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에라냐와 함께
아무래도 타 분대에 비해서 아스트리드 분대와 아케밀라 분대는 시간을 날려버린 게 컸다.
오전 점수 집계에서는 아스트리드 분대가 아케밀라 분대를 근소하게 앞서서 1등을 유지했지만, 오후에 헬베이가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오후 점수가 아예 없는 두 분대는 점수 자체가 끝에서 세는 것이 빠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게 그들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오히려 체크 포인트로 바로 후퇴한 빠른 판단력과 아스트리드를 구하려 한 레오폴트와 아케밀라의 전우애 등의 부가 점수를 얻어서, 그 결과가 바로 휴가증으로 돌아왔다.
4주간의 훈련 기간을 마치고 나면 1개월 간의 영내 대기 기간이 있다.
이 기간 동안에는 딱히 제한이 없이 학원도시 내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물론 도시를 벗어날 수는 없지만 이번에 아스트리드 분대와 아케밀라 분대가 획득한 휴가증은 말 그대로 1개월 간의 휴가를 의미해서, 훈련 기간을 마치고 나면 1개월간 집에 다녀올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다.
그렇게 결과가 발표되고 난 오후. 그날 오후에는 아무 훈련 계획도 잡혀있지 않았다.
바로 전날 사고도 있었고, 아스트리드가 마물을 쓰러뜨렸다는 보고에서부터 시작되어 그 사고에 휘말린 당사자들이 황태자인 레오폴트와 며느리로 점찍은 아스트리드라는 것을 알게 된 크로이츠 폰 아인트하펜은 당연히 대노하여 신속한 진상 조사를 명했고 덕분에 교관들은 발등에 불 떨어진 듯 이리저리 혼비백산 조사를 하기에 바빴다.
물론 생도들은 그런 사정을 알 리 없으니 사고가 있었으니 하루 휴식인가 보다 하면서 그 휴식 시간을 즐길 뿐.
다만 아직 시내로의 외출은 금지되어 있어서 생도들은 그냥 숙소에서 쉬거나 주변을 돌아다니며 산책을 한다거나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바로 여기, 벤치에 앉아있는 은빛 머리카락의 미녀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자기한테 쏟아지고 있는 시선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스마트폰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고, 이거 진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네.’
여기에 그 휴식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이가 있으니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이다.
읽을 만한 책도 없고, 아카데미 도서관에도 아직 출입할 수 없으니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숙소에 있으면 정말로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게 없다.
어쩔 수 없이 아스트리드는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그녀가 이곳에서 깨어난 지 이제 반년, 그리고 몇 주 정도가 더 지났을 것이다.
날짜를 하루하루 세어 본 건 아니니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그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이후로 한 시도 아스트리드 본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잊어 본 적이 없었다.
‘남자잖아, 음. 나는 남자라고. 남자란 말이지.’
몸이 여자가 됐다고 한들 머릿속은 남자다.
약혼자가 있고 그게 바로 레오폴트, 즉 황태자라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망연했던가 말이다.
머릿속은 남자인데, 지금도 그건 확실한데, 조만간 결혼을 해야 한다니.
어이가 없는 일이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며, 아예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그 결과 여기까지, 이 아카데미까지 왔다. 어떻게든 결혼을 미루기 위해서, 레오폴트와 되도록이면 떨어져 지내기 위해 아카데미까지 왔건만 그게 철저히 계산 밖의 일이 되어 도리어 찰싹 붙어 지내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좀 이상하긴 하단 말이지.’
북부 미테리엔 영지에서 지낼 때, 그러니까 아예 레오폴트를 직접 본 게 몇 번 안 될 때를 되새겨보면 이렇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그냥 밍숭맹숭하니 소 닭 보듯이 할 수 있었다.
아무 감정도 없었다.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그야, 아스트리드는 남자니까.
남자가 남자를 보고 설레는 일, 있을 수도 있다.
아스트리드가 보기에도 레오폴트는 잘생겼고 분위기 있는 미남이었으니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아스트리드는 그런 취향이 아니었다.
엄연히 여자를 좋아하는 그런 성적 취향이었는데 감정이 들 게 무엇이며 감흥이랄 게 뭐가 있겠는가. 전혀 그런 게 없었다.
‘따지고 보면 수도로 올 때부터 뭔가 좀 이상하기는 했지?’
레오폴트와 찰싹 붙어 지내게 된 게 수도로 오며 마차에서 24시간을 붙어 지내던 그즈음부터 이리라.
레오폴트가 하는 행동이나 말이 신경 쓰이고, 식사를 하면서부터 레오폴트의 표정이나 그런 게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이 아카데미에 오고 나서부터, 그리고 아케밀라라는 눈꼴 시린 게 나타나면서부터, 레오폴트가 조금씩 이상한 짓을 할 때마다 짜증이 난다.
‘이래서야 꼭…’
생각을 하다가 말았다. 차마 말을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다음에 올 말을 했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 것 같…
“어머, 아스트리드. 여기서 뭐해?”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면 누군가가 햇빛을 등지고 아스트리드 앞에 서 있었다.
그림자로 보이는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보면 남자는 아닌데, 여기서 아스트리드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역시ㅡ
“에라냐 언니?”
레오폴트와 아스테인처럼 아스트리드와 에라냐도 한 일주일 같이 지내며 말을 트게 됐다.
아무래도 엘프가 장생종이다보니 나이에서도 에라냐가 훨씬 많을 것이고, 본인은 25살이라고 말하지만 아마 0을 하나 뺐을 것이라는 추측 속에 아스트리드는 에라냐를 언니라고 부르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반쯤 강제적인 합의이긴 했어도 이제는 언니라는 호칭도 제법 입에 붙었고.
“…그냥 햇볕 쬐고 있죠.”
“그래, 너는 햇볓 좀 쬐야 할 거 같더라. 피부가 허얘가지고는 그게 뭐니?”
사돈 남 말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트리드는 원래 피부가 하얗고, 또 북방에서 햇볕 받을 일이 잘 없다보니까 타지도 않아서 피부가 하얗다지만 에라냐도 만만찮게 피부가 하얀 편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뭐하고 있는데?”
“햇볕 쬐고 있다고 했잖아요?”
물어본 말을 그대로 또 묻는 에라냐의 의중을 몰라서 아스트리드는 똑같이 대답했다. 그러자 에라냐가 덥썩 아스트리드의 손을 잡아끌었다.
“뭐, 뭐에요?”
“매점 가자. 매점 이제 개방했대.”
“아니, 조금 전에 점심 먹었잖아요?”
고기를 식판 가득 담아와서 그걸 다 먹냐는 아스트리드의 경악 어린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이 다 먹어치운 게 에라냐인데, 그게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지금 또 매점을 가자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건 밥배고. 여자는 간식배가 따로 있는 거거든?”
“저는 그런 거 없, 앗.”
아스트리드가 유별나게 힘이 세서 그렇지 에라냐의 힘도 약하지는 않았다.
힘이 없으면 활도 제대로 못다루는 게 당연한 일이라, 갑작스럽게 에라냐가 아스트리드의 손을 잡아 당기니 앗, 하는 사이에 딸려가다시피 벤치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그럼 내가 먹을 테니까 너는 돈만 내.”
“뭐라고요?”
엘프는 다 이런가 싶다가도, 문득 생각하니 조금 전까지 고민하고 있던 것들이 에라냐로 인해 싹 사라졌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 바람에, 아스트리드도 풀썩 웃어버리고 말았다.
“알았어요. 분대장이 한 턱 내죠.”
*
매점이라고는 하지만 PX라는 단어가 아스트리드에게는 좀 더 친숙할 것이다.
처음 와 본 매점의 구조도 그랬다. 입구로 들어서면 제일 정면에 계산대가 보이고, 그 계산대를 지나 들어가면 진열대가 몇 겹이고 세워져 상품들이 가득 올려져 있었다.
소세지를 중간에 끼운 빵이라던가 머핀, 컵케이크 같은 간단한 제빵류부터 시작해서 쿠키같은 제과류도 제법 구색이 잘 갖춰져 있었다.
구석에는 아예 베이커리가 들어서 있었고, 그 옆에는 드링크 바도 있었다.
“제법 본격적이네요.”
“그치? 내가 지난주에 와서 먹었던 게 이건데, 이거 괜찮더라. 너도 이거 먹어봐.”
에라냐가 아스트리드의 동의도 없이 바구니에 소세지빵을 덥석 집어넣었다. 아스트리드는 딱히 뭘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이렇게까지 권하면 그래도 하나 정도는 먹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라고 생각했는데, 소세지빵을 필두로 치즈머핀에 건포도 쿠키, 안에 다짐육을 넣고 익혀낸 만두와 비슷하게 생긴 간식, 거기에 베이커리에서 파는 마들렌에다가 드링크 바에서 가져온 차가운 홍차까지.
“…저 점심 때 먹은 것보다 이게 더 많은 거 알아요?”
지갑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서 계산하고 돌아서는 아스트리드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지만, 그 말을 들어야 할 상대방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에라냐 언니?”
주변을 둘러보면 창가에 있는 빈 식탁에 이미 자리를 잡은 에라냐가 아스트리드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기, 여기!”
아예 계산부터 아스트리드에게 맡겨둔 채 빈 자리부터 차지하고, 또 이미 식사까지 시작한 에라냐.
“언니, 점심 먹은 거 얼마 안됐는데. 알긴 아는 거에요?”
맞은 편 식탁을 끌어내면서 아스트리드가 웃자, 에라냐도 그런 아스트리드를 보면서 활짝 웃었다.
이렇게 보면 누가 언니고 누가 동생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다.
“잘 먹어야 훈련도 잘 받는 거야. 강병에 보급이 딸리면 되겠어? 일주일을 그딴 쓰레기만 먹었는데 보충하려면 이것도 모자라.”
그러면서도 치즈 머핀을 입 안에 한가득 욱여넣는 에라냐를 보면서 아스트리드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날, 아스트리드는 결국 소세지빵 하나만을 먹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에라냐의 차지가 되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저녁에 한편 더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