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무도회 (4)
엄연히 나설 자리가 있고 그러지 않을 자리가 있다.
아케밀라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서, 레오폴트의 옆에 서서 인사를 다닐 사람은 그녀 본인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과 감성은 다른 법이라, 이성은 그녀에게 여기서는 물러나야 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지만 감성은 그렇지 않았다.
사납고 사교성이 부족하며 아랫사람을 다루지 못하는 인망이 부족하기로 유명한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
북부 설원을 누비며 야만족들을 소나 돼지 도살하듯이 잡아 죽이기로 유명했던 인간 백정- 잘 포장해서 설원의 하얀 표범이라 불리는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
평민인 아케밀라나, 귀족이라는 딱지를 떼어내면 뭐 하나 국모의 격에 맞는 게 없는 아스트리드.
“주제를 아십시오, 아케밀라 생도.”
분대장이라는 칭호는 어디로 날아갔는가.
하지만 아케밀라도 그걸 인지하지 못했다.
“저, 저도.”
레오폴트의 옆에 잠시나마 서는 것만으로도 아케밀라의 이름값은 크게 올라간다.
비록 그녀에게 레오폴트에 대한 연심은 없다고 해도, 그 이름값은 이 제국에서 그 무엇보다 무거우니까. 그 옆에 섰다는 자체만으로, 황태자비 후보 중 하나가 되었음을 알릴 수라도 있다면 아케밀라로서는 조금도 손해 보는 게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살짝 뻗어진 손길.
그리고 그 손길에,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다가와 쳐냈다.
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약간의 통증이 다가왔다. 아케밀라는 손을 움츠리며 제 손을 쳐낸 이를 바라보았다.
분노가 이글거리는 민트색의 눈동자.
잘 다듬어진 앞머리와 그 앞머리 위로 비치는 조명 탓에 음영이 진 얼굴에서도 또렷하게 보이는 그 안광이 희번득거리며 아케밀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주제를 알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의 무례는 결단코 용서하지 않습니다. 물러나세요.”
그 기백에 아케밀라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물렸다.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정말로 목덜미를 물어뜯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에 아케밀라는 저도 모르게 물러섰다.
아스트리드가 아케밀라의 앞을 막아서고, 레오폴트가 그런 아스트리드를 힐긋 쳐다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레오폴트가 아케밀라를 스치듯 지난 후에야, 아스트리드는 비로소 그 뒤를 따랐다.
싸늘한 한기가 멍하니 선 아케밀라를 감싸듯이 내려앉았다.
“어머, 레오폴트 황… 아니, 생도. 다시 뵙는군요.”
자주색 롤빵머리의 여성이 어깨 위에 앉은 참새와 함께 깊이 고개를 숙였다. 호칭은 생도라고는 하지만 앞에 선 이는 다름 아닌 이 제국의 황태자이니, 이상하다고 볼 일은 아니었다.
“아, 에밀리에 생도. 인사가 늦어 미안합니다. 이전에는 크게 신세를 졌습니다.”
아스트리드가 책상을 부수고 수업을 뛰쳐나갔던 그날, 그런 그녀를 찾기 위해 헤매던 레오폴트를 도와주었던 사람이 바로 에밀리에 폰 조르지엔이었다.
“기억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기억해야지요.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녀가 아니었으면 아스트리드를 찾느라 홍역을 치렀을 참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레오폴트도 뭐라 할 말은 없었다. 순전히 자기 잘못이었고 오히려 거기서 그 정도로 참은 아스트리드가 대단한 것이다.
‘…살짝 다시 보긴 했지만.’
다시 보긴 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일들을 보면, 아스트리드가 병석에서 일어나더니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가지기엔 충분했다. 물론 이번 페어 댄스에서 모두 사라져버리기는 했지만.
“아스트리드 생도 덕분에 레오폴트 생도가 그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봤으니, 저로서는 진귀한 경험을 한 셈이니까요. 어머, 그러고 보니 아스트리드 생도도 계셨군요.”
아까부터 있었다.
【참아! 아니, 지금 화내면 안 되잖아! 잘못한 거 맞잖아!】
‘…조용히 하세요. 지금 엄청나게 참고 있으니까.’
어느샌가 주먹을 꾹 쥐고 있었다. 아직 바들바들 떨리고 있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레오폴트 생도도 정말 약혼녀를 사랑하시는군요. 이렇게 아카데미에서까지 같이 다니실 줄은 몰랐어요.”
에밀리에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냥 입에 발린 말이잖아… 저 정도에 기분이 좋아지면 어떡해?】
‘레오폴트도 날 그렇게 생각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제 감정, 함부로 읽지 말아주시겠어요? 정체불명의 가짜 아스티 양.’
【그냥 느껴지는데 어떡하라구. 그보다, 그냥 인사치레에 그렇게 기뻐하지 마. 왜 이렇게 단순한지 원.】
“한데… 요즘 좀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던데, 알고 계신가요?”
“이상한 소문이라 하시면…? 저와 아스트리드 분대장에 대한 소문입니까?”
레오폴트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이상한 소문이라는 것도 처음 듣는 이야기다.
“네에, 그러니까, 사실 약혼은 취소되었고 레오폴트 생도도 황태자비를 찾고 계신다는 소문입니다만. 실제로 아케밀라 생도가 벌써 입후보하셨다고 들었고.”
【안돼! 진정해! 황태자를 곤란하게 할 셈이야?!】
‘속을 뻔했어. 하긴, 저게 그렇게 성질 좋은 년이 아닌데.’’
【아무도 속인 사람 없는데 혼자 속아놓고는 뭔 소릴 하는 거야…】
“그렇습니까?”
레오폴트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아카데미로 오기 전, 아버지인 크로이츠 황제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 고집이 세어서 타인의 말에 쉽게 귀 기울이지 않고,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성격은 간신들의 간언에 쉬이 넘어가지 않으며, 옳고 그름을 직설적으로 말함은 장차 황제가 될 네게 있어 선정을 베풀도록 하는 길잡이의 역할까지. 네게 있어 최적의 반려가 될 것이 확실하지 않겠느냐.
아버지, 아버지께서 틀렸습니다… 레오폴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문이 이렇게 나 있다면 여기서 레오폴트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긍정을 할 수도 부정을 할 수도 없는 상황.
“우와, 대답 못하는 거 보니까 소문이 진짜였나 본데?”
순간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자리에 모여있던 레오폴트를 비롯한 아스트리드, 조르지엔까지 목소리를 쳐다보고, 주변에 있던 생도들을 사정없이 밀어젖히며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 바이올렛 생도.”
연푸른 단발머리에 살짝 그을린 피부, 드레스 앞섶을 많이 풀어서 가슴골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신의 미녀.
남부 해안을 지키는 제국 해전단의 제독, 바이카르 드 오트리아의 차녀인 바이올렛 드 오트리아가 씩 웃고 있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이렇게 재미있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니 몰랐지 뭐야. 근데 그 소문이 진짜인가 본데? 이거, 나도 입후보해도 되는 거 아닌가?”
“…다들 조용히 하세요. 무례도 정도껏 하시지요.”
싸늘한 목소리가 주변을 일순 얼리는 것 같았다.
방금 모습을 드러낸 바이올렛을 비롯하여 아스트리드를 제외한 전원이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입후보니 어쩌니, 아케밀라 같은 평민까지 함부로 황태자비를 운운할 정도로 제국의 기강이 해이해졌습니까? 바이올렛, 에밀리에. 황태자비 자리가 그렇게 우습습니까?”
【…하아.】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길고 긴 한숨 소리.
하지만 아스트리드는 그딴 것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제국을 떠받치는 개국 공신 중 조르지엔 가문과 오트리아 가문의 영애들이 이토록-“
【얼빠진 소리들을 하고 있다니, 황제 폐하께서 들으시면 진노하… 어라?】
“…….”
아스트리드가 갑자기 말을 멈추자 레오폴트를 위시한 에밀리에, 바이올렛이 그녀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후, 훌륭히 자라서… 화, 화화황태자비, 비를 노리… 아니, 레오폴트를 노리… 아니! 아무튼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셨다니, 틀림없이 이 아인트하펜의 홍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레오폴트 생도?”
“어, 어어. 그… 그렇지요.”
아스트리드의 분위기가 갑작스럽게 바뀌었다고 생각했지만, 레오폴트는 슬쩍 살펴봐도 아스트리드에게서 딱히 달라진 점을 찾지는 못했다.
다만, 살벌하게 번뜩이던 눈빛이 다소 유순해졌다는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
*
“무슨 일이지? 아까는 춤을 제대로 추지 않았나.”
“…별일, 아닙니다.”
별일이 아닌 게 아닌데.
【왜 하필 그 타이밍에 바뀌었냐고! 그 빌어먹을 것들을 죄다 한방씩 먹여줬어야 하는 건데!】
‘그랬다간 살인 나잖아… 뒷수습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대체.’
레오폴트의 말에 대답하랴, 머릿속에서 광분하고 있는 진짜 아스트리드를 말리랴 아스트리드는 영 정신이 없었다.
대체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 것인지도 모른 채, 황망한 사이에 무도회는 어느새 막바지에 접어들어 레오폴트와 폐막 무도를 선보여야 할 시간.
【춤도 못 추고. 넌 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야?】
‘…….’
【야, 내가 가르쳐주는 대로…】
“자, 아까처럼. 내가 리드할 테니 따라오도록.”
【가 아니라, 전하의 리드대로 따르도록 해.】
‘도대체 얼마나 좋아하는 거냐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갑자기 바뀐 것인지, 왜 이렇게 된 것인지, 대체 뭔지.
게다가 지금까지 아무 변화가 없었다가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인지.
일단 이것부터 알아보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왜 이렇게 휙휙 바뀌는지 모르겠군. 아스트리드, 오늘은 네가 너답지 않게 느껴진다.”
“…그, 그렇지는 않습니다.”
실은 아까는 진짜 아스트리드고 저는 가짜 아스트리드에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와도 그냥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레오폴트는 아스트리드가 마침내 온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약혼이고 뭐고 다 없던 일로…
‘…이거 괜찮은데?’
【하나도 안 괜찮거든? 하기만 해 봐. 내 차례에 혀 깨물고 죽어버릴 테니까.】
‘그러고보니 너 왜 갑자기 말을 놓냐?’
【너도 반말 하니까.】
‘마음대로 해라…’
협박이 아니라, 잘은 모르고 잠깐 지켜봤을 뿐이지만 원본 아스트리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중간고사는 누가 만든 걸까요
얘기 좀 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