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녀는 절대 함락되지 않는다-31화 (31/62)

31화. 무도회 (1)

“그냥 제복 입고 가면 안 돼요?”

“무슨 천벌 받을 소리를 하고 그래.”

“뭘 이거 가지고 천벌이야, 천벌은.”

아스트리드는 얼굴을 찌푸리며 에라냐를 빤히 쳐다보았다.

에라냐 역시도 눈에 힘을 힘껏 주고서 아스트리드를 마주 쳐다보았다.

에라냐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니지만, 아스트리드는 더 크다. 북방 출신이라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아스트리드의 키는 컸다.

같은 연령대의 여성들에 비해서도 훨씬 큰 아스트리드가 에라냐를 내려다보면 절로 위압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에라냐는 이번만큼은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양 그런 아스트리드에게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스트리드, 잘 들어봐.”

“또 뭘요…”

이제는 어떻게 설득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문제의 발단은 내일 밤에 있을 무도회였다. 5일간에 걸친 야외 숙영 훈련이 막을 내림으로써 이제 사실상 훈련은 모두 끝났다.

이제 본격적으로 1학년이 되는 길목에서, 훈련 수료를 기념하는 무도회가 이제 하루 앞으로 다가왔고, 어떻게든 드레스를 입히려는 에라냐와 드레스를 별로 입고 싶지 않은 아스트리드 사이의 신경전이 이렇게 벌어지고 있었다.

드레스를 입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북부에 있는 미테리엔 저택에서도 드레스를 종종 입긴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무도회에 참석한 적은 없었기에 아스트리드가 입었던 것은 사실상 드레스라기보다는 일상복에 가까운 것이고, 지금 에라냐가 내밀고 있는 드레스는 말 그대로 이성을 유혹하기에 최적화된, 그야말로 아가씨의 드레스.

“얘가 진짜 어려서 그런가, 아니지. 아스트리드 너 정도면 무도회가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잖아? 대공녀가 무도회의 의미를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말이 되죠. 왜 안 되겠어요. 내가 진짜 아스트리드가 아닌데.’

겉으로 보기에 아스트리드는 20살이 되어 성숙한 아가씨의 모습이었다. 이미 사교계에 데뷔한 지도 10년이 되었고, 무도회에도 여러 차례 참가한 경험이 있는 아가씨였다.

비록 돌려 말하지 못하는 성격이라던가 입만 열면 튀어나오는 독설들 때문에 평판은 바닥을 치고 있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무도회에 참가한 적은 많을 것이다.

다만 지금 아스트리드의 내용물은 무도회고 나발이고 소설 속에서 본 것밖에 없는 그런 남자라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언니가 생각하는 무도회의 의미가 뭔데요.”

대답을 하기보다는 역으로 질문을.

아스트리드는 괜한 말을 했다가 또 이상한 오해를 받는 것보다는 나으리라는 생각에, 에라냐의 의견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러니까 뭔데요.”

“소녀들의 전장!”

가슴을 쭉 펴며 뭐가 그리 대단한지 자기가 으스대며 대답하는 에라냐에게 아스트리드가 할 말을 잃었다.

“전 소녀가 아니니까 그냥 제복 입을래요. 제복도 예쁜데 왜요.”

“야, 너 진짜 자꾸 이상한 고집 부릴래?”

“언니야말로 이상한 고집 좀 그만 부리세요. 게다가 이게 뭐야, 이게 무슨 드레스냐고요.”

“와… 정말 얘가 몰라도 몰라도 너무 모르네. 언니가 이거 사놓고 입을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이게 수도 최신 유행이라니까?”

에라냐가 내미는 드레스는 그냥 봐도 길이가 상당히 짧았다. 짧은 데다가 또 문제는 옆트임이 심각하게 높이 올라와 있다.

“그러니까, 최신 유행이니까 절 보고 이거를 입어라?”

아스트리드의 말에 에라냐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드레스가 지금의 원흉이었다.

무도회라고 해봐야 아카데미 무도회일 텐데 이까짓 거 차려입을 필요가 있냐, 그냥 제복 입고 가겠다는 아스트리드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드레스를 입으라는 에라냐.

게다가 에라냐는 자기가 사놓고 한번도 못 입었다는 새 드레스까지 꺼내놓고 아스트리드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야, 벌써 소문 다 났다고. 아케밀라 그 평민 계집애가 레오폴트를 노리고 있다며?”

“…그게 벌써 소문이 다 났어요?”

“그래! 그렇게 들이대는데 그럼 소문이 안 나?”

‘에이. 역시 그런가.’

아케밀라가 황태자비 후보로 입후보를 했고, 아스트리드 앞에서도 당당히 레오폴트에게 들이대고 있다는 점에서 생도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몸으로라도 이겨야 할 거 아냐.”

“…네?”

순간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에라냐가 지금 뭐라고 한 것인지, 대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아스트리드가 잠시 굳어버린 사이, 에라냐는 기회를 잡았다는 것처럼 아스트리드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생각 좀 해 봐. 아무리 그래도 네가 지금 약혼녀인데, 레오폴트가 홀라당 그 계집애한테 넘어가 버리면 기분 좋겠어? 게다가 대공녀인 네가, 아무리 돈이 많고 건국공신이라고는 해도 그런 못생긴 계집애한테 황태자를 뺏길래? 응? 말이 돼?”

아케밀라가 들었으면 거품 물고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말을 서슴없이 늘어놓으며, 숫제 에라냐가 아스트리드의 턱밑까지 얼굴을 들이대 가며 거듭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거 봐, 이 젖 큰 거 좀 봐. 이거 안 써먹을 거야? 응? 그리고 이거, 허리. 밥 잘 안 먹길래 왜 그러나 했더니 이 허리 좀 봐. 이 가는 허리 뒀다가 뭐할래? 응?”

“어, 언니. 잠, 잠깐만, 잠깐만.”

“잠깐은 개뿔이, 그냥 몸만 좀 보여줘도 레오폴트하고는 기정사실 만들겠는데. 응? 너 진짜 바보야? 멍청이야?”

“아니… 그게, 아니, 그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여기가 안이지 밖이야?! 야, 잔소리하지 말고 이거 입어보기나 해. 나 잠깐 밖에 있을 테니까, 얼른 갈아입어. 알았어?”

기백이 대단했다.

에라냐는 기필코 아스트리드에게 이 드레스를 입히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확고한 듯 보였다.

‘…어차피 무도회에 직접 입고 갈 것도 아닌데, 한 번 정도는…?’

“아, 알았어요. 알았다니까. 일단 지금만 입어보는 거예요. 알겠죠?”

“그래, 입어보기나 해. 진짜 딱 입어보면 마음에 들 거라니까.”

“알았어요. 그럼 갈아입을 테니까 나가 있어요.”

“도움 필요하면 부르고!”

뭔 이거 입는 데 도움씩이나 필요하겠어. 아스트리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에라냐를 방 밖으로 내쫓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방문을 잠가놓고, 입고 있던 일상복을 주섬주섬 벗어서 개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옆에 걸려있던 드레스를 집어 들면, 이게 정말 드레스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그것부터가 의문이었다.

짧다.

에라냐에게는 적당한 길이일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키 차이 때문에 아스트리드에게는 짧다.

게다가 가슴을 받치는 컵의 사이즈부터도 차이가 커서 제대로 담기질 않았다.

윗가슴이 컵에서 넘쳐서 조금만 팔을 움직여도 가슴이 안정되지 못하고 출렁거리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어깨 부분의 슬랫은 없다시피 검은 레이스로 박음질해서 어깨 살짝 아랫부분을 지지하게끔 만들고 그게 컵으로 곧장 이어지는 말 그대로 노출을 위한 드레스.

“…이, 이게 다 내려온 건가…?”

낑낑대며 아래로 내려봐도 더 이상 상의가 내려오질 않았다.

“와… 진짜 이게 다 뭐야.”

그러다가 문득 옆을 보면, 드레스와 세트라는 팬티까지 곱게 접혀있었다. 이것까지 입어야 제대로 입는 거겠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질 않는다.

아스트리드는 팬티를 집어 들고서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건 끈팬티였다. 아스트리드 역시도 팬티를 입고 있는다고는 하지만 별 무늬 없는 면으로 된 재질의 팬티만 입을 뿐이지 이런 끈팬티를 입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없다기보다, 애초에 본 것도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이걸 입어야 한다는 점에서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기왕 하는 거 역시, 확실하게 하는 게… 낫겠지?’

*

“레오폴트, 있어?”

노크조차 생략하고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면, 방 안에서는 레오폴트가 침대에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창가에서 들이치는 햇빛이 머리카락에 반사되며 금빛 빛무리가 되어서 흩어져가고, 그 사이로 파란 눈동자가 에라냐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있었네. 일루 와 봐, 빨리.”

“무슨 일입니까?”

에라냐의 입가가 마치 고양이처럼 슈루룩 말려 올라가며 뭔가 음흉한 미소로 변해갔다. 레오폴트는 그 시선에 뭔가,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굳이 내색을 하지는 않고서, 에라냐의 손짓에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일루 와 봐. 내가 좋은 거 보여줄 테니까.”

“어, 저는요?”

“아스테인 너는 오면 안 돼.”

“저는 왜요!?”

“레오폴트 전용이거든.”

후다닥 따라나서려는 아스테인을 발로 걷어차서 방 안으로 밀어 넣고, 에라냐는 후다닥 문을 닫아버렸다. 아스테인이 따라오면 안 되고 레오폴트에게만 좋은 거라면 아무래도.

‘아스트리드인가?’

뭔가, 살짝 두근거린다.

레오폴트는 어쩐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조용히 하라는 에라냐의 제스처에 입을 꽉 다물었다.

- 똑똑.

“저기, 아스트리드. 옷 다 입었어?”

- 자, 잠깐만요! 이거, 이거 왜 안 묶어져… 아, 됐다. 어, 잠깐만요!

방 안에서는 아스트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가 제 맘대로 안되는 듯 짜증을 내다가 이제 됐는지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에라냐가 레오폴트를 보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보고 놀라지 말라고.”

“네?”

“아스트리드, 들어갈게?”

- 덜컥.

하지만 아스트리드가 에라냐를 내보낸 후 문을 잠가버려서, 에라냐가 손잡이를 흔들어봐도 덜컥거리는 소리만이 날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 잠갔어?”

- 아, 지금 열게요.

문 잠금쇠 돌리는 소리가 나고, 손잡이가 돌아간다.

그리고 천천히 경첩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에라냐 언니, 이거 옷이 너무 짧.”

“…아스트리드?”

어두운 보라색의 드레스가 아스트리드의 새하얀 피부에 잘 어울렸다.

컵이 너무 작은 드레스에 윗가슴이 넘칠 기세로 드러나고, 그 윗가슴을 간신히 받치고 있는 컵은 레이스와 함께 어깨를 둘러서 아마도 등을 가로질렀을 터다.

잘록한 허리에는 매끈해 보이는 재질의 드레스가 착 달라붙어 그 유려한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고, 짧디짧아 안 그래도 높아 보이는 옆트임이 골반 위까지 시원하게 트여있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어렴풋이 비치는 검은색의 끈으로 된ㅡ

“어때, 레오폴트. 내가 좋은 거 보여준다 그랬지?”

아스트리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는 차마 가려지지 못할 그 가슴을 어떻게든 가려보고 있고, 다른 한 손은 과하게 짧아서 아무리 끌어당겨도 팬티만 겨우 가리는 앞섶을 어떻게든 힘주어 끌어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약간 도톰한 아랫배가 더욱 도드라지게 보여서, 그 모습이 더욱ㅡ

“아, 아스트리드.”

레오폴트의 목소리가 달달 떨렸다.

“…문 닫을게.”

간신히 그 말을 끝으로, 아스트리드의 모습은 천천히 닫히는 문 너머로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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