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바보와 바보 (2)
휴가.
언제 들어도 늘 새롭고 늘 짜릿한 그 단어, 휴가.
게다가 무려 1개월이라는 장기간의 휴가.
학원도시라고 불리는 미셀부르크는 전국적으로 교통이 원활한 곳은 아니었다.
수도인 페르상트와의 교통편은 잘 되어 있어도, 적어도 아스트리드가 여기서 바로 북방 영지까지 갈 정도의 교통편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페르상트에 있는 미테리엔 대공 자택에도 당연히 전용 마차는 있으니, 아스트리드는 일단 수도의 미테리엔 대공 자택으로 향하는 마차에 홀로 타고 있었다.
【그래서, 대체 제게 협력하지 않겠다는 이유가 뭐죠?】
제법 화가 난 것 같은 여자의 목소리. 아스트리드였다.
오늘 아침부터 갑자기 아스트리드는 다시 경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유를 물었을 때는, 아무래도 자기는 대공가의 장녀이니 함부로 반말을 쓰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어서, 아스트리드는 딱히 별말을 하지는 않았다.
진짜 아스트리드의 불만 섞인 말에, 아스트리드는 인상을 찡그린 채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어젯밤의 일이다.
【말했듯이, 나는 전하와의 결혼만을 꿈꾸며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그 외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죠.】
‘이봐… 나는 도저히 그럴 마음이 생기질 않는다니까. 애초에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나도 이해가 안 되지만, 정말로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이쯤에서 내가 원래 남자였다는 사실을 밝혀야 할까 싶지만, 아스트리드는 이내 그만두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단순 세면만 하는 데에도 세안제를 그렇게 쓰면 안 된다던가 수건을 그렇게 얼굴에 박박 문지르면 안 된다거나 하는 난동을 부렸던 진짜 아스트리드다.
제 몸에 들어와 있는 게 남자라고 말했다면 순결을 잃었다느니 어쩐다느니 하고 난동을 부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도대체 왜죠? 당신이 보기에 전하가 부족하기라도 하단 말인가요?】
‘부족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생리적으로 무리라고, 라는 생각이 떠오르기 직전에 아스트리드는 간신히 생각을 멈췄다. 그게 된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지만 다른 주제로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가능했다.
생각을 하는 게 그대로 다 전해지는 건지 아니면 전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 건지 아직 모르겠다.
그게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일단 다 대비를 해야 했다.
…진짜 아스트리드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본인까지 그렇게 되면 안 된다.
‘역으로, 대체 왜 그렇게 레오폴트를 좋아하는 거야? 그러면 오히려 아카데미로 따라와서 딱 붙어있었어야 하는 거 아냐?’
【이까짓 아카데미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죠? 제힘이면 이까짓 아카데미, 아무 필요도 없다구요. 게다가 제가 미리 세워둔 계획이 얼마나 완벽한데, 필요도 없는 일이죠.】
‘…무슨 계획?’
들어두어야 했다.
진짜 아스트리드에게서는, 사실은, 조금도 지성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이 여자의 촉이란 분명 범인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긴 있었다. 즉, 뭔가 예상을 못 했던- 허점을 찌르는 계획이기라도 했다면, 그에 따른 대응도 해둬야 했다.
정말로 효과가 있는 계획이라 레오폴트가 자기한테 반하기라도 한다면, 그러다가 하필 딱 몸이 바뀌었을 때 프로포즈라도 해서 받아들인다면, 절망이니까.
【제가 얼마나 현모양처인지, 전하에게 어필할 수 있는 계획이 있었다구요.】
‘그게 뭔데?'
【기사단에 복무하고 있을 전하를 매주 면회하여, 제가 얼마나 헌신적으로 가정적인지 손수 보여줄 계획이었지요.】
얘는 그냥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파혼하지 않을까.
그냥 얘가 하자는 대로 다 해주면 자연스럽게 파혼이 되지 않을까.
파혼이 아니더라도 얘가 하자는 대로 그냥 다 해주면 레오폴트가 다른 여자랑…
문득 머릿속에 아케밀라나 에밀리에, 바이올렛이 차례로 떠오르며 그녀들과 함께 웨딩 로드를 걷고 있는 레오폴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째서인지 좀 짜증이 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다.
아무튼 그걸 계획이랍시고 말하는 진짜 아스트리드.
【제 완벽한 계획에 놀라신 것 같은데, 괜찮아요. 실로 완벽한 계획이니까.】
의기양양한 모습이 그대로 상상이 된다.
저딴 계획을 세워놓고 혼자 의기양양해 있을 그녀가 참, 뭐라고 해야 할지.
‘…됐고, 일단, 아까 출발하기 전에 얘기했던 거, 그거 해보자.’
오늘은 한 번도 교체를 하지 않았다.
아스트리드가 생각하기에, 일단 교체의 조건은 알아냈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테스트를 해봤을 때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교체가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한 번에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나와 있을 수 있는지, 그 정도는 알아둬야 했다.
그래야만 불의의 사태에 대응할 수 있으니까.
아스트리드는 여행 가방을 뒤져 조그만 모래시계를 꺼냈다.
이 모래시계가 다 흘러내리면 10분이다.
이걸 세우자마자 교체를 하면, 그리고 모래시계를 이용해서 시간을 재보면 대략 몇 분 정도 나와 있을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알겠어? 이제 네가 얼마나 나와 있을 수 있는지 시간을 잴 거야.”
【그래요, 필요하겠죠. 당신치고는 제법이군요.】
‘내가 너보다는 머리가 좋을 거 같다.’
【그건 모욕이군요. 가만 들어넘길 수는 없겠어요.】
‘시끄럽고 빨리 교체나 해.’
【…몸에서 힘 빼요.】
그 말에, 아스트리드는 몸에서 힘을 쭈욱 뺐다.
이윽고 채널을 돌리는 느낌이 나면서 시야가 비틀리는 느낌이 들고-
여행 가방을 뒤적이고 있는 아스트리드가 보였다.
【야, 뭐 하는 거야!?】
‘뭘 하긴요. 당신 때문에 피부가 얼마나 상했는지 보려고 하는 거죠.’
【모래시계, 모래시계 보라고!】
10분이 벌써 다 지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괜찮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렇게 시야가 바뀌는 사이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지 모르는 일이다.
‘아직 한참 남았어요. 음, 딱히 상하지는 않았네. 당신 정말, 같은 여자끼리 몸을 왜 이렇게 함부로 다루는 건가요? 세안제도 아무거나 쓰고, 수건도 벅벅 문지르고… 정말, 섬세함이라곤 하나도 없는 게 꼭 선머슴 같네요.’
의외로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아무튼 빨리 시계나 봐.】
10분짜리 모래시계가 여섯 번.
1시간이다.
【말도 안 돼요. 제 몸인데 제가 쓸 수 있는 시간이 1시간이라구요? 대체 뭐죠, 이 불합리한 처사는?!】
‘나도 몰라. 시끄럽게 떠들지 좀 마.’
하루에 한 시간, 진짜 아스트리드가 나와 있을 수 있는 시간.
이 시간 동안 레오폴트와 같이 있는 일이 되도록 없게 해야 할지, 아니면 붙여놔도 상관없을지 아스트리드는 고민하고 있었다.
붙여놓는다면 진짜 아스트리드는 좋다고 레오폴트에게 엉겨 붙을 것이다. 물론 하는 말을 봐서는 얘가 자기 진심을 그대로 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레오폴트에게 말을 못 할 뿐이지 행동은 솔직하고, 또 레오폴트에 접근하는 다른 여자들에 대한 어마어마한 견제. 하지만 그게 오히려 레오폴트에게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그걸 당사자만 모른다.
주변의 평판이 어마어마하게 깎이고, 레오폴트의 호감도마저 계속 쭉쭉 떨어진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파혼으로 간다.
그러면 얘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자칫 자살한다고 설치면 아스트리드까지 덩달아 같이 죽는다.
붙여놓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떨어져 있으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몸이 바뀌어 있으면 통제권도 없고 지켜보기만 해야 하니.
여러모로 골치가 아팠다.
왕복으로 2주라는 시간이 걸린다.
휴가 기간은 4주.
이동에만 2주가 없어지고, 달랑 2주간의 휴가인 셈이다.
하지만 아스트리드는 그리 큰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수록 생각을 정리할 기회가 많아서, 그게 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흠… 생각해보니, 아버님께 휴가 인사를 올리지 않았군요.】
‘…아버님?’
볼프강을 말하는 것인가.
곰처럼 큰 덩치에, 아빠라고 불러주는 그 한마디에 함박웃음을 짓는 볼프강.
볼프강을 떠올리니 아스트리드도 기분이 좋아졌다.
【무슨 소리예요? 우리 영감탱이한테 인사를 왜 하나요.】
‘그럼, 아버… 아니, 설마.’
【크로이츠 폰 아인트하펜, 이 제국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시며 곧 제 시아버님이 되실 분이시잖아요. 휴가를 다녀오겠노라고 당연히 인사를 올려야 하는 게 아닌가요?】
훈련병이 휴가 신고를 대통령에게 하겠다는 말과 비슷하다.
상관없나 싶지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크로이츠도 그리 싫어하지는 않을 것 같고, 하지만 누가 아버님이냐. 누구 맘대로 시아버님이라는 거냐.
하지만 그 말에, 아스트리드는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황태자의 약혼녀고, 크로이츠에게서도 며느릿감으로 낙점받은 상태가 아닌가.
제국에 있어서 무소불위의, 만인지상의 권력자인 황제의 며느리.
그 권력을, 지금까지 왜 이용하지 못했을까.
‘…이봐, 아스트리드.’
【친하게 부르지 말아주셨으면 하네요.】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은 이쪽도 없거든?!’
【흥. 아무튼, 뭔가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나 하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니, 그런 건 제안이라고 안 하죠. 당신 바본가요?】
바보에게서 바보 소리를 들으니까 기분이 굉장히 나빠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바보가 바보에게...
컵라면을꿀꺽꿀꺽님 후원 감사합니다!
며칠 전에 후원해주셨는데 제가 뒤늦게 알아차려서ㅠㅠ 죄송합니다...
응원해주신만큼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