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아스트리드와 아스트리드 (1)
솔로라면 굉장히 곤란했겠지만 다행히 듀엣이었다.
게다가 무도에 능숙한 레오폴트이니, 그로서는 아스트리드를 리드하기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그만큼 많은 여성들과 춤을 췄다는 얘기가 되는 걸까. 아스트리드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가 이내 지워버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전하는 나 뿐이야.】
‘그 자신감의 근거는 대체 뭐야.’
무도회도 잘 참석하지 않다 보니 초대장도 좀 뜸해졌다고 했었다. 그래도 그런 것 치고는 그녀가 깨어난 이후로도 초대장은 종종 오긴 했는데, 아마도 참석할 거란 기대도 없이 그냥 예의상 보낸 것이리라.
아스트리드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져 버렸다.
갑자기 머릿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앉아 있다는 게, 사실 그녀로서도 잘 믿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게 그녀가 정신병에 걸렸고 방어기제로 또 다른 인격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갑작스럽게 몸에서 힘을 빼라는 목소리가 들리고, 놀라서 저도 모르게 그 말을 따라 몸에서 힘을 뺐다.
그랬더니 마치 텔레비전에서 채널을 돌리듯이 시야가 전환되면서, 정말로 텔레비전을 보는 것처럼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움직이고 말한다. 그 생각을 모두 읽을 수 있고, 그녀가 느끼는 감정들도 모두 그대로 전해졌다. 게다가 생각을 통해 대화조차 가능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아스트리드.”
“네, 네?!”
“무슨 생각을 그리하나.”
시야가 휙휙 돌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춤은 클라이맥스로 향하고 있었고, 그녀의 몸은 레오폴트의 움직임에 따라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그의 품에 안겨 반쯤 드러눕기도 하면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아뇨, 별생각은 아닙니다.”
“몸이 안 좋은 건가?”
어느새 레오폴트의 목소리에서도 다정함이 싹 사라져 있었다.
레오폴트가 보기에도 오늘 아스트리드는 이상하다. 개막 무도에서는 아주 초반에 잠시 서투른 모습을 보였다가 이내 자유자재로, 너무나 익숙하게 춤을 추었었다.
그러고 나서 자리로 돌아온 후에도 아케밀라에게 쏘아붙이는 그녀의 모습은, 레오폴트가 기억하는 아스트리드의 예전 모습과 완전히 똑같았다. 아케밀라 뿐인가, 에밀리에라던가 바이올렛에게도 그랬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던 도중, 아스트리드는 갑자기 말을 얼버무리고…
아무튼 이상했다.
*
“제군들, 모두 즐겼나?”
“예!”
우렁찬 목소리가 강당을 가득 채웠다.
어설픈 모습이던 입교 당시의 생도들은 이제 4주의 훈련 끝에 제법 강단 있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고, 오르테가는 그런 생도들을 둘러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내일 오전에는 수료식이 있다. 이 수료식이 끝나면 한 달간의 영내 대기 기간이 있고, 그 이후에는 정식으로 이 아카데미의 생도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기간에 자유롭게 퇴소도 가능하다. 퇴소희망자는 언제든지 교관을 찾아가도 좋다. 이 기간 이외의 퇴소는… 다들 알고 있겠지?”
오르테가가 히죽 미소를 지었다. 송곳니 대신 박혀있는 황금색의 금니가 조명을 받아 반짝이고, 그 미소에 어린 어딘가 위압적인 느낌이 생도들을 압도했다.
“뭐, 더 이상 말해봤자 길어지기만 할테지. 이상, 수료식 전야제를 마치도록 한다. 다들, 해산!”
“해산!”
오르테가의 선언을 복명복창하며 생도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모여서 숙소로 돌아가는 생도들 사이로, 아스트리드는 홀로 강당 한편에 있던 테라스 문을 열었다.
지금 나가봐야 붐비는 생도들 때문에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가 더욱 뒤엉킬 것 같고, 여기서 바람을 잠시 쐰 후 숙소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테라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시원한 밤바람이 그녀를 반겼다.
밖으로 보이는 야경이 제법 볼만했다. 북부 미테리엔 저택에서, 그녀의 방에 있는 테라스로 나가면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설원이 있었는데 여기는 그런 설원 대신 넓게 펼쳐진 대지에 가득 들어찬 건물들과 연병장들이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뭐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뭐가 말인가.”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아스트리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테라스 입구 벽에 기대선 레오폴트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간다는 건지 말해줄 수 있나?”
“…….”
아스트리드는 입을 다물었다.
실은 제 머릿속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거 같은데 걔가 진짜 아스트리드인 것 같고요, 제가 가짜 아스트리드인데요- 라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다.
【바꿔! 나랑 바꿔 빨리! 몸에서 힘 빼!】
머릿속에서 닦달하고 있는 진짜 아스트리드.
아스트리드는 속으로 한숨을 작게 쉬고는 몸에서 힘을 뺐다.
아까도 이렇게 하니까 바뀌었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아무리 기다려봐도 아까처럼 시야가 바뀌는 것 같은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눈앞에 레오폴트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빨리 바꿔 달라니까?】
‘안 바뀌잖아. 나도 바꾸고 싶다고.’
몇 차례 더 몸에서 힘을 빼봐도 바뀌지 않는다. 아스트리드는 여기서 더 머뭇거리면 레오폴트에게 의심을 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만약 바꿔서, 아스트리드가 레오폴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이라도 해버리면? 그래서 결혼이라도 확정 짓게 된다면?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니, 그건 곤란하다.
“오늘 너는 어딘가 이상하다, 아스트리드.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차마 입 밖에 내서 설명할 수가 없는 상황.
【아잇, 이게 왜 안 바뀌는 거야…!】
앞에서는 레오폴트가, 머릿속에서는 아스트리드가.
‘짜증 나네, 진짜.’
【나도 짜증 난다고!】
“아무 일 없습니다. 그저 머릿속이 복잡하여-”
“혹시.”
아스트리드의 말을 끊고서 레오폴트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유레이드 영애, 조르지엔 영애, 오트리아 영애. 이 세 사람의 황태자비 후보 입회 때문에 그런 건가?”
【그거라고요!】
“…아닙니다. 그저, 피곤할 뿐.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레오폴트는 사라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가끔씩 달라지는 그녀의 모습. 아케밀라의 입후보 이후부터 보여지는 그녀의, 의외의 모습.
어쩌면, 레오폴트가 정말로 다른 영애를 후보로 들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그걸 진짜로 할 줄 몰랐던 것이 아닐까. 셋으로 늘어나 버린 황태자비 후보 때문에, 그녀가 괴로운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나는 또다시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만 것이 아닐까.
레오폴트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
“어땠어? 어땠어?”
“뭐가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아스트리드를 향해 에라냐가 숨 쉴 틈도 없이 질문 공세를 퍼부어댔다.
대체 뭐가 어땠냐는 건지. 뭐한 게 있어야 어떻고 저떻고가 있지. 아스트리드는 그렇게 질문을 퍼부어대는 에라냐에게 손을 휘적휘적 흔들어 보이고는 돌아섰다.
“레오폴트랑 어땠냐고 묻는 거지, 뭐긴 뭐야.”
“몰라요… 피곤해요.”
등에 에라냐의 손길이 닿고, 이윽고 토독토독 소리를 내며 드레스의 등 단추가 하나씩 풀어졌다.
드레스가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도와주는 사람이 꼭 필요한 게 이런 이유였다. 여기저기 몸에 고정하는 단추들이 붙어있고, 지금처럼 등 부분의 단추를 풀려면 혼자서는 무리다.
정말 피곤했다.
몸이 피곤한 건 하나도 없는데, 정신이 너무나도 피곤했다.
거기서 그냥 물러 나오면 어떡하냐라던가, 레오폴트는 고뇌하는 모습도 멋있다던가, 그런 소리를 쫑알대고 있는 아스트리드가 어찌나 시끄러운지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했다.
“저 먼저 씻을게요.”
“어, 응.”
드레스를 반납용 상자에 고이 개서 넣어두고, 아스트리드는 수건과 함께 세면용 보급 세안제까지 챙기고서 샤워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세찬 물소리와 함께 이윽고 따뜻한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대야에 물을 받고서 대충 물을 퍼서 어푸어푸 소리내어 얼굴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또 왜.’
【그렇게 얼굴을 박박 문지르면 어떡해?! 피부 다 상하잖아!】
‘…….’
할 말이 없다.
그럼 세수를 이렇게 하지 어떻게 하는가.
【손을 위아래로 움직이면 주름이 진단 말이야…! 한쪽 방향으로만 움직여야지!】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손을 한쪽 방향으로 움직여서 무슨 세수를 하는 건지, 이렇게 해야 시원한데.
세안제를 떠서 손으로 비벼, 얼굴에 칠하기 시작했다.
【이, 이 브랜드는 또 뭐야?! 아니, 당신도 여자면서 피부 관리를 왜 이따위로 하는 거야?! 자기 몸 아니라고 이러는 거야, 대체 뭐야!】
…애초에 여자조차 아니다.
‘시끄러워. 입 좀 다물어.’
【이, 이 무례한 사람 같으니…!】
대답하지도 않고, 아스트리드는 얼굴의 거품을 모두 닦아내고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밖으로 나왔다.
그 사이에 수건도 얼굴에 그렇게 박박 문대면 안 된다는 잔소리가 있었지만, 아스트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라냐가 교대하듯이 씻으러 들어간 후, 아스트리드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야기 좀 하자.’
【우연이네. 나도 이야기를 좀 해야 할 상황이었거든.】
‘너,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
중요한 이야기 중 하나였다.
대체 아스트리드는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것인지, 그리고 그사이에 왜 말을 걸지 않다가 오늘 갑자기 나타난 것인지. 그리고 교체하고 나서 왜 또 교체가 안 되는 것인지.
【네가 내 몸을 차지한 직후부터 나는 깨어나 있었어.】
즉,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아무리 말을 해도 너는 못 듣는 것 같았지.】
실제로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네가 행동하는 거나, 말하는 것들은 나도 보고 들을 수 있었어. 뭔가 꿈꾸는 것처럼 뭔가 흐릿하게, 명확하게는 보이고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러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전부 또렷하게 알고 있다는 건 아닐 터였다.
그렇다고 진짜 아스트리드에게 알려져선 안 될 일이 있는 건 또 아니지만.
‘아까 갑자기 나한테 말을 걸 수 있게 된 건?’
【그건 나도 모르겠어. 그 순간에 갑자기 모든 게 또렷해졌으니까. 네가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게 손에 잡힐 듯이 또렷하게 들려왔거든.】
‘갑자기 그렇게 됐다…’
【어쨌든 그런 의미야. 그래서 당신이 레오폴트 전하와의 결혼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건 알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반드시 결혼을 해야겠어. 그건 포기해.】
숫제 경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레오폴트랑 결혼을 해야겠다는 진짜 아스트리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일은 없을 거라 다짐하는 가짜 아스트리드.
‘그런데 너, 레오폴트에 대한 이야기 할 때랑 다른 주제로 얘기할 때랑 말투가 너무 다른 거 아냐?’
【전하랑 다른 것들이랑 같이 대우하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답이 없네.
아스트리드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지는 느낌이었다.
- 달칵.
샤워실 문이 열리고, 샤워를 마친 에라냐가 수건으로 머리를 동동 말아 올린 채 나오며 히죽히죽 웃음을 지었다.
그 시선이 침대에 앉아있는 아스트리드를 향하고, 에라냐가 보기에 아스트리드는 잘 준비를 하는 모양이라 거침없이 말을 걸었다.
“그래도 오늘 레오폴트가 너 보는 시선이 좀 다르긴 했어. 아무리 봐도 내 드레스 작전이 제대로 효과를 본 게 맞다니까. 아스트리드, 넌 그렇게 생각 안 해?”
하지만 그런 말도, 머릿속의 아스트리드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는 중인 아스트리드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두고 봐. 꼭 결혼하고 말 거니까.】
“하… 진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응? 아, 아니야?”
갑작스러운 에라냐의 말에 아스트리드가 번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좀 당황한 얼굴의 에라냐가 있었다.
“아니었다면 미안해. 나는 그렇게 보이긴 했거든. 뭐, 네가 아니라면 아닌 거니까. 아무튼 앞으로는 그런 옷 입으라고 속이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네? 어, 아. 알았… 어요. 응.”
속이지 않겠다고 하니까 아무튼 좋은 일이리라.
아스트리드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일요일이... 끝나가요... ㅠㅠ...
그리고 다음 표지가 곧 완성될 것 같아요
자축의 표지가 될지
떨어졌지만 노력했다는 표지가 될지
그건 모르겠지만 아무튼 끝까지 열심히 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