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샴페인과 감귤 소스는 같이 먹으면 안돼요 (3)
샴페인은 특유의 향이 있다.
달착지근하면서도 약간의 새콤한 맛이 특징이기도 한 샴페인.
아스트리드가 마시기도 했고 레오폴트도 마셨던 바로 그 샴페인의 향이, 이 넓지 않은 객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침구가 두 벌.
시종이 말했던 대로 침구가 두 벌이고, 그중 하나에 몸을 뉜 아스트리드와 그런 그녀 위에 간신히 팔로 몸을 지탱하며 엎드린 레오폴트.
하지만 아스트리드의 힘을 레오폴트가 이길 수 있을 리 없으니, 레오폴트는 얼굴이 붉어진 채 겨우겨우 아스트리드의 젖가슴에 닿지 않게 버티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이 상태에서 그녀의 포옹을 벗어난다는 건, 사실상 무리였다. 이미 그녀가 끌어당기는 힘을 더는 버티지 못한다는 듯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하는 팔은, 레오폴트가 평소 단련을 전혀 게을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견뎌내지 못했다.
“윽.”
짧은 외마디 소리와 함께 레오폴트가 아스트리드의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한번 굽혀진 팔은 다시 힘을 준다고 해도 도로 펴지질 않았다.
가슴팍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출렁임. 그 출렁임도 잠시 푹신한 쿠션감까지 느껴지는 포근함.
“시끄혀어… 절대, 절대로 안 바꿔 줄 거니까… 절대… 이힛…”
‘…안돼. 정신 차려야 한다.’
스르륵 몽롱해지며, 어느 순간 아스트리드의 가슴으로 손이 향하던 레오폴트는 자기 뺨을 철썩 때리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이미 잠든 아스트리드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관계를 가지게 된다면 그게 강간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하물며 레오폴트 본인에게 아무런 이성적 호감을 느끼지 못한다며, 약혼을 파기하는 그날까지 레오폴트가 진정 사랑하는 여자를 찾을 수 있도록 협력하겠다고, 그렇게까지 말했던 아스트리드.
그런 그녀와 관계를 가진다는 건 그야말로 파국을 의미하는 거라고 레오폴트는 생각했다.
아무리 용을 써봐도 레오폴트를 끌어안은 아스트리드의 손길은 도무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위에서 깔아뭉개다시피 하고 있는데도 숨조차 막히지 않는 듯, 마치 곰 인형을 끌어안은 것처럼 만족스러운 미소까지 띤 채 자고 있는 아스트리드.
목을 끌어안긴 덕분에 레오폴트는 본의 아니게 아스트리드의 얼굴을 바로 코앞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미인이긴 하지…’
말 그대로 절세가인.
말만 좀 예쁘게 하고, 그 흉포한 성정을 숨길 줄 알았더라면.
게다가 10년 전의 그 일만 없었더라면.
이미 여기서 레오폴트는 거사를 치렀을 것이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기에.
꿈이라도 꾸는 것인지 입맛까지 다시면서 헤헤, 연신 웃고 있는 아스트리드.
레오폴트는 그런 그녀에게 안긴 채로, 코앞에서 웃고 있는 아스트리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감긴 채 살짝 떨리고 있는 긴 속눈썹.
갸름한 눈매는 끝으로 갈수록 살짝 위를 향하고 있어서 마치 고양이처럼 도도하고 날카로운 느낌이었다.
오똑하고 긴 콧날과 크지도 작지도 않은 콧망울. 그리고 술기운이 아직 남아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양 볼.
살짝 벌린 입에서 스며 나오는 달콤한 향…
‘어?’
이상하다.
아무런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어야 했을 레오폴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아카데미에서 그녀를 지금처럼 코앞에서 봤을 때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었던 레오폴트의 가슴이 지금 이 순간, 마치 있는 힘껏 달음박질친 것처럼 거세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스트리드의 입술이 너무나도 달콤해 보이고, 이따금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이 처연하기까지 하다.
‘…정신 차려라, 레오폴트. 아스트리드다. 널 남자로도 보지 않는… 그런 여자다. 황태자가 되어서 지금에 이르러 이런 감정이라니, 다 큰 성인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몸이 자유로웠다면 벌써 허벅지를 수십번이고 꼬집었을 것이다.
얼굴을 조금만 움직인다면 아스트리드의 저 얼굴에 맞닿을 수 있을 테지만, 레오폴트는 인내하며 참아냈다.
‘참아라… 레오폴트, 안된다. 이 여자는 아스트리드다…!’
*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 아침햇살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느껴지는 강렬한 두통.
“끄으…”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켜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면 뭔가 거치적거린다.
아스트리드는 뭐가 있길래 이렇게 걸리적대나 싶어 옆을 바라보았고, 이윽고 금발 머리의 조각과도 같은 미남이 옆에 엎드려 자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으… 어!?”
【이제야 깨어났군요, 이 요망한 암캐 같은 년!】
그리고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는 매도의 폭풍.
‘자, 잠깐. 이게 무슨 일인데? 응? 무슨 일인 거냐고, 설명을 좀 해 봐!’
【뭐긴 뭔가요! 얌전한 고양이가 주방에 먼저 들어간다더니, 제가 전하와 결혼하는 걸 돕겠다고 하더니, 자기가 먼저 유혹하고 자빠졌네 진짜! 당신,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제정신이야?!】
‘자, 잠깐만. 생각, 아니지. 기억을 좀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천천히 레오폴트의 머리를 살짝 들어 올려 팔을 빼냈다.
여자친구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잠드는 것이 꿈이었건만, 그래. 그 꿈을 이루기는 이뤘다.
비록 내가 여자가 됐고 팔베개를 남자에게 해주는 꼴이 되었다지만 어쨌든 이루기는 했다.
조금도 기쁘지 않았지만.
천천히, 레오폴트가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침대를 내려와 바로 앞에 보이는 탁자에 가 앉았다.
탁자 바로 옆의 창문을 보면 이제 한창 시작된 황궁의 아침이 내다보였다. 화려하게 꾸며진 정원에 잘 다듬어진 조경수, 그리고 밤사이 내려앉은 꽃잎이며 나뭇잎 등등을 쓸고 닦아내며 청소하느라 바쁜 시종들.
어림잡아 보면 높이는 대략 4층 정도 되어 보이는 이곳.
‘…뛰어내리면 죽겠지?’
【개소리하지 마세요! 이 암캐 같으니!】
기억을 더듬어보면, 제일 멀리 있는 기억이 샴페인이었다.
아스트리드에게 너 술 세냐고 물어봤고 당연히 술이 세다는 대답이 샴페인을 마셨었다.
한 잔, 두 잔, 석 잔… 그래, 거기서부터 기어… 기억이… 어…
- 이보셔요오오, 잘생긴 왕자니이임. 부르셨쓰면, 말을 하셔야죠오오…
- 누나한테 아스트리드라니, 누나라고 안 해…?!
- 우으으응… 아슈레이… 5분만…
- 끼야으응…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
레오폴트의 목을 끌어안고 확 잡아당기던 것도 어렴풋이.
결국 레오폴트가 저러고 자고 있는 것도 자기 의지조차 아닌, 아스트리드 때문이리라.
‘미쳤네. 미쳤어. 내가 진짜 단단히 미쳤네.’
【그렇게 내가 바꿔 달라고 바꿔 달라고 그렇게 소리를 질러댔는데 들은 척도 안 하고, 뭐?! 내가 너희들 때문에 이 개고생을 한다고? 지랄 마세요! 이 암캐 같은 게!】
너 진짜 말이 좀 너무 심하지 않냐.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스트리드도 솔직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줘도 못 먹을 거면 차라리 날 주지 그랬냐고요…! 왜 주는데 처먹지도 못할 거면서 바꿔주지도 않고…! 아이고…!】
하지만 그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레오폴트에게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래서야 정말 여자가 아닌가.
정말 여자의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교태를 있는 대로 다 부려댄 그런, 사랑에 빠진 여자가 아닌가.
지난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괴감이 온몸을 뒤덮다시피 했다.
미쳤다.
미친 거다.
나는 정말 미쳤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러고 있다가는, 정말로 나는 여자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강렬한 위기감.
하루빨리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술을 입에 대지도 않겠다고 아스트리드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끄응.”
한숨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리면 레오폴트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엎드려 잔 탓일까, 한쪽 뺨이 눌려서 붉게 물들어 있는 그 모습이 조금 웃기기도 해서 아스트리드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푸후후후훗… 전하도 귀여우신 면이 있으셔…】
진짜 웃는 여자가 있긴 있었다.
“일어났나, 아스트리드.”
“간밤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니 그래도 술을 먹고 그렇게 취해서 잠들었으면 좀, 속은 괜찮냐라던가 술은 깼냐라든가 그런 걸 먼저 물어보는 게 예의 아냐?’
【전하는 저것도 걱정하시는 거라고요. 수줍음이 많으셔서 걱정을 빙빙 돌려서 말씀하시는 건데 그걸 못 알아듣네. 이래서 머리 나쁜 것들이란…】
‘네 머리라고, 네 머리…’
하지만 어쨌든 이번에는 아스트리드가 실수를 했다.
실수를 한 정도가 아니라 대형 사고를 쳤지.
황태자에게 헤드락을 걸고 그대로 잠들어버리다니, 이게 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너는 술을 좀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더군.”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그리할 생각입니다.”
술을 끊으리라.
‘술 세다 그러더니, 네 말을 믿은 내가 바보다. 바보 멍청이.’
【술에 약을 타신 게 아닐까 싶네요. 북방에서 전사들과 자란 제가 술이 약할 리가 없잖아요. 게다가 식전주 샴페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사실 알콜을 입에도 대면 안 되는 수준이다.
식전주 샴페인 석 잔에 필름이 끊길 정도로 취하다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알콜에 약하다.
아무튼 조심해야 할 것 같다고, 아스트리드는 생각했다.
“가지. 속이 아플 텐데, 풀어야 할 것 같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래도 속이 안 좋은 건 사실이라, 그 말은 유독 반갑게만 느껴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끼야으응
아참 주말에는 연재가 없습니다!
쉴 거에요!
푹 쉬고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