄 알겠네. 마침 종목도 양궁이고.’
말해봤자 아무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에라냐의 저 제스처의 의미는 명확해서, 아스트리드도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졌다.
“아스트리드! 고기! 오늘 점심은 고기야 고기!”
“…에라냐 언니, 진짜 엘프 맞아요?”
“맞다니까!”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린 에라냐가 가장 먼저 뛰어나가고, 그 뒤를 아스트리드를 비롯한 분대원들도 함께 달려갔다.
일주일의 굶주림.
그 끝에, 이제 사슴 고기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그 점잖은 티 혼자 다 내던 레오폴트까지 뛰게 만들었다.
“으, 아니. 저는 못해요. 저 엘프라서요.”
“언제는 엘프도 고기 잘 먹는다면서요.”
목에 화살이 박힌 채 쓰러져 죽어있는 사슴을 가운데 두고 분대원들이 둥그렇게 모여섰다.
고기.
그 열망은 좋았는데, 정작 이렇게 되니까 손질을 누가 할거냐는 문제가 생겼다.
사슴이 너무 사슴 그대로의 모습이라서 이걸 고기의 모습으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한데 그게, 역시 손에 피묻히는 일이다보니 꺼려지게 된다.
“저어어… 는 불피우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앗.”
아스테인이 슬쩍 마법사라는 직업을 내세우며 빠져나갔다.
“어머, 저는 교리상 어쩔 수가 없네요.”
고블린이며 코볼트며 놀이며, 아무튼 마물을 향해 메이스를 휘두르며 웃고 있던 베라시엔을 분명히 봤는데, 지금 와서 교리를 내세우는 그녀. 그럼에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부, 분대장님이 하는 게 좋다고 봐요!”
“네?!”
에라냐의 말에 아스트리드가 질색을 했다.
평소에는 아스트리드라고 이름을 잘만 부르더니 아쉬우니까 분대장이라고 호칭이 바뀐다.
아스트리드도 내키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마물을 쳐죽이는 거야, 안죽이면 자기가 위험한데다 명분도 있으니 이제 좀 익숙해지는 참이기는 해도 이렇게 먹기 위해 고기를 손질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그러네요, 역시 이런 건 분대장님께서 모범을 보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네?!”
에라냐의 말에 적극 찬성이라는 양 베라시엔도 거들고.
“이야아, 분대장님 역시. 모범이 되시는 분이세요.”
아스테인까지 웃으며 거들었다.
‘저거 분명 비웃는 것 같은 표정인데.’
“…알았어요. 제가 할게요. 제가 하면 되잖아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일단 목을 따야 하나? 그… 대검으로 썰면 되려나?
생각하며 사슴의 목을 집어들려던 아스트리드의 손보다. 좀 더 빠르게 다가와 사슴을 집어드는 손이 있었다.
“레, 레오폴트… 생도?”
“분대장님은 잡일꾼이 아닙니다. 아쉬울 때만 찾는 건 그만두시죠.”
레오폴트의 푸르른 눈동자가 분대원들을 슥 훑어보았다.
약간의 짜증이 어린 듯한 눈동자여서, 분대원들은 그 시선을 딱히 마주 보지 못한 채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전투도 제일 위험한 곳에, 그리고 제일 먼저 돌입하는데 이런 잡일까지 미루다니,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분대장님은 좀 쉬고 계시죠. 에라냐 생도, 단검 좀 빌려주십시오.”
“으, 아니. 네…!”
느릿느릿 내미는 에라냐의 손에서 단검을 휙 낚아챈 레오폴트가 가볍게 혀를 차고는 사슴을 질질 끌고 풀숲 너머로 걸어갔다.
‘호기롭게 나선 거는 좋았다만.’
분대원들이 합이 나름 잘 맞는 편이기는 했다. 레오폴트도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이 사슴을 잡은 것까지, 그래. 거기까지도 좋았다.
그 뒤가 문제였을 뿐.
사냥을 하고나면 손질을 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좀 더럽다. 멱을 따고 내장을 긁어내고 뼈도 빼내고 하면서 어쨌든 먹을 수 있게 손질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 과정이 결코 깨끗하지는 않다는 걸 레오폴트는 알고 있었다.
아스트리드도 분명히 알고 있을텐데, 분대원들이 자기한테 미룬다고 그걸 또 못이기고 받아들이는 꼴이 영 마뜩찮았다.
- 제가 당신과 결혼할 일은 절대 없습니다.
- 남자로 보이지도…
‘에라이.’
머리를 저어 그 생각을 털어냈다.
알 게 뭔가. 하지만 그 희고 고운 손가락이 이런 잡일하는 데에 쓰인다는 게 싫었다.
말하자면 보검으로 생선 손질을 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래서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싶어서 나선 참이었다.
하지만 정작 레오폴트 역시도 이런 손질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스트리드야, 워낙 전장에 자주 나갔었으니까 이런 경험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역시 괜히 나섰나?’
어쨌든 어거지로 손질을 하긴 하겠지만 그 꼴을 보고 또 아스트리드가 비웃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야 하겠어…”
“뭐가 말인가요?”
“으익?!”
갑작스럽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레오폴트가 기겁을 했다.
옆에는 아스트리드가 쪼그리고 앉아서 레오폴트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쉬, 쉬고 있으라니까 왜 온 겁니까, 아스트리드. 가 아니라 분대장님.”
“그냥요. 손질, 할 줄 아시나 싶어서.”
“…압니다. 빨리 가서 쉬고 계세요. 안그래도 휴식시간만큼은 꼭 챙기시면서.”
점심시간이건 저녁시간이건 어쨌든 휴식시간은 칼같이 지키던 사람이 아스트리드였다.
“이것도 쉬는 거 아니겠어요?”
아예 옆에 주저앉아버리는 게, 정말로 옆에 앉아서 구경이라도 할 셈인 듯 했다.
“사실은 고기 손질 같은 거, 할 줄 모릅니다. 서툰 모습 비웃으려는 거면 그냥 가십쇼.”
“저도 할 줄 몰라요. 그리고 왜 비웃죠? 험한 일 궂은 일에 먼저 나서는 건 비웃음 받을 일이 아니잖아요.”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이러다가는 손질도 다 못하고 점심시간이 끝날 판이었다. 빨리 먹고 빨리 움직여야 다른 분대보다 나은 성적을 거둘 터.
“아무튼, 비웃지 마세요.”
“네에.”
“어째 고기 양이 많이 줄어든 것 같아.”
“에라냐 언니, 불평할거면 담부턴 손질 직접 하세요.”
아스트리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에라냐를 나무랐다.
하지만, 확실히 고기는 많이 줄어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던 게, 레오폴트도 고기 손질을 해 본 적이 없으니 서툴렀고 중간에 돕겠다고 나선 아스트리드도 해 본 적이 없으니 가죽 해체 작업이나 그런 게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덕분에 고기도 많이 줄어들었다.
“어쨌든 됐어요. 이정도면 다들 배부르게는 아니라도 허기 때울 정도는 충분하잖아요. 어차피 먹고 또 움직여야 하는데 배가 너무 부르면 오히려 안좋아.”
아스트리드의 말도 딱히 틀리지는 않은 말이라, 분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어서 먹고 빨리 움직입시다. 그래도 저희가 1분대인데, 1등해야죠. 다른 분대보다 못하다는 소리 들으면 짜증나요.”
그것 또한 맞는 말이라, 굽기 좋은 크기로 어찌어찌 잘라낸 고기덩이들을 잽싸게 나뭇가지에 꿰기 시작했다.
소금도 없고 후추도 없어서 아마 이대로 구우면 핏물 처리도 다 안되어 누린내가 진동할테지만, 그래도 배가 고픈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아스테인이 피워놓은 모닥불 위에 고기를 꿴 꼬치들을 빙 둘러 꽂아두고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는 분대원들의 표정에, 일주일 만의 고기를 향한 열망이 가득가득 피어났다.
“고~기, 고오~기. 고오오오~기.”
에라냐가 흥얼거리는 기묘한 콧노래.
그 콧노래에 갑자기 베라시엔까지 동참해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후추랑 소금이 아쉽군.”
“그러게요.”
“살짝살짝 뿌려서 먹으면 더 맛이 좋을텐데.”
“그러게 말이에요.”
“…식성은 그래도 비슷한 데가 있군요, 분대장님.”
“그런가 보네요.”
흐흣, 하고 아스트리드가 엷게 미소를 지었다.
*
“저기인 것 같네요.”
아스트리드의 손가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공터를 가리켰다.
말하자면, 체크포인트.
공간 결계로 다 제각각 분리시켜놓은 훈련장에서 군데군데 공용 공간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체크포인트였다.
아직은 적대행동이 금지되는 공간이고, 마물이 일체 등장하지 않는 일종의 휴식공간.
그리고, 다른 분대와의 조우가 발생할 수 있는 공간.
“자… 여기서 좀 쉬었다가 가죠. 정상까지는 아직 한참 가야 할 것 같아요.”
아스트리드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분대원들이 자리에 장비를 내려놓고 주저앉았다. 아무리 험하지 않다고는 해도 산은 산이라서, 그걸 계속 오르고 또 마물까지 잡아가며 올라온다는 건 제법 고된 일이었다.
“고기 못먹었으면 여기까지 못왔을 겁니다…”
기진맥진한 아스테인의 말에 다른 분대원들도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배라도 채웠으니 다행이지, 안그랬으면 번번히 쉬어야 했을 것이다.
아스트리드도 장비를 풀어놓고 쉬려고 할 그 즈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딱 마주치네요. 어쩜 이런 우연이 있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내일은 공부를 해야 해요...
아마도 저녁에만...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