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아케밀라는 도발합니다
체크포인트에 도착해서 다들 장비를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던 그즈음, 레오폴트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신경을 안 써도 되는 일이었다.
분대장인 아스트리드가 험한 일을 하건 말건 그와는 딱히 상관이 없었다. 레오폴트에게 고기 손질을 하라는 사람도 없었고, 또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고. 그냥 가만히 있었어도 될 일이었다.
그게 왜 못마땅했을까, 왜 보기 싫었을까, 왜 마뜩잖았을까.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아스트리드의 손이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게 그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또 신경 써야 할 이유가 뭐가 있는지.
아무것도 없는데.
조금만 다가가도 입술이 닿을 거리까지 서로의 얼굴이 맞닿아도, 그 민트색 눈동자는 레오폴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부끄러움도, 기대도, 설렘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그런 눈동자로, 레오폴트를 단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랬는데.
- 저도 할 줄 몰라요. 그리고 왜 비웃죠? 험한 일 궂은일에 먼저 나서는 건 비웃음 받을 일이 아니잖아요.
‘…그냥 그 이유가 전부겠지. 다른 이유가 있을 리가 없어.’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아스트리드가 어쩌면 자기한테 조금이나마 마음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에 아주 조금이긴 해도, 설렘이 느껴졌던 스스로가 못마땅했다.
‘바보 같으니. 이미 마음 떠난 여자한테 뭘 바라는 건지.’
멍청하기는.
이제 무늬만 남은 약혼이지 않은가.
서로에게 마음이 편치 않은 족쇄일 뿐인, 본인들과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채워진 그 족쇄가 계속 유지될 필요가 없다.
레오폴트는 이제 이번 여름방학이 되어 황궁으로 돌아간다면, 거기서 정식으로 파혼하겠노라고 선언할 작정이었다.
그게, 피차 마음 편한 길이라고 레오폴트는 생각했다.
‘아스트리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니, 오히려 반기겠지.’
분명 그럴 것이다.
“어머나, 딱 마주치네요. 어쩜 이런 우연이 있네?”
정오의 햇빛 아래에서 벌꿀색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반짝였다.
그 아래에 환하게 미소 지은 얼굴로, 아케밀라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케밀라 생도, 우연이네요.”
“그러게요, 아스트리드 생도. 여기서 이렇게 딱 마주칠 줄은 몰랐어요. 선객이 계실 줄도 몰랐는데. 어머.”
아케밀라의 시선이 레오폴트를 향했다.
순간 기묘한 웃음기가 눈동자를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온화하고 자비로운 미소 속에 그 웃음기는 사라져버렸다.
“레오폴트 생도, 점심은 드셨나요?”
“저 아래에서 먹고 왔습니다.”
그리 곱지만은 않은 대답이었고, 어떻게 들으면 좀 퉁명스럽기도 한 대답이었지만 아케밀라는 상관하지 않았다.
아케밀라는 그날 뒤에서 보고 있었고, 또한 듣고 있었다.
흔한 사랑놀음이라 생각했건만, 전혀 그렇지 않은 모양으로 생도들 사이에 조금씩 퍼지고 있는 소문, 즉 레오폴트 폰 아인트하펜 황태자와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 대공녀의 불화설이 마침내 이곳에서 아케밀라의 눈앞에 펼쳐졌다.
물론, 그 소문의 진원지는 아케밀라였지만.
그런데도 이렇게 눈앞에서 목격하고 나니 아케밀라는 기분이 좋아졌다.
“점수는 좀 따셨나요?”
“점수라…”
일일이 세지는 않았었다.
아스트리드가 선 돌입하여 마물들을 격살하는 대신 전장 전체를 보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적은 점수는 아닐 것입니다. 아케밀라 생도는 점수가 괜찮으신 모양입니다, 표정을 보니.”
“그럼요, 저희가 얼마나… 아차, 이거 말하지 말라고 그랬구나.”
실수인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살짝 미소 짓는 아케밀라.
아케밀라 분대는 역시 아케밀라가 분대장이었는데, 전위의 역할은 분대의 다른 중장기사가 맡고 있었다.
쌍검을 사용하면서도 특이하게 마도 기사를 택하지 않고 중장기사를 선택한 그녀는 다행히 분대에 또 다른 중장기사가 있어서, 그에게 전위를 맡기고서 쌍검을 활용한 속도전 위주의 전투를 펼쳐왔다.
그러다 보니 마물을 쓰러뜨리는 속도도 빨랐고, 이쯤이면 분명히 분대 1등은 별문제 없을 것이라고 아케밀라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아케밀라 생도는 유능하시니까, 분명 좋은 성적을 거두시리라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스트리드는 아케밀라가 뭐라고 하건 별 상관이 없었다.
이기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훈련소 교육에서까지 힘 빼가며 경쟁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별 의미 없는 것들이고 포상이라고 한들 기대되는 것도 아니리라.
“아스트리드 생도는 늘 여유가 있으신 것 같아요.”
저 웃음이 좀 띠껍다.
아스트리드는 지금의 아케밀라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상 웃고 다니는 저 표정.
저렇게 웃는 캐릭터는 늘 뒤통수를 치니까 믿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보이는 분대원들은 상당히 지쳐 보였다.
마치 굶기라도 한 것처럼, 오늘 아침 막 산에 들어섰던 아스트리드의 분대원들처럼.
“여유가 있긴 하죠. 분대원들도 배불리 먹였고, 점수도 만만찮게 땄으니까요.”
사슴이 제법 살이 올라서 먹을 게 많았었다.
굽고 나니 시장이 반찬이라고, 걱정했던 누린내 같은 것도 상관없이 어쨌든 맛있게 잘만 먹었다. 애초에 아스트리드가 딱히 음식을 안 가리기도 하고.
“어머, 그렇구나. 저희가 아직 식전이기는 하죠. 여기서 조금 쉬었다가 사냥을 할 생각이었으니까.”
의표를 찔린 모양이었다.
아케밀라의 표정이 아주 약간이지만 일그러졌다.
“저희가 먹고 남은 고기가 좀 있는데, 드릴까요? 에라냐 언니, 고기 남은 거 좀 꺼내 봐요.”
에라냐가, 남은 사슴 고기를 바리바리 챙기는 걸 봤었다.
“아껴뒀다가 먹으려고 했는데…”
그래도 분대장 지시라고 에라냐가 투덜거리면서도 배낭에서 남은 사슴 고기를 주섬주섬 꺼냈다. 제법 큰 덩어리들이 배낭에서 꺼내지고, 그 모습에 아케밀라 분대원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고깃덩어리를 보고 있었다.
“아케밀라 분대장님, 괜찮으시면 저희가 식량을 좀 나눠드리려고 하는데요.”
아케밀라의 표정이 굳어졌다.
얼핏 들으면 점수에 미쳐서 분대원들 밥도 안 먹이니? 우리가 줄까? 로 들리기도 하는 말이라, 아케밀라의 심기를 계속 건드리고 있었다.
“…그러시죠, 역시 아스트리드 분대장님은 마음이 넓으시군요.”
“그러게요. 저는 추운 데서 자란지라, 서로 돕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어서.”
거짓말이지만.
이 얄미운 아케밀라에게 좀 쪽을 주고 싶었을 뿐이다.
“뭐, 좋아요. 마침 잘됐네요. 아스트리드 분대장님, 잠시 저랑 이야기 좀 하실까요?”
아케밀라 분대원들이, 에라냐가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내미는 고기에 달려드는 모습을 잠깐 바라보던 아스트리드.
다소 갑작스러운 아케밀라의 말에, 다시 시선을 아케밀라로 향했다.
“무슨 이야기 말인가요?”
“잠시면 되니까요.”
아케밀라의 손짓을 따라 체크포인트 귀퉁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법한 곳.
아스트리드는 영문도 모른 채 아케밀라의 손에 이끌려 따라와 멀뚱멀뚱 서 있었다. 아케밀라가 불렀으니 그녀가 먼저 말을 해야 할 터이지만 아케밀라는 여유롭게 미소만 짓고 있을 뿐, 딱히 말을 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케밀라 분대장님,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어서 하시지요. 저도 가서 좀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고자 합니다만.”
나 피곤하니까 빨리 말해라, 라는 아스트리드의 말속에 숨은 뜻을 눈치챈 아케밀라가 이내 음, 하고 입을 앙다물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레오폴트 황태자님과 파혼하실 거죠?”
“…네?”
그 말이 너무나도 직선적이어서 순간적으로 아스트리드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런 말을 하려면 적어도 뭔가 요즘 이러이러하던데 그렇게 하려는 거냐라던가, 그런 수식어가 좀 붙어야 맞지 않을까.
‘뭔, 아니. 내가 바라는 바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그런 걸 이렇게 돌직구로 물어보나?’
아스트리드가 갈피를 못 잡아서 말을 못 하고 있자, 아케밀라가 제 말이 맞다고 확신한 마냥 신이 나서 주절주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실은 제가 봤거든요. 두 분, 며칠 전에… 그러니까 입교 다음 날인가, 다음다음 날인가. 저녁 식사 후에 숙소 뒤 벤치로 가서 말씀 나누시는 거.”
‘아.’
그걸 봤구나. 주변에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역시 그럴 리가 없나.
좀 더 조심했어야 했다고 아스트리드가 내심 후회를 해도, 역시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다.
“아무튼 그래서, 생각했죠.”
“무, 무슨 생각이요?”
아케밀라는 아케밀라대로 신이 났다.
저 얼음장처럼 늘상 차갑고 무표정하던 아스트리드의 얼굴에, 작으나마 균열을 끌어냈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다.
부, 명예, 권력, 외모, 재력까지.
모든 것을 다 가진 레오폴트 황태자까지 다 독차지했으니 이제 주변의 영애들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다는 듯이 북방에 처박힌 채 영애들의 초대장을 다 걷어차 버리고.
그렇게, 어쩐지 신이 나 보이는 아케밀라를 보면서 아스트리드는 다른 방향으로 부아가 치밀었다.
‘아니, 내가 왜 당황을 하지? 갑자기 파혼이니 어쩌니 해서 그런가?’
그것뿐만은 아닐 텐데.
하지만 여기서 인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런 훈련 도중에 나눌 만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고.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곳이 아닌 것 같…”
“그럼, 제가 레오폴트 황태자님의 반려자로 입후보해도 되는 거죠?”
“…뭐라구요?”
아케밀라의 말에, 아스트리드가 또다시 당황했다.
“어쨌든 아직은 약혼자이신데, 허락 없이 제가 다가가면 제 평판에 문제가 생기잖아요? 그러니 이렇게 당당하게 허가를 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허가고 뭐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어차피 허가를 해도 다가간다면 다 안 좋게 소문이 날 건데, 이 아가씨도 가만 보면 제정신이 아닌 것 같고…’
제정신일 리가 없다고 아스트리드는 생각했다.
허가고 나발이고 그 이전에 이런 장소에서 이런 타이밍에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자체가, 이 아가씨는 이미 글러 먹었다고 아스트리드는 생각했다.
“혹시… 싫으신가요?”
“싫…”
을 리가 없다.
- 아스트리드 생도, 말 그대로입니다. 저도, 저도, 아스트리드 생도를 여자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볼 수도 없습니다.
‘…알 게 뭐야. 나한테 관심도 없다는 놈인데. 나랑 무슨 상관이람.’
“…맘대로 하세요. 제 눈치 보지 마시고.”
“정말이죠?!”
아케밀라가 신난 모습이, 이상하게 아스트리드는 짜증이 난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중간고사는 내다버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