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샴페인과 감귤 소스는 같이 먹으면 안돼요 (4)
아침 식사는 무난한 호박 수프였다.
아스트리드는 개인적으로 매콤한 탕 종류를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 시대에 바랄 게 있고 바라면 안 될 게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매운맛이 나는 요리는 후자였다.
‘그래도 딱히 나쁘지는 않네…’
“아스트리드.”
맞은편에서 수프를 떠먹던 레오폴트. 숟가락으로 소리 없이 수프를 떠먹던 아스트리드는 고개를 드는 대신 눈동자만 살짝 치켜뜨고서 레오폴트를 쳐다보았다.
“…되도록 술은 자제하지.”
“그럴 생각이에요. 한번 아프고 났더니 체질이란 게 바뀌나 봅니다.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프고 나니 체질이 바뀌었다는 말에 레오폴트가 멈칫했다.
아스트리드가 쓰러졌었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져서 한 달이나 의식을 되찾지 못했었다는 건 레오폴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병문안조차 가지 않았었다는 게 레오폴트에게도 부채 의식이 좀 남아있었다.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그게 그렇게 됐다. 가는 데에만도 일주일이나 걸리는 거리이니 가려면 마음먹고 가야 했다.
‘그것만은 아니지만.’
부담스럽다.
레오폴트는 아스트리드가 꺼려졌다. 꺼려진다기보다는 아스트리드가 싫었다. 아스트리드 때문에 레오폴트 본인도 사흘이나 앓아누웠지 않았던가. 열 살 먹은 황태자가 사흘이나 자리를 보전하게 만들었던 아스트리드이니, 주위의 반응은 둘째치더라도 황태자인 레오폴트 본인도 아스트리드를 좋게 대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만든 원흉인 주제에 이렇게 냉정하게 본인을 대하는 아스트리드도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여하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호박 수프를 떠먹은 아스트리드가 빵을 반으로 갈라 수프 바닥을 싹싹 훑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수프를 빵으로 훑어서 깔끔하게 식사를 마친 아스트리드가 식기를 식탁에 내려놓자, 시종이 다가와 접시를 치웠다.
“맛있는 수프였어요. 잘 먹었습니다.”
시종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는 아스트리드.
그녀의 새하얀 웃음에 직격당한 시종이 얼굴을 붉히며 깊게 목례를 했다.
‘아스트리드가… 인사를 했다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오폴트의 눈동자에 잠깐이지만 이채가 어렸다. 레오폴트도 딱히 다르지는 않지만 아스트리드는 타고난 귀족이어서, 이런 시종들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그런 여성이 아니었다.
게다가 별의 가호를 받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전장을 누볐으니 이런 주종 관계에 있어서는 더더욱 엄격했을 아스트리드.
그런 그녀가 시종에게 인사를 했다는 게, 레오폴트로서는 신기했다.
“그래, 둘이 같이 밤을 보냈다고 들었다만.”
“케흑.”
조찬 이후 가볍게, 황제인 크로이츠와의 티타임이었다.
크로이츠와 레오폴트, 아스트리드가 모여앉은 테이블에 김이 폴폴 솟아나는
차를 마시던 아스트리드가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하고, 레오폴트가 테이블에 놓여있던 손수건을 꺼내 아스트리드에게 건넸다.
“단순히 취한 미테리엔 영애를 객궁에 재웠을 뿐입니다, 폐하. 오해를 할 만한 말씀은 지양하시지요.”
레오폴트는 담담하게 대꾸했지만, 그 둘을 지켜보는 크로이츠는 딱히 그럴 마음이 아닌 것 같았다.
싱글벙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음이 그의 얼굴에 한가득 어려있어서, 어차피 레오폴트가 뭐라고 하던 크로이츠는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폐, 폐하. 듣는 귀가 많습니다.”
급기야 아스트리드까지 나서서 만류하고 나서야 크로이츠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상관없지 않은가? 아카데미라고 한들 레오폴트만 의무지 아스트리드, 너는 의무도 아니고 말이다.”
크로이츠의 말이 또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황태자인 레오폴트야 아카데미를 반드시 졸업해야만 황위를 이어받을 수 있으니 졸업을 꼭 해야 하지만, 아스트리드는 딱히 그런 의무가 없었다.
그러니 크로이츠가 보기에는 레오폴트가 가니까 따라간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폐하, 하지만 아카데미 재학 중에는 혼인이나 약혼 같은 사적 관계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4년간은…”
레오폴트가 보기에, 크로이츠는 당장이라도 둘을 결혼시키고자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크로이츠는 아스트리드를 너무 좋아해서, 당장이라도 결혼시키고 싶어하는 게 분명하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예?”
아카데미는 졸업할 때까지 사적 관계가 금지되어 있었다. 들키면 들키는 대로 교칙이 적용되어 심하면 퇴소 등 제재를 받게 된다.
그래서 레오폴트도 그렇고 아스트리드도 그렇고 어떻게든 시간을 벌기 위해, 무작정 파혼하는 게 아닌 서로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내서 파혼하기 위해,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아카데미를 선택했었다.
그러나 그런 규칙 따위가 무슨 상관이 있냐는 크로이츠의 말에 둘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황제 아니냐. 자, 레오폴트. 말해보거라. 아카데미의 교칙이 위냐, 아니면 내가 위냐. 내가 예외 적용해달라고 하면 거부할 수 있겠느냐?”
그 말에 레오폴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
“어떻게든 결혼시키려고 하시는 것 같은데.”
“그런 듯하네요.”
【당연한 게 아닌가요? 당신, 인제 와서 역시 결혼은 무리라던가 안된다던가 그런 헛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죠?】
‘아니야. 약속은 반드시 지킬 거라고.’
머릿속에서 떠들어대는 진짜 아스트리드의 목소리를 애써 못 들은 척하려고 했지만, 아까부터 무시했더니 이제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는 진짜 아스트리드 때문에 슬슬 장단만 맞춰주고 있었다.
【게다가 전하 역시도 은연중에 결혼 생각하고 계신 게 틀림없다구요!】
‘아니, 대체 어딜 봐서?’
보통 약혼녀에게는 친절하게 대하기 마련이다. 레오폴트도 지금 일견 친절하긴 하지만, 어딘가 거리가 느껴지는 친절함이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친절함과는 거리가 멀어서, 결과적으로는 그냥 타인을 대하는 정도의 친절함… 그 정도에 불과했다.
【어젯밤, 당신의 그 여우짓에도 끝까지 혼전순결을 지켜주셨잖아요! 분명 소중히 여겨주시는 게 틀림없다니까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진짜 아스트리드에게 설명을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우짓이라느니 암캐라느니 하는 말에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진짜 자기가 그렇게 행동했다면 그런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진짜 아스트리드는 그런 거짓말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지어낼 정도로 머리가 좋지는 않았으니까.
‘이제는 빨리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겠어. 이러고 지내다간 진짜 큰일 나겠다.’
【저도 협력할 테니까 빨리 돌아갈 방법을 찾도록 하죠.】
“-했으면 한다만, 듣고 있나?”
“네?”
레오폴트가 뭔가 말을 한 모양이었다.
눈썹을 살짝 찌푸린 레오폴트가 아스트리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실례했어요. 정원의 꽃이 너무 아름답기에 잠시 지켜보느라.”
“꽃이라니…”
안 어울리는 소리를 한다는 얘기가 입술까지 나왔다가 가까스로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실례다. 아스트리드도 여자니까 그런 말은 실례다. 레오폴트는 재차 아스트리드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이야기를 할 게 좀 있는데, 시간 괜찮은가?”
“네…?”
왜요.
무슨 의논이요.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니니, 저녁 즈음에 내가 미테리엔 대공가를 방문하도록 하지.”
“…알겠어요.”
*
아스트리드가 황궁을 나선 것은 오전이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뜨기 전, 아스트리드를 태운 마차가 황궁을 나서고 미테리엔 대공가로 향하던 중 아스트리드는 함께 탄 시종을 불렀다.
“행선지를 바꿔주세요.”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황립 도서관으로 가주세요.”
이대로 대공가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기에는 시간도 그렇고, 기왕 마음을 먹었을 때 빨리 행동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었다.
【흥, 돌아갈 마음이 있긴 했군요?】
‘무슨 또 이상한 소리야.’
【당신이 먼저 전하께 선수치려는 줄 알았죠.】
그럴 일은 없다.
절대로 없다.
‘내가? 레오폴트한테?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절대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 그보다, 너 황립 도서관을 가 본 적이 있나?’
【말했지 않나요.】
‘뭘?’
【영웅은 공부 따위 안 해요. 도서관을 제가 뭐 하러 가나요.】
너무 당당하니까 그건 그것대로 오히려 별 생각이 안 들었다.
그렇게 진짜 아스트리드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는 번화가를 벗어나 변두리로 접어들었다. 말이 좋아 변두리고 조금 덜 번화한 정도에 불과하다.
이윽고 거대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궁과 비교해도 그 위용이 작지 않은, 대충 봐도 10층은 가뿐하게 넘을 것 같은 고층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립 도서관입니다. 복귀 후에, 미테리엔 영애께서는 황립 도서관으로 가셨노라고 보고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귀빈의 행선지가 바뀌었다면 당연히 보고를 하는 게 맞을 것이라, 아스트리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황립 도서관이군요. 처음 와보네… 어휴, 책 냄새.】
‘자랑이다.’
황립 도서관답게 거대한 철문이 지키고 선 정문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쪽문이 있었다. 아무래도 철문은 그냥 장식이거나 고관대작이 행차했을 때나 쓰는 것 같고 실제로 사람이 드나드는 용도로는 이 쪽문을 사용하는 모양이라, 아스트리드는 쪽문으로 다가가 경비대원으로 보이는 인물에게 말을 걸었다.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이라고 해요. 황립 도서관으로 들어가고자 하는데, 바로 들어가면 될까요?”
경비대원이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리고는 경비실 안쪽으로 후다닥 달려들어 가 명부를 가지고 나왔다. 한 손에는 명부를, 다른 손에는 펜을.
“이, 이곳에 성함과 방문 목적을 기재하시면 됩니다. 이용 허가는 이미 받아두었으니 기재 후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황립 도서관은 황궁과 유사한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허가받은 소수의 인물만이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라 그 크기에 비해서 실제 이용하는 이는 적은 편이었는데, 아스트리드가 도서관에 들어섰을 때도 건물 안에는 사서로 보이는 관계자들만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을 뿐 실제로 책을 보고 있다거나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실례합니다.”
“네, 무슨 일이신가요?”
이용하는 이들이 대부분 고위층 귀족들이기 때문에 사서들은 대부분 예의가 몸에 밴 듯 깍듯했다. 아스트리드가 말을 걸기가 무섭게 영업용 미소를 한가득 지으며 목례를 하는 사서.
“소환 마법이나 공간 마법에 대한 자료를 좀 찾아보고자 합니다만, 있을까요?”
소환 또는 공간.
아스트리드는 다른 세계에 있던 자기가 여기로 끌려들어 온 것이 누군가가 자기를 소환했거나, 아니면 공간 마법을 시전할 때 말려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 마법들이 어떤 원리로 발동되는지, 어떤 효과가 있는지 그 기초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소환 또는 공간마법… 이라면, 3층에 관련 서적이 있습니다. 다만 발달된 마법은 아니기 때문에 기초적인 개념 서적들이 대부분일 거예요.”
“그거라도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서 아스트리드가 3층을 향해 떠나가고,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사서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앗차.”
모근 언저리에 드러난 보라색의 머리카락.
그런 머리카락에 사서가 손을 가져다 대자, 보라색의 머리카락은 이내 다시 갈색으로 변했다.
“들킬 뻔했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큭 내 안의 대유방이 참지 못하고 연재를...!!!!
내일은 진짜 쉬어요...! 진짜진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