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똑같은 것들끼리 고민상담 해봐야
훈련은 주중에만 있는데, 주말에는 보통 자유시간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아스트리드는 무의미하게 그냥 놀면서 시간만 보내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이제 훈련 2주차의 일요일인 오늘은 오전부터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에라냐를 쫓아내고 침구류를 모두 꺼내서 연병장 앞에 늘어놓고 일광건조를 시키고 있었다.
혹여 누가 훔쳐가기라도 할까 그 옆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침구류를 바라보고 있자면 정말 지루하기도 하고, 어쩌자고 내가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에는 또 뭐하지…’
빨래도 어제 다 해버렸고, 오전부터 일광건조까지 시키고 있으면 이제 오후에는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나 고민이 된다.
‘무도회… 음, 다음다음 주에 무도회지…’
4주차가 끝나는 토요일 밤에는 무도회가 열린다.
수료 기념 무도회인지 뭔지인데 거기서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춤과 마지막을 알리는 춤을 레오폴트와 아스트리드가 춰야 했다.
이렇게 두 번을 춰야 하는 춤이니, 아케밀라가 시작의 춤을 넘겨달라는 것도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대놓고 말을 하면 안 되지. 싸가지 없는 게 진짜.’
이번 주에도 내내 그랬다.
분대끼리 섞어서 하는 훈련에서도 레오폴트 옆에서 어찌나 찝적대는지, 보는 내내 아스트리드가 열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그걸 티를 내자니 훈련인데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싫고, 또 레오폴트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아서 더더욱 싫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대체 뭐가 문제야.’
분명 자기가 남자라는 자각은 있다.
하지만 뭔가, 아케밀라가 레오폴트에게 찝적대는 걸 보면 울화통이 치민다.
당장이라도 가서 뭐하는 짓이냐고, 신성한 아카데미에서 무슨 연애질이라도 하려는 거냐고 역정을 내고 싶…
“어라, 분대장님 아닙니까?”
고개를 들어보면, 아스테인이 히죽히죽 웃고 있다.
“…아스테인, 너도 매점 가게?”
아스트리드 역시 레오폴트와 마찬가지로 아스테인보다 한 살 많아서,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있었다.
“예? 아, 아뇨. 저 아침 많이 먹어서.”
“그래… 너는 그래도 좀 상식적이긴 하구나.”
지난 주의 에라냐에 비해서는 아스테인의 이 반응이 상식적이기는 하다.
“제가 좀 상식인이기는 하죠. 분대장님은 여기서 뭐 하십니까?”
앉아도 되겠냐는 말도 없이 아스테인이 자연스럽게 아스트리드의 옆에 앉았다. 그 일련의 행동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아스트리드는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못 했다.
“…그냥, 햇볕 쬐고 있었지.”
변명이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거라서, 아스트리드는 적당히 핑계를 댔지만 아무래도 실패인 모양이었다.
아스테인의 눈꼬리가 슬쩍 치켜 올라가서 아예 눈을 감아버린 것처럼 보이는 저 얼굴을 봤을 때, 아스테인은 분명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어제부터 분대장님 좀 이상한 거 아십니까?”
“내가? 뭐가?”
속으로는 뜨끔했다.
이상하기는 했으니까. 아케밀라가 레오폴트에게 아양을 떠는 게 꼴 보기 싫었고, 짜증이 났으니까.
그게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아스트리드는 포커페이스라고 했는데. 이래서야 곤란한데. 아스트리드는 속으로 표정을 관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아무 일도 아닌 척 시치미를 뗐다.
“에이, 뭔가 언짢아 보이는 얼굴인데요. 대화 상대가 필요하신 거 아닙니까?”
“전혀 아니야. 고민 같은 거 키우는 성격 아니야.”
아스테인이 하는 말이 이상하게 족족 다 들어맞는다.
조금 전까지 자기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어째서 레오폴트가 아케밀라랑 대화를 할 때마다, 그리고 자기한테 소홀할 때마다 짜증이 나는지 고민하고 있던 게 아스트리드였다.
“어라, 분대장님. 고민하시는 거 같다는 말은 안 했는데요?”
“…….”
이래서 머리 좋은 마법사 놈들이란.
속으로 혀를 차며 아스트리드는 입맛을 다셨다.
“에이, 고민은 혼자서는 해결이 안 되니까 고민인 거 아닙니까? 제가 싹 들어드릴 테니까 한번 말씀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니, 뭔 속을 꿰뚫어 보나?’
자기가 단순하다는 생각은 안 하는 아스트리드지만, 그래도 아스테인의 말이 좀 솔깃하기는 했다.
‘어쩌면, 그냥 상담을 좀 하면 나아지려나?’
혼자서 고민하고 끙끙댄다고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스트리드는 속으로 잠시 더 생각을 하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 얘기가 아니고, 진짜 내 얘기는 아니고 내 친구 얘긴데.”
“어라, 분대장님 친구 있었습니까?”
“야.”
친구 없다.
하지만 이렇게 사실을 말하면 기분이 나쁘다.
아슈레이도 친구라고 한다면 친구다. 비록 피 안 섞인 동생이긴 해도.
친구처럼 지내면 친구 아닌가.
“나도 친구 정도는 있다고. 아무튼 내 친구 얘긴데.”
“네네, 분대장님 친구분 얘기.”
아스테인이 벤치에 푹 기대며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아니… 내 친구도 여잔데, 아무튼 약혼을 했단 말이야. 알겠어?”
“그렇죠, 저야 평민이니 잘 몰라도 귀족들은 정혼자가 있는 게 정상이라던데. 아무튼 그래서요?”
“어… 근데, 걔랑 약혼자가 분명 사이가 안 좋거든? 서로 관심도 없고 흥미도 없고 뭐… 소 닭 보듯이.”
“소 닭 본다? 그건 또 무슨 말이랍니까?”
아.
이런 말도 여기서는 안 쓰는 모양이었다.
“북방 이민족들 속담이야. 서로 관심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때. 아무튼 그렇단 말이야.”
“이야, 그래가지고 결혼생활은 어떻게 하려고 그런대요? 결혼하면 서로 힘들겠는데요.”
“그, 그건 네가 상관할 바 아니고!”
이상하게 민망했다.
분명히 친구 얘기인데, 아스트리드는 확확 열이 나는 얼굴로 차라리 지금이라도 얘기를 그만할까 생각했지만 여기까지 얘기한 이상 그냥 마지막까지 하는 게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요? 서로 별 관심 없는 남녀, 약혼 사이네요. 그래서요?”
아스테인도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아무튼 그, 아무튼 그런데 내 친구가 이상하게, 그 약혼자에 아무 관심도 없단 말이야. 그냥 감정도 없고, 그냥 얼굴 아는 사이처럼 그냥 그 정도?”
“네네.”
“근데 그 약혼자랑 어쩌다 보니까 같이 붙어 지내게 됐다고 그러더라구. 근데 그러면 좀 불편하고 그렇잖아. 그렇지?”
아스트리드의 말에 아스테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별 감정도 없는데 딱히 불편할 게 있어요? 그냥 남처럼 지내면 되는 거 아니에요?”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아무튼 그래서 레오폴트가 나한테 신경 안 써주고 그러면 막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그런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 이해가 돼?”
아스테인은 아스트리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이 미녀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는 있을까.
레오폴트가 그녀를 신경 써주지 않으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난다고 말했는데, 그걸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서 이게 말이 되냐는 얼굴로 아스테인을 쳐다보고 있는 아스트리드는 참, 마물의 돌진을 정면에서 힘으로 받아치던 그 여자라고는 차마 믿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아무튼,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분명 아무 감정도 없는데 막, 자기 안 챙겨준다고 그게 왜 기분이 나쁜지, 짜증이 나는지, 화가 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그러더라니까.”
“아아… 그러셨군요. 근데 보통은 그거…”
아스테인이 히죽히죽 웃으면서 아스트리드에게 말했다.
“질투라고 그러던데요.”
“…뭐?”
한창 열이 올라 얘기를 해대던 아스트리드가 그 순간 뚝 멈췄다.
“…지, 질투…?”
“네. 분대장님이 좋아하는 레오폴트 생도가 자기보다 다른 여자를 챙긴다거나, 그러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난다면서요.”
“무, 무슨 소리! …읍.”
빼액하고 소리를 지르려다 주위의 시선을 보면서 자기 입을 틀어막는 아스트리드.
“내, 내가 아니라고! 내 얘기가 아니라고 했잖아!”
“아, 그랬죠. 아무튼 분대장님 친구분이 그 약혼자가 다른 여자 챙기면 화나고 짜증 난다면서요. 그게 질투죠. 당연한 건데요?”
“지, 지지질, 질투라니…!”
황망한 표정의 아스트리드를 두고, 아스테인은 기지개를 켜며 벤치에서 일어섰다.
“저는 빨래 널러 가겠습니다아. 친구분께 말씀 좀 전해주십쇼.”
“무, 무슨 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아스트리드에게, 아스테인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빨리 낚아채는 게 임자예요. 원래 남자고 여자고 빠른 놈이 이기는 거라니까요.”
“…….”
“무운을 빕니다, 분대장님.”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멀어져가는 아스테인의 뒷모습을, 아스트리드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어머, 레오폴트 생도님 아닌가요?”
“아… 베라시엔 수녀님. 여기서 뵙는군요.”
식당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화단에 레오폴트는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교회로 돌아가던 베라시엔이 보고 말을 걸었다.
“여기서 뭐하고 계신가요?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은 아닌데요.”
누가 권한 것도 아닌데 베라시엔도 벤치에, 레오폴트의 옆에 살짝 앉았다.
“고민 같은 거 없습니다.”
베라시엔의 보랏빛 눈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어머, 고민 있으시냐는 말은 안 했는데.”
“…….”
“고해성사하는 셈 치고 저한테 털어놔 보세요. 무슨 고민이에요? 고민은 역시 나눠야 금방 해결이 되는 거라고요.”
“그게… 음.”
레오폴트는 잠시 생각했다.
수녀잖은가. 종군 수녀. 고해성사한다 치면, 괜찮은 게 아닐까.
마침내 레오폴트는 결심했다.
“…제 얘기가 아니라, 제 친구 얘기입니다만, 제 친구가 어릴 때 혼약을 맺은 약혼녀가 있는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내일은 아마도 한편이 될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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