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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녀는 절대 함락되지 않는다-33화 (33/62)

33화. 무도회 (3)

변화는 갑작스레 찾아왔다.

레오폴트는 그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챘다. 아스트리드와 밀착하여 한창 춤을 추는 중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빛이 변함과 동시에, 레오폴트의 리드 하에 춤을 추던 아스트리드의 스탭이 유연하게 변화했다. 능수능란하게 레오폴트의 움직임에 대응하며 무도를 이어 나가는 아스트리드.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데.’

“전하.”

그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확연하게 말투가 변했다.

아팠다가 깨어난 후 항상 레오폴트 전하라고 불렀던 아스트리드는 지금 이 순간, 전하라는 호칭만으로 레오폴트를 불렀다.

“기왕 이리 단둘이 되었으니, 하나 여쭙도록 하지요.”

아스트리드의 민트색 눈동자가 레오폴트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딘가 부드러운 느낌이 있었던 지금까지의 아스트리드가 아닌,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한 냉기만이 가득한 눈빛.

“…말하라.”

주변에 가득한 시선들이 있음에도 단둘이 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주위에 누가 있던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리라. 레오폴트는 이제야, 지금까지 그가 알던 아스트리드임을 체감할 수 있었다.

“평민 나부랭이가 이 나라의 국모가 됨이 말이 된다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그리 생각이 부족하시온지.”

“유레이드 영애의 말인가?”

볼룸을 빙글빙글 돌면서도 두 남녀는 서로를 마주 보는 눈빛에 애정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몸은 밀착하여 서로의 온기가 전해질 텐데도, 설령 초면인 남녀 사이에도 이토록 차가운 대화는 오가지 않을 것이다.

“영애라니, 우습지도 않습니다. 언제부터 아인트하펜의 혈통에 평민의 피를 섞어도 된다 하였습니까? 피 대신 돈을 흐르게 하고자 하심입니까?”

“말이 과하다, 아스트리드.”

“과하지 않습니다. 그… 제가 허락하였다 하여 전하까지 허락하시면 안 되는 게 아니었는지요. 게다가 훈련 기간 내내 그 노란 여우의 지분거림에도 싫은 기색 하나 보이지 않으시다니, 무슨 생각이신지 도통 모르겠습니다만.”

레오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스트리드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그 아스트리드와 전혀 바뀌지 않았다. 타인에게 향하는 무자비한 말의 비수.

이 상황에서 보여주는 그 차가움의 편린.

“나는 네가 변한 줄 알았다, 아스트리드.”

- 타닥, 탁.

서로 맞잡은 손이 길게 뻗어지며 두 사람의 거리가 벌어졌다가, 다시 아스트리드의 몸이 빙글빙글 돌며 레오폴트의 품에 안겨들었다.

자연스럽게 레오폴트의 손이 아스트리드의 허리를 안아, 그녀의 몸을 살짝 들어 올려 반바퀴 돌았다.

흐르는 선율 사이로, 따스한 시선이 오가야 할 그 춤에서 오히려 서로를 바라보는 남녀의 시선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전하. 지금이라도 그 우습지도 않은 후보 놀이를 그만두시지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아스트리드. 서로에게 나은 배우자를 찾아주자고 한 약속은 잊어버린 것이냐.”

순간 아스트리드의 얼굴이 살짝 흐려졌다. 하지만 말 그대로 순간일 뿐, 이내 아스트리드의 얼굴은 평상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후보도 후보다운 영애를 고르시지요.”

“그것도 내가 할 일이니, 신경 쓰지 말도록 하지.”

- 타닥.

피날레 후, 두 사람은 맞잡았던 손을 살짝 놓으며 주위를 향해 눈인사를 했다.

초반에 살짝 삐걱거렸던 춤은 이내 궤도에 올랐고, 마무리까지 완벽했다. 실로 흠잡을 곳 없는 개막 무도여서, 주위의 생도들도 크게 손뼉을 쳤다.

*

【이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아스트리드는 화장실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조용히 하시지요.’

【아니, 조용히고 뭐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니까?!】

아스트리드는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머릿속에 울리는 또 다른 아스트리드의 목소리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 상황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다.

깨어났다.

이렇게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원래 그녀의 것이었던 몸이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움직이고, 말하는 모습들을 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지금 그녀의 몸을 조종하고 있는 이 정체 모를 인물에게조차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 아버님, 저는 아카데미로 가겠습니다.

‘안돼, 안돼! 아카데미를 가서는 안 돼!’

약혼자인 레오폴트가 아카데미로 간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스트리드는 레오폴트가 있는 아카데미로 가는 것을 절대로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소리를 질러봐도, 아카데미를 가서는 안된다고 아무리 애써봐도 그녀의 말은 아무에게도 전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10년 전의 그 일로 인해서 철저하게 삐뚤어진 관계.

아스트리드는 그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

레오폴트,

레오폴트.

아아, 사랑하는 나의 레오폴트.

전하지 못한 연심.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었다.

자라면 그의 신부가 될 것이라는 사실에 얼마나 기뻐했던가.

10년 전, 10년 전의 그 일로 인해 서로 감정이 어긋나 있어도, 그리고 삐뚤어져 있어도, 아카데미에서 복무하며 제국 기사로 근무하게 될 레오폴트에게 수시로 면회를 가며 지고지순한 현모양처의 모습을 보일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레오폴트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그에게 연심을 전하고, 연인이 되어.

그 후에는 황태자비가 되어 황제가 될 레오폴트의 내조를 하려 했건만.

그런 그녀의 확실한 해결책을, 지금 이 몸을 움직이는 아스트리드가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돌려서 말할 줄 모르고, 생각한 대로 말하지만, 그 생각마저도 과하게 직선적이라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음을.

하지만 철이 들던 시절부터, 별의 가호를 타고났음을 자각하던 그 순간부터 야만족들과 마물들과 뒤엉켜 자란 그녀의 성격은 사교계와 도통 어울리지 않았고, 레오폴트에 향한 연심조차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숙맥으로 자라게 만들었다.

그래서 차라리 행동으로 보여주자.

레오폴트에게, 내가 얼마나 헌신적이며 가정적인 여자인지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아카데미행을 거절하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그랬는데, 이 몸을 움직이는 멍청이가 모든 계획을 망쳐버렸다.

몽땅 다 무너뜨려 버렸다.

‘게다가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계약을 한 것인가요. 당신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정녕 제정신인가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넌, 넌 누구야!?】

‘건방지군요.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남의 몸을 함부로 쓰고 있는 주제에 행동까지 제멋대로 하다니. 타인의 계획을 모조리 망쳐놨으면 사죄부터 하는 게 우선이 아닌가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이해를 못 하겠다고.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거야?!】

‘시끄러워요. 조용히 하-‘

“아스트리드, 있어? 레오폴트가 찾는데.”

에라냐의 목소리였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죠.’

【자, 잠깐만!】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아스트리드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아스트리드는 화장실을 나왔다. 문밖에는 에라냐가 멀뚱히 서 있다가 아스트리드를 향해 물었다.

“너 나 몰래 무슨 맛있는 거라도 먹었니? 무슨 화장실을 그렇게 오래가?”

“…별일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아스트리드는 에라냐가 퍽 마음에 들었다.

비록 그 드레스는 치가 떨릴 정도로 부끄러웠지만, 그 모습을 보고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레오폴트는 너무나도 귀여웠으니까.

10살, 처음으로 드레스를 입고 만났을 때 레오폴트가 보여줬던 바로 그 새빨간 얼굴.

다시 보기까지 오래 걸릴 줄 알았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볼 수 있게 되어서, 아스트리드는 이 엘프가 마음에 들었다.

“가죠.”

“응. 그런데, 아스트리드.”

“네.”

에라냐가 아스트리드의 앞에 서서 위아래로 쭉 훑어보았다.

이건, 대단히 실례되는 게 아닌가. 아스트리드는 이 엘프가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이런 무례까지 용인할 정도로 마음에 드는 건 또 아니었다.

“왜 그러시나요. 사람을 위아래로 훑어보다니, 실례가 아닌지.”

“응, 뭐… 그렇기는 한데. 뭔가 좀 바뀐 거 같아서 말이지.”

【봐, 에라냐 언니도 이상하다고 하잖아!】

‘조용히 좀 하세요.’

“기분 탓이려나. 아무튼 가자. 레오폴트가 찾고 있었어.”

“그래요. 가죠.”

레오폴트를 기다리게 하는 건, 안될 일이다.

【뭐야, 레오폴트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조용히 좀 하세요.’

【우와, 이거 생각만 읽어지는 게 아니구나. 감정까지… 어으, 이거 진짜… 너 레오폴트 엄청나게 좋아하는구나… 어쩐지.】

‘시, 시끄러워요!’

“어디 아픈 건 아닌가, 아스트리드.”

“염려해주신 덕분에.”

자리에 돌아온 아스트리드는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레오폴트가 불렀다고 하기에 서둘러서 왔건만, 레오폴트의 옆에는 전혀 달갑지 않은 이가 있었다.

“아케밀라 분대장.”

“어머, 아스트리드 분대장. 화장실에 오래 계시더군요. 뭔가 큰 볼일이라도 있으셨나 보죠?”

아스트리드에게 창피를 줄 요량이었다.

결국 개막 무도를 넘겨주지 않았고, 폐막 무도조차 넘겨줄 생각이 조금도 없는 아스트리드에게 아케밀라는 심술이 나 있었다.

“숙녀는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하지요. 단장에도 공을 들이니,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아, 그러네요. 미안해요. 아케밀라 분대장은 따로 겪어보실 일이 없으셨겠군요. 무도회도 첫 참가인 건 아니신가요?”

그 말에 아케밀라가 아스트리드를 노려보았다.

굳이 따지자면 대공의 딸인 아스트리드와 아케밀라는 그 계급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유레이드 상단의 군자금이 아니었다면 아스트리드가 대공의 딸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래서 유레이드 상단은 계급상 평민이라고는 해도 사실상 준 백작급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런 아케밀라에게, 너는 평민이니 무도회도 안 가봤을 텐데, 여기가 처음인 게 아니냐- 라는 아스트리드의 말은 상당한 모욕이기도 했다.

“그렇군요. 첫 참가이기는 해요. 이런 소규모의 무도회는요. 아스트리드 분대장이야말로 고향이 그토록 멀리 있으신데, 무도회 경험은 많으신가요? 아, 그렇죠. 참. 무도회도 초대장이 있어야 참가가 가능하니까.”

너 친구 없잖아.

“얘, 레오폴트.”

아스트리드와 아케밀라가 서로 노려보고 있건 말건 에라냐가 레오폴트의 소맷자락을 끌어당겼다.

“무슨 일입니까, 에라냐 생도.”

“주변에 인사하러 다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아스트리드 찾고 있었다며.“

그 말에, 아스트리드와 아케밀라의 시선이 동시에 레오폴트를 향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스트리드와 아스트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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