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녀는 절대 함락되지 않는다-32화 (32/62)

32화. 무도회 (2)

“자, 잘못했어…!”

등 뒤로 차가운 벽의 질감이 느껴졌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눈앞의 이 하얀 맹수에게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그 무언의 압박에 에라냐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게 아주 잘, 선명하게 느껴졌다.

“…일부러 그랬죠.”

이미 이성이 날아간 것 같은 이 아름다운 하얀 맹수는 이빨을 드러내며 당장이라도 에라냐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기세였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건지, 부끄러움이 남은 건지 아직도 얼굴이 불타오를 기세다.

에라냐의 눈에는 아스트리드 주변으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가 이 세상에서 볼 마지막 광경이 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위기감에, 에라냐는 목이 부러질 기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야…! 진짜 아니야…!”

레오폴트가 그렇게 문을 닫은 뒤, 잠시 후 문을 열고 웃는 낯으로 들어선 에라냐의 얼굴에서 그 웃음이 지워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말해봐요.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랬는데요. 언니가 입으라는 대로 입었는데 나한테 왜 그랬는데요. 언니가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나한테 왜 그랬어요.”

“그, 그게… 답답, 맞아! 답답해서! 답답해서 그랬지!”

“언니가 답답할 게 뭔데요.”

아스트리드의 주먹이 있는 힘껏 쥐어진 채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그 모습에 에라냐는 이제 정말로 대답을 잘해야 하는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 아스트리드의 완력이라면 에라냐의 목과 몸통을 분리시켜 놓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레오폴, 레오폴트랑 좀 잘되라고…! 그 옷이면, 레오폴트도 분명 이성을 잃고 달려들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이 옷이 뭔데요. 이거…”

그제야 입고 있던 옷을 내려다본 아스트리드가 뭔가를 깨달은 듯 에라냐를 노려보았다.

“이거, 수도에서 유행한다는 말, 거짓말이죠. 그래, 당연히 거짓말이겠지. 그럴 리가 없지.”

이딴 옷이 유행한다면 그 나라는 끝장이라고. 내가 도대체 왜 그딴 어처구니없는 말을 믿었는지 모르겠네.

“이 옷, 거짓말 맞죠. 수도에서 유행한다거나 뭐 그딴 거 아니죠.”

“그거 그냥, 그… 시, 신혼 첫날 밤에 유혹용으로 입는… 이, 이벤트 옷… 인데.”

“…그걸 왜 나한테 입히는데요.”

아니, 얘는 왜 또 당연한 걸 묻는 거야. 에라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뻔한 게 아닌가.

“레오폴트랑 잘되라고! 아니, 잠깐만. 생각하니까 화나네. 야, 아스트리드.”

답답함은 에라냐마저도 역습하게 만들었다.

조금 전까지 아스트리드의 기백 앞에 잔뜩 움츠려있던 에라냐지만, 지금 이 순간 에라냐에게 아스트리드는 기껏 생각해서 챙겨줬더니 오히려 성을 내는 배은망덕한 년이 되어있다.

“그래서, 레오폴트 싫어?! 싫으냐고! 야, 아스트리드. 네가 하도 비비적대면서 그러니까 그냥 확, 기정사실 만들라고 내가 등 떠밀어준 건데 고맙다고는 못하고 지금, 협박하는 거냐? 응?!”

“아니, 아니. 언니, 그게 아니라.”

이쯤 되니 오히려 전세가 역전됐다.

에라냐를 당장이라도 상하 분리를 시켜놓을 기세였던 아스트리드가 오히려 에라냐의 역습에 주춤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이 언니가 너보다는 오래 살았으니까, 아케밀라한테 네가 매번 밀리기만 하니까 내가 이렇게 직접 손도 써줬는데, 언니한테 고맙습니다 인사는 못할망정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응? 볼프강이 너 이렇게 가르쳤니?!”

“어, 언니. 아니 그게 아니고…”

“빨리 고맙습니다, 차려진 밥상 걷어차서 죄송합니다 해야지!”

“네?!”

언어도단도 이만저만이다.

부끄러움에 죽어버릴 것 같은 꼴을 당한 건 아스트리드인데, 그걸 도리어 에라냐에게 고맙다고 하라는 이 상황이 아스트리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너도 생각해봐라, 너 그러다가 레오폴트가 아케밀라한테 홀라당 넘어가면 어떡할래? 응? 그때 가서 아, 언니 저 좀 도와주시지 그러셨어요 이럴래?!”

“무, 지금 무슨 말씀을…”

“그런 꼴 안 보게 됐으니까 언니한테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엄청난 박력이었다.

분노로 휩싸여 있던 아스트리드가 조금 이성을 되찾기가 무섭게 역공을 가해오는 에라냐 때문에, 아스트리드는 주춤주춤 물러섰다.

“빨리 고맙습니다, 안해?!”

이상하다.

분명히 말도 안 되는 일인데, 묘하게 에라냐의 말에 설득력이 있었다.

레오폴트가 아케밀라에게 넘어간다? 아무튼 그건 싫다.

그러면, 이 일이 오히려 잘 된 건가? 그럴 확률을 줄였으니까? 그리고 그게 에라냐 덕분이다…?

이게 맞는 건가?

맞는 것 같다.

“고, 고맙습니다… 언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아스트리드는 어쨌든 고맙다고 했다.

*

“뭘 보셨길래 그래요?”

방으로 후다닥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이나 심장이 쿵쾅거려서, 레오폴트는 방문을 닫자마자 문에 기대서서 한참이나 숨을 골랐다.

‘…문을 왜 닫았지?’

생각하니까 이상하다.

본능적으로 문을 닫긴 했는데 왜 닫았는지는 모르겠다.

그 모습이 흉했느냐 하면 아니다.

보기 안 좋았느냐 하면 오히려 보기 좋았다. 계속 보고 싶은 정도로.

그래서 그런가 보다. 계속 보고 싶어서.

“레오폴트 생도?”

“아, 아스테인…”

큰일 날 뻔했다.

에라냐가 말려주지 않았다면, 아스테인도 따라온 채로 같이 봤다면.

‘싫지, 암. 싫고말고. 엄청나게 싫지. 좋을 수가 없지.’

“아, 아냐. 아무것도 아냐. 그냥 아스트리드 분대장이 뭐 얘기 좀 하자고…”

“근데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어요?”

“그, 그냥.”

그거 되게 꼬치꼬치 캐묻는다 싶어서 레오폴트는 대충 손을 휘젓고는, 더 이상 묻지 말아 달라는 듯 옆의 세면실로 들어갔다.

찬물을 틀어놓고 연거푸 세수를 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싶더니 역시나 얼굴에 불이 난 듯이 붉고 또 뜨거웠다.

세수를 하느라 눈을 감을 때마다 아스트리드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무리 박박 세수를 해도 그 모습이 지워지질 않았다.

그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게다가 옷을 아래로 잡아당기는 통에 드러난 도톰한 아랫배와 그 아래에 그… 검은, 검은…

“…어휴.”

절로 한숨이 나온다.

얼굴이, 너무 뜨거웠다.

*

“절대 안 입습니다. 절대로.”

“입으란 말 안 해.”

일단 드레스조차 아니었던 그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려던 아스트리드는, 그래도 이 옷이 자기 것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에라냐가 그나마 자기 생각해서 준비한 옷이라는 점에서 일단 고이 개서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대망의 무도회 당일.

복장은 자유라고 하지만 그래도 너무 화려한 드레스는 자제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생도들 전부가 귀족인 것도 아니고 가정형편이 다들 좋고 그런 게 아니다 보니 위화감을 줄이기 위한 조치이기도 해서, 에라냐가 투덜거리기는 했어도 아스트리드에게는 다행이기도 했다.

“오늘 첫 춤이랑 마지막 춤, 아스트리드 너랑 레오폴트가 춘다며?”

무도회의 개막과 폐막을 알리는 춤을 레오폴트와 아스트리드가 추게 되었다고 하지만, 지금 아스트리드에게는 바로 그게 고민이었다.

‘춤을 어떻게 추는 거야…’

춤을 춰 본 적이 없다.

아스트리드야 20년을 배워왔을 테니 아무 문제 없겠지만 문제는 지금 내용물이 원래의 아스트리드가 아니라는 점이다.

춤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데다가 이런 곳에서 추는 춤은 남녀가 페어를 이루어서 추는 춤일 텐데 그걸 지금의 아스트리드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아케밀라에게 양보할 걸 그랬나.’

오죽하면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레오폴트의 약혼녀로서, 귀족의 기본 소양이라고 할 수 있을 그 춤을 제대로 못 춘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만약에 그 무도회에서 춤을 제대로 못 춘다면 아스트리드 본인의 망신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인 볼프강에 대한 망신이기도 하고, 나아가 미테리엔 가문의 망신이며, 더 나아가면 그런 아스트리드를 약혼녀로 맞이하기로 한 아인트하펜 황실의 위신이 걸린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아스트리드가 놀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부지런히 연습도 했다. 잘 모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도서실에 있던 교양서적 빌려서 펼쳐놓고 기본적인 스텝 정도는 연습했었다.

하지만 음악이 나오고 있는 것도 아니고 파트너가 있는 것도 아닌 곳에서 혼자 연습한다고 한들 그게 딱히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으… 속아파…’

긴장이 되어서 속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유수같이 흘러서 어느새 해가 산등성이에 걸렸다. 해가 질 무렵 즈음에 시작되는 무도회는 미리 페어를 이룬 남녀가 나란히 입장하게 되는데, 지금은 당연하게도 레오폴트와 아스트리드가 페어를 이루고 있다.

- 아스트리드 분대장님, 갈 시간입니다.

고민하고 있는 아스트리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밖에서는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레오폴트가 온 모양이라, 아스트리드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 한번 드레스 자락을 정돈하고 방을 나섰다.

“…가죠.”

잠시 눈을 크게 떴던 레오폴트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아스트리드를 재촉했다.

호박색의 원피스형 드레스에, 치마 부분은 길게 뻗은 주름이 곱게 펼쳐져 있었다. 어깨부터 훤히 드러낸 팔은 이윽고 같은 색상의 실크 파티 장갑을 끼고, 얼굴에는 에라냐의 손을 거쳐 곱게 화장까지 한 뽀얀 얼굴에 약간의 홍조가 피어올라 있었다.

“가죠, 레오폴트 생도.”

무도회장은 생도들이 입학식을 했었던 강당에 꾸며져 있었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좀 먼 곳이기는 해도, 연회도 같이 이뤄지는 행사여서 넓어야 했는데 훈련소에서는 그만한 넓이의 건물이 강당밖에 없었다.

“아스트리드 분대, 아스트리드 분대장과 레오폴트 생도 입장!”

관등성명을 대면 큰 소리로 입장하는 이의 이름을 외쳐준다. 사실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호명된 이의 이름이 이름인지라 이미 와있던 이들의 이목이 아스트리드와 레오폴트를 향했다.

소리 내 인사를 하는 것은 실례다.

다들 각자의 자리로 안내받아 착석한 후, 조용히 다가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담화를 나누는 것. 그것이 사교회에서의 기본적인 예의였다.

그래서 그들이 입장한 후에도, 특별히 소동은 없었다. 게다가, 밖에서나 황태자이며 또 북부대공녀인 것이지 이곳에서는 그냥 생도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

“자, 황립 군사학교 훈련생도 여러분.”

단상에 오른 오르테가의 목소리가 이 넓은 무도회장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웅웅대는 메아리까지 들려왔다.

“그간 고된 훈련을 받느라 대단히 고생이 많았다. 이제 내일 진행될 수료식 후, 여러분은 어엿한 견습 기사의 신분으로 황립 군사학교의 정식 생도가 된다.”

각자의 자리에서 기립하여 교장의 훈화를 듣고 있는 생도들.

입소 당시의 다소 혼란스러웠던 표정들은 이제 사라지고, 제법 군인다운 모습이 된 생도들을 둘러보며 오르테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 어쨌든. 수료식은 내일이니 얘기는 내일 마저 하겠다. 오늘은 마음껏 먹고 마시도록 해라. 그러면, 무도회의 개막을 빛내 줄… 레오폴트 폰 아인트하펜,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 앞으로 나오도록.”

“가지, 아스트리드.”

레오폴트가 내민 손에 손가락만 모아 가볍게 얹으며, 아스트리드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올 것이 왔구나…’

머릿속으로 그간 연습했던 스텝을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게 대체 무슨 춤인지를 모르겠다. 아스트리드의 얕은 지식으로는 춤이라고 하면 왈츠라거나 미뉴에트 정도밖에 모르겠는데, 그마저도 사실 스텝 같은 건 모른다.

그런데도 어느새 두 사람은 볼룸의 가운데로 와있었다.

수많은 생도들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하고 있고, 아스트리드는 긴장한 채 레오폴트에게ㅡ

“윽.”

발을 밟았다.

“아스트리드, 몸이 안 좋은가?”

“아, 아니. 아니요. 괜찮습니다.”

“얼굴색이 안 좋은데…”

레오폴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아스트리드는 다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스텝, 스텝이 어떻게 되더라. 손은 이, 이렇게… 살짝 올리듯이 향하는 게 맞던가? 허리를 감싼 레오폴트의 손길이 느껴졌다. 약간의 열기가, 그리 두껍지 않은 드레스 너머로 전해져왔다.

“…내가 리드하지. 몸에 힘을 빼라, 아스트리드.”

“네, 네…”

이윽고 선율이 시작되었다. 레오폴트의 무릎이 살짝 아스트리드의 무릎을 건드렸다.

“반보 앞.”

아스트리드의 발이 레오폴트의 지시대로 반보 앞을 가볍게 디디고, 레오폴트의 손길이 아스트리드의 허리춤에서 풀리면서 드레스 뒤를 살짝 잡아당겼다.

“두바퀴 돌고 다시 와.”

아스트리드의 몸이 레오폴트에게서 벗어나며 두바퀴 돌고, 다시 두바퀴 돌아 레오폴트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대로, 한 보 뒤로.”

레오폴트의 발이 아스트리드의 발을 가볍게 톡톡 건드렸다.

“좋아, 이렇게. 수신호는 이렇게야.”

레오폴트의 목소리가, 온통 하얀 백지가 되어버린 아스트리드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아스트리드는 그런 레오폴트의 리드에 따라, 그리고 그 수신호에 따라 정신없이 스텝을 밟는가 하면 몸을 움직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아스트리드의 머릿속에, 이변이 일어났다.

【몸에서 힘 빼.】

나긋나긋하지만 어딘가 강단 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깐프는 뻔뻔해야 어울리는 거 같아요

저만 그런가요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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