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녀는 절대 함락되지 않는다-37화 (37/62)

37화. 바보와 바보 (3)

‘들어봐. 너는 일단 레오폴트랑 결혼을 하고 싶은 거지?’

【물론이죠. 전하와 맺어지는 것, 저는 그걸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요.】

순간 욱하고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쑥 솟아올랐다. 그걸 차마 말하지 못하고 아스트리드는 꾹꾹 눌러 삼키며 애써 생각을 달리하려 노력했다.

‘그런 것 치고는… 너무 호감도 낮지 않냐. 레오폴트는 널 싫어하는 것 같았는데.’

생각해보면 정말 그랬다. 아스트리드로 깨어난 이후에 레오폴트를 직접 만난 게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 두어번 만난 거 같고 게다가 한번은 상견례 때다. 그때도 아스트리드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나서 으르렁대지 않았던가.

【전하가 얼마나 부끄러움이 많으신지 모르시는군요. 전하도 저와 동상이몽이에요.】

‘너 동상이몽이 뭔지 모르지.’

【전하의 마음과 내 마음이 같다는 소리예요. 당신은 상식이 너무 부족하군요.】

이심전심이라 하는 거라고 그거는…!

‘…어, 어쨌든. 좋아. 나는 원래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게 목표고, 너는 레오폴트와 결혼을 하는 게 목표고. 하지만 네가 나와 있을 수 있는 건 하루에 한 시간이 전부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당신, 지금 절 협박하는 건가요?】

다행이었다. 그나마 지금 아스트리드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스트리드도 이해한 모양이었다. 이것마저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정말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정말 난감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내가 하려는 건 서로 협력하자는 거야. 너는 내가 네 몸을 벗어나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걸 도와. 나는 네가 결혼할 수 있도록 도울 테니까.’

【…그래서 당신이 이득이 되는 게 뭔가요?】

약간의 망설임이 있긴 했지만, 아스트리드는 그래도 귀족의 딸답게 거래에 대한 득실을 따질 줄은 알았다. 상식이 다소, 아니 많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기본적인 건 생각할 수 있는 모양이라 천만다행이었다.

‘내가 먼저 돌아가는 게 조건이야. 나는 결혼에 추호도 관심이 없어. 레오폴트와 웨딩 로드를 걷는 건 내가 돌아간 이후에 하도록 해.’

그 뒤로 한참동안이나 진짜 아스트리드는 말이 없었다. 고민하는가 여기기에도 제법 긴 시간이 지나간 이후에야, 진짜 아스트리드는 대답했다.

【…좋아요. 어차피 당신이 제 몸에 들어와 주지 않았다면 저는 그날 죽었겠죠. 어쨌든 당신이 이렇게 들어온 이유로 살아있는 것일 테니, 당신이 돌아가는 데에 협조하도록 하겠어요. 다만, 저도 조건을 하나 걸죠.】

‘네가 조건을 걸 상황이 아닐 텐데.’

하루에 23시간 몸을 지배하는 건 가짜 아스트리드다.

진짜 아스트리드가 몸을 지배하는 건 하루에 단 1시간.

그마저도 가짜 아스트리드가 동의하지 않으면 바꿀 수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진짜 아스트리드가 조건을 내건다는 것은 다소 무리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무리한 조건은 아니에요.】

‘좋아, 일단 들어보겠어. 말해봐.’

【세안은 에스티로마에서 나온 세안제를 쓰세요.】

‘…응?’

【수건은 보풀이 일지 않는 북방 브랜드의 수건을 쓸 것.】

【하루 30분은 반드시 반신욕을 할 것.】

【영양을 위해 충분한 육류를 섭취할 것.】

【하얀색 위주의 드레스를 입을 것.】

【액세서리는 제 방에 있던 보석함을 가져와서 제가 지정해주는 대로 착용할 것.】

‘아, 아니… 잠깐, 잠깐.’

【그리고, 전하의 곁을 알짱거리는 그 빌어먹을 여우년들을 철저히 분리할 것. 제 요구 조건은 이렇게에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아스트리드는 이제 갓 스물이 아닌가.

꾸미고 싶을 나이고, 그리고 꾸며야 할 나이고, 한창 반짝반짝 빛이 나야 할 나이.

그렇게 생각하면 무리한 요구조건은 아니었다.

‘좋아. 받아들이지.’

【그래요. 그럼 이렇게 동맹을 맺도록 하죠.】

의외로 원활하게 동맹은 체결이 되었다.

가짜 아스트리드가 원래의 세계로, 그녀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도록 돕는다.

그리고 가짜 아스트리드도 진짜 아스트리드가 레오폴트와 결혼할 수 있도록 돕는다.

단, 결혼식은 가짜 아스트리드가 원래 세계로 돌아간 이후로 한다.

단 세 줄로 정리되는 계약이 체결될 즈음에, 마차는 어느새 수도인 페르상트 관문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페르상트 환영의 벽이군요. 오랜만에 보니 반갑기도 하네.】

‘잘 아네?’

【제가 그쪽보다 훨씬 많이 봤으니까요!】

뾰족한 말투였지만, 숨길 수 없는 기쁨과 설렘이 잔뜩 묻어나왔다.

또렷하게 보이지 않고 흐릿하게 보이는 모습으로 봤던 페르상트 환영의 벽이었는데, 지금에서라도 또렷하게 마주하는 그 모습은 반갑기도 할 터여서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

관문을 지나서 이제 더 들어가면 대공 자택이 나온다.

【바로 집으로 가서, 옷부터 갈아입죠. 그리고 황궁으로 가서 접견 신청을 하면 되니까.】

‘진짜로 휴가 인사하려고?’

【당연한 게 아닌가요. 시아버님이 되실 분께 인사를 하지 않으면 대체 누구에게 인사를 한다는 말씀이실까 모르겠군요.】

‘말을 말자, 말을 말아.’

어쩌면 얘처럼 순애보도 또 있을까 싶었다.

아마 성질만 좀 죽이고, 얌전히 공부도 하고 그랬으면 오죽 좋았을까.

‘그러고 보니 너는 북부에서 쭉 자랐을 거 아냐.’

【그랬지요.】

잘 정비된 도로 위를 달리는 마차는 제법 평온해서, 아스트리드는 벌써 세 시간 가까이 달리는데도 딱히 피로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앉아있었더니 관절이 굳는 느낌이라 쭈욱 팔을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럼 공부는 어떻게 했는데?’

【영웅은 공부 따위 안 해요.】

‘…그 말이 아니라… 그래도 귀족이니까 기본적으로 교양을 배우긴 해야 했을 거 아냐.’

영웅은 공부 따위 안 한다니, 볼프강이 얼마나 골치를 썩였을지 안 봐도 훤하다.

그렇다고 저렇게 공부 안 한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나?

【가정교사가 있었어요. 입주 가정교사.】

‘그래?’

그런 기록이 있었나?

일기장에도 그런 얘기는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가정교사 말고는 딱히 답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지역에 학교가 있을 리도 없고, 더군다나 이 콧대 드높은 귀족 아가씨가 평민들과 한데 어울려 학교에 다녔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럼 답은 역시 입주 가정교사뿐인가.

【뭐, 그리 좋은 선생님은 아니었어요. 절 가르친 시간보다 저랑 싸운 시간이 더 많기도 했고.】

‘그래… 선생님이 참 고생 많이 하셨겠다.’

【무슨 의미죠? 당신, 지금 그 말은 흘려들을 수가 없군요. 좀 더 자세히 의미를-】

“다 왔습니다!”

끽, 하고 마차가 서는 느낌이 난다.

마차 창문 밖을 살짝 내다보면 북부 저택만큼은 아니라도, 그 위용이 못지않은 저택이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입구의 철문 앞에 멈춰 선 마차의 문이 열리고, 동시에 철문이 활짝 열리며 저택 안에서 사용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리고 그중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사람.

“아슈레이, 너는 여기 왜 있는 거니.”

“아이고, 누님. 오랜만에 보는 동생인데 첫 인사가 그게 뭡니까?”

【이 녀석이 여기 왜 있는 거죠?】

‘나도 몰라.’

큼지막한 자상을 실룩이며 분명 웃는 것이 분명한 얼굴.

그 얼굴 가득히 누님을 향한 반가움으로 채워낸 거한이 아스트리드를 향해 웃고 있었다.

“누님께서 오신다고 서한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 소식을 들으니, 좀이 쑤셔서 말입니다. 그냥 제가 먼저 와있다가 누님 만나서 같이 미테리엔으로 돌아가도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도 그러길 원하셨고요.”

제법 무게가 있을 것임에 분명한 여행 가방을 한손으로 덜렁 집어 든 아슈레이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 그의 웃음소리와 함께 나란히 정원을 가로질러 걷는 아스트리드.

오랜만에 만나는 동생이 반가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아스트리드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아버님은?”

“잘 계시죠. 요즘은 그 뭐야, 이민족 놈들도 제법 조용해서 말입니다. 아버지 혼자서도 충분히… 아니 뭐, 그런 수식어가 필요하진 않죠. 아무든 싹 다 조지고 계시니까요. 저 하나 빠진다고 해서 뭐 미테리엔이 문제 생기겠습니까?”

“그건 그러네. 언제 도착했니?”

“어제 도착했지요. 이야, 하루만 더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네요. 저 도착하고 딱 다음날 누님이 도착할 줄은 몰랐으니 말입니다.”

“날짜 계산해보면 간단한 걸 그걸 왜 모른다니?”

어차피 훈련 기간은 4주니까 그냥 세어보면 간단한 일일 텐데, 아스트리드는 의아하기도 했다.

“아이고, 누님 무기까지 같이 가져오느라 무거워서 그랬죠. 제 해머에 누님 대검까지 같이 메니까 말이 버텨낸답니까?”

“아, 가져왔구나.”

아스트리드가 북방 영토에서 쓰던 무기다.

【스노우 플라워를 가지고 왔다고요?!】

아스트리드의 목소리가 환희에 가득 차 있었다.

스노우 플라워.

‘그 대검 이름이 스노우 플라워야?’

일단 스노우가 아니다.

거무튀튀한, 아주 어두운 회색이다.

플라워조차 아니다.

이게 도끼인지 검인지 쇳덩어리인지 모를 큰 검이다.

아스트리드니까 한손으로 휙휙 다루지 보통 사람은 양손으로 들려고 해도 꼼짝도 하지 않을 그런 대검, 그런데 이름이 스노우 플라워.

도통 이해를 못 하겠다고 아스트리드는 생각했다.

【예쁘기만 한데,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인데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역시 이래서 평민이란.】

‘네가 이상한 거라고.’

교복을 벗어놓고 시녀의 도움을 받아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시간이 시간이라 지금이라도 빨리 황궁으로 가서 접견 신청을 해야 했다.

아무리 아스트리드라고 하더라도 황제를 신청하자마자 만날 수는 없다. 어디 소국의 왕도 그럴진대 하물며 대제국 아인트하펜의 황제를, 당일 신청해서 당일 만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님, 어디 가십니까? 오시자마자.”

제법 품이 넉넉한 표범 가죽바지에 빌로드 셔츠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아슈레이가 저택 로비를 서성이다가, 2층 층계를 내려오는 아스트리드를 반겼다.

“황궁에.”

“접견 신청하러 가십니까?”

“응.”

“같이 가도 됩니까?”

“안된다면 안 따라올 거야?”

그 말에, 아슈레이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숨어서라도 따라가죠. 이렇게 오랜만에 누님 만났는데, 한시라도 좀 더 붙어있고 싶은 이 동생의 애달픈 마음을 좀 헤아려 주시죠, 누님.”

“싱겁기는.”

피식, 웃으며 아스트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하지만 그 옷차림은 안 돼. 제대로 갖춰 입어.”

“전하는 만나셨습니까?”

【황궁에 계시니, 어차피 내일이면 만날 텐데.】

자택에서 황궁 접견신청소까지는 거리가 그리 멀지는 않았다.

황제를 접견할 수 있는 이가 그리 많지도 않으니 신청서 접수야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고, 아스트리드는 얼굴이 곧 신분이니 신청서 접수도 바로 되었다.

접견은 내일로 잡히고, 아스트리드는 아슈레이와 함께 신청소를 나와 광장을 향해 걸었다.

“누님은 4주 동안 변한 게 하나도 없으시네요.”

【당연하죠. 제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관리를 한 건 난데.

“그러니.”

“여전히 싸늘하시고 말입니다.”

“딱히 다정할 필요는 없지 않니.”

【그래요. 동생에게 다정할 필요가 뭐가 있나요.】

“아슈레이, 저녁에 급한 일이 있어?”

“아, 있기는 한데.”

이렇게 아슈레이와 나온 김에 저녁이라도 먹고 들어갈까 싶었다.

점심은 학교에서 먹고 나왔다고 하지만, 이미 해는 저물고 있어서 곧 저녁을 먹을 시간.

4주 동안 약간 이른 시간에 저녁을 먹는 습관을 들였더니 이 시간이 되니 허기가 느껴졌다.

“급한 일이 있어?”

【저 백수 녀석이 급한 일이 있을 리가 없어요. 거짓말일 텐데.】

“아아, 누님이랑 저녁을 같이 먹어야 하는 일인데. 동의를 아직 못 받았네요. 어떻게,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본 사이에 더 능글맞아졌네요. 쟤는 대체 누굴 닮았는지.】

‘너보단 나아.’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우연이네, 나도 그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이야아, 역시 남매라니까요. 말을 안 해도 통하는 게 있네.”

“실없기는. 뭐 먹고 싶은 거 없니?”

“누님이 해주시던 멧돼지 장작구이가 먹고 싶은데 여기서는 못하니까. 대충 고기라도 먹죠? 언제나 뭘 먹을까 싶으면 고기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는 아스트리드도 대찬성이었다.

【저도 찬성이에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여러분 시험이라는 건 사실 없는 게 아닐까요?

누군가가 시험이라는 환각을 심어놓고 그 기간 동안에는 공부를 해야한다는 전기적 자극을 주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저는 그 자극에서 벗어난 사람인 게 아닐까요?

그게 맞을 거 같아요

그게 아니면 제가 이러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시험이라는 건... 대체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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