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당돌한 것과 건방진 것의 차이
훈련장 밖으로 이송된 마물의 시체는 주변의 사람들을 모두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덩치도 덩치고, 다른 곳도 아닌 미간 사이를 정확하게 갈라 머리를 쪼개놓은 것이 아스트리드라는 것이 더욱더 놀라운 사실.
그뿐만 아니라 돌진하는 마물을 힘으로 막아서서 제압한 후 재차 달려드는 마물의 머리를 반으로 갈라놨다는 것은 얼핏 듣기에는 허풍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옆에서 그 모습을 똑똑히 봤다는 다른 분대원들의 증언을 통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스트리드가 마물을 처치한 후, 이윽고 체크 포인트 안에 긴급 게이트가 열렸었다.
그리고 그 게이트를 이용해 훈련장 밖으로 나온 아스트리드와 그 분대원들.
이 소동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 같은 평등한 생도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 특별대우가 필요한 인물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중요도로는 가장 높다고 할 수 있을 레오폴트와, 그다음으로 높은 아스트리드.
그 둘이 동시에 위험할 뻔했다는 것에 대해서, 아카데미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이상입니다.”
보고를 마치고 분대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아스트리드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레오폴트는 옆에 서있던 교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 마물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저건…”
아직 정식 입교생도 아닌 훈련 생도에 불과한 레오폴트이지만, 그 질문에 교관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교관은 당연히 저 마물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다양한 마물들을 봐왔고 실전 경험도 갖추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알고 있지만, 그런데도 차마 바로 대답하지 못한 것은 저 마물이 절대로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마물이라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교관님?”
레오폴트의 재촉에 교관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길게 끌어서 좋을 게 없다.
게다가 생도라지만 그 이전에 황태자이니, 그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지옥마수라고 불리는, 헬베이가… 입니다.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과 빠른 속도로 습격하는 마물입니다.”
짐승형에 속하는 마물을 가리키는 명칭이 마수였는데, 이름이 할베이가이고 통칭이 지옥마수.
“저게 왜 여기에 있습니까? 분명히 아까 교관님이 그러셨지 않습니까.”
레오폴트의 시선이 교관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에는 딱히 분노라던가, 질책이라던가 하는 감정은 어려 있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내 질문에 답하라는 재촉만이 가득했다.
“소형, 중형 마물만 풀어두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잡는 것이 훈련이다… 라고 하셨습니다만, 저건 적어도 소형이나 중형으로 보이지는 않는군요.”
교관은 레오폴트를 차마 마주 보지 못했다.
사고는 터졌다. 교관이 말했던, 황제의 명에 따라 운영되는 이 아카데미에서 이런 사고가 터졌다.
교관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분명 지금의 레오폴트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것이리라 생각한 레오폴트는, 차라리 자기가 입장을 정해서 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른대로 소상하게 고하도록 하시죠. 아인트하펜의 황태자로서 묻는 것이니.”
그게 정답이었다.
교관은 비로소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전하. 가감 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부분은 저희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이며, 이 사고에 대해서는 저희도 철저하게 조사하여 소상히 보고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생각했던 대로다.
바로 원인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저뿐만 아니라, 저를 비롯한 열 명의 생도들이 모두 위험할 뻔했지 않습니까. 게다가 비가 될 미테리엔 영애가 저 마물을 처치할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 오히려 그녀마저 위험할 뻔했고.”
“죄송합니다.”
“됐습니다. 이 일은 반드시 폐하께도 보고를 드리도록 하시고, 원인이 밝혀지는 대로 제게도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이렇게까지 했으면 더 이상 몰아붙이는 것도 꼴사나운 일이었다.
이쯤 했으면 됐고, 또 재발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휙 돌아서는 그의 시선에 이쪽을 멀뚱히 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휙 돌리는 아스트리드가 있었다.
어째서인지 아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던 아스트리드.
원인은 알고 있었다.
아케밀라가 그 말을 했을 때 레오폴트가 딱 잘라 거절하지 않고 은근슬쩍 대답을 회피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남자로 보지 않는다고 한 게 아스트리드였지 않은가.
게다가 서로 나은 배우자를 찾자고 했던 것도 약속이지 않은가.
그래 놓고 저렇게 삐져있다는 게, 레오폴트로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레오폴트는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으니까.
“아스트리드.”
분대원들과 함께 앉아있던 아스트리드가 고개를 들어 레오폴트를 올려다보았다. 딱히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 민트빛의 눈동자가 레오폴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분대장님.”
“말씀하세요, 레오폴트 생도.”
여전히 그 시선이 레오폴트를 향하고 있었다.
레오폴트도 잠시 그 시선을 마주보마주 보았다.
아름답긴 하다.
정말이지, 아름답다는 것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저 거대한 마수와 단독으로 힘대결을 할 정도로 괴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저희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레오폴트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과찬이십니다.”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아스트리드는 레오폴트의 손을 맞잡았다.
*
소동이 일단락되고, 생도들은 잠시 숙소로 돌아왔다.
불미스러운 소동이 있었기에 저녁 식사는 보통의 야전식이 아닌 특식이 제공될 예정이라고 했고, 그 준비 때문에 시간이 좀 늦어질 예정이라 생도들은 전부 숙소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방으로 돌아온 레오폴트와 아스테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옷을 갈아입자마자 샤워부터 했다. 온통 먼지며 땀 범벅이라,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결과는 내일 나온다죠?”
“그렇다고 들었어.”
아스테인의 말마따나 오늘 훈련의 결과 발표는 내일로 미루어졌다. 원래라면 오늘 결과 발표까지 전부 다 이뤄질 예정이었지만 역시 대형 마물의 출현 여파는 제법 커서, 점수 확인보다 그 뒷수습이 더 급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유레이드 영애인가.’
유레이드 가문은 평민이지만, 어지간한 귀족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시골에서 작은 포목점으로 시작한 유레이드 상회가 마침내 상단이 되고, 그 상단이 대상단이 되면서 축적된 어마어마한 부. 그 부를 토대로 아인트하펜의 건국 전쟁에서 군자금을 50% 이상 출자한 그 상단의 영향력은 어지간한 귀족들은 눈 아래로 둘 정도로 거대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집안의 딸인 아케밀라 유레이드의 입후보 신청.
이걸 거절할 명분이라면 분명히 있긴 있었다. 이미 약혼이 정해져 있지 않은가.
결혼은 인륜지대사, 게다가 레오폴트는 황태자이니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 황제인 아버지와 대공인 볼프강 사이에서 나눈 약조를 본인들이 싫다고 무턱대고 파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버지들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아스트리드의 사이는 크게 삐걱거리고 있고, 게다가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 다른 배우자를 찾자고 약속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 틈을 파고든 아케밀라를 거절하기란, 쉽지 않았…
“이야아, 저희 분대장님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레오폴트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못한 채 아스테인에 의해 끊어지고 말았다.
싱글싱글 웃고 있는 아스테인. 이제 일주일 정도 같이 지냈더니 제법 거리도 많이 줄어들고, 사담도 나눌 정도로 친근해지기는 했으니까.
“그러게.”
나이로 따지면 레오폴트가 한살 위여서 편하게 말을 놓고 있었는데, 아스테인도 딱히 불만은 없는 듯했다.
“저는 옛날부터 괴력녀가 정말 좋더라고요. 멋지지 않습니까? 아까 그 뭐야, 그 마수의 돌진을 턱 하니 막아서는데 우와…”
멋있기는 했다.
정말로 멋있기는 했다. 순간 아스트리드! 하면서 저도 모르게 뛰쳐나갈 뻔했던 레오폴트이지만, 정작 아스트리드는 마물의 송곳니를 움켜잡은 채 지지지직 소리와 함께 길게 자국을 남기며 물러서다가 마침내 버텨내더니, 오히려 마물을 밀어내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밀어낼 뿐만 아니라 힘껏 밀쳐내기까지.
“…멋있긴 해.”
“정말 아쉽단 말이죠. 진짜, 레오폴트 생도랑 약혼한 사이만 아니면…”
“아니면?”
“에이, 그래도 그 말은 하면 안 되죠. 그건 좀 예의가 아니니까.”
빤히 바라보고 있는 레오폴트의 시선을 못내 마주 보지 못하고 아스테인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미 예의는 충분히 어겼다는 건 알고 있지?”
“아, 그렇습니까?”
헤헤, 하며 웃어버리는 아스테인.
“약혼한 사이가 아니면, 너도 뭐 들이대 보기라도 하겠다. 이 얘기냐?”
“그야…”
아스테인이 애매하게 미소를 지었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레오폴트는 아스테인의 대답을 알 수 있었다.
내키지 않았다.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다.
아스테인의 옆에 선 아스트리드의 모습, 그딴 거 보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
“…….”
“어머나, 아스트리드 분대장님. 우연이군요.”
“방이 반대쪽이실 텐데,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필연 같군요.”
복도였다.
이렇게 마주치기도 힘든 일일 텐데.
아스트리드는 눈앞에서 방긋방긋 미소 짓고 있는 아케밀라가 아무래도 반갑지 않았다.
반갑지 않다기보다, 싫었다.
“…레오폴트 생도를 만나러 오신 거라면 밖에서 만나시는 게 좋겠군요. 혼성 배치이긴 해도 이렇게 사사로이 드나드는 게 좋아보이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요, 실은 아스트리드 분대장님께 할 말이 있어서.”
뜬금없었다.
갑작스레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하고 싶다는 건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무슨 용건인지 모르겠지만, 나가서 말씀하시는 게 좋겠지요? 레오폴트 생도에 대한 얘기라면 더더욱이요.”
“아뇨, 바로 해도 돼요. 그리 긴 얘기는 아니니까. 게다가 마침 주변엔 사람도 없고요.”
왜 이렇게 저돌적인지, 알다가도 모를 아가씨다.
아스트리드는 그냥 만사가 귀찮아졌다. 그냥 무슨 얘기인지 몰라도 빨리 듣고 치우는 게 나을 것이라, 아스트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3주 뒤, 기초 훈련을 수료하는 날 축하 무도회가 열리는 것, 알고 계시는가요?”
몰랐다.
“몰랐습니다.”
솔직한 아스트리드의 말에 아케밀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재차 미소를 지었다.
뭔가 득의양양한 미소라서, 아스트리드는 그 반대로 기분이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무도회에서, 레오폴트 생도와의 첫 춤을 제게 양보해주세요.”
그게 무슨 가치가 있는지 아스트리드는 잘 모르겠지만 미루어보던데 의미가 없지는 않을 터다.
“싫습니다.”
예상 외로 단호한 대답이었다.
아케밀라는 흔쾌히 허락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 정도는 예상했지만 이렇게 단호한 대답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 때문에 그런 아스트리드에게, 아케밀라는 적잖이 당황했다.
“어째서죠?”
“그야 당연하지 않나요. 아케밀라 생도가 뭐라 하건 도전자 입장이고 저는 이미 약혼녀 입장인데. 거기서 첫 춤을 양보한다면 제 체면은 뭐가 되는지요. 아케밀라 생도는 그 정도 생각도 할 줄 모릅니까? 모르셨다면 제가 다 말씀드렸으니 찬찬히 생각해보도록 하세요.”
갑작스레 쏟아진, 조금의 포장조차 없는 그 말에 아케밀라는 대꾸조차 못 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기어오르지 마세요. 승자의 아량으로 도전을 받아준 것 뿐이지,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기어오르라고 허락한 건 아닙니다. 당돌한 것과 건방진 것의 차이를 조금도 모르시는 듯 한데… 까불지 마세요. 알겠나요?”
제 할 말은 다 했다는 양, 아스트리드는 문을 쾅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 아니 뭐 저런…”
조금도 돌려 말하지 않는 아스트리드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기는 아케밀라도 마찬가지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