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의심과 연심 (1)
도서관은 그 특유의 냄새로 가득했다.
종이가 이미 만들어진 세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거대한 장서고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책이 모두 종이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은 분명 종이뿐만 아니라 인쇄에서부터 제본에 이르기까지 기초적인 산업 기술은 개발이 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아스트리드는 이 장서고를 둘러보며, 아인트하펜이 괜히 대륙을 통일한 것이 아님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중장기사로 대표되는 막강한 전투부대와 함께, 마도기사로 대표되는 속공 부대에 마법사로 대표되는 화력 부대, 궁수로 대표되는 지원부대에다가 그들을 받쳐줄 수 있는 산업 기술력까지 골고루 발달하여 있었기에 대륙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고작해야 책 가지고 무슨.’
나도 제법 아인트하펜 사람이 되어버린 모양이라고 아스트리드는 생각했다.
【으으, 책 냄새. 벌써부터 잠이 쏟아질 것만 같네요. 저는 눈을 좀 붙일 테니 알아서 필요한 것들을 찾도록 하세요.】
몸이 하나인데 잠은 교대로 잘 수 있다니, 신기한 노릇이었다. 이러다가 아스트리드가 몸과 함께 잠이 들면 진짜 아스트리드가 깨어나서 몸의 주도권을 뺏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런 일은 지금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시간도 제한되어 있었고, 게다가 진짜 아스트리드는 그런 것에 의문을 가지고 시도할 만큼 그렇게까지 지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어디 보자… 소환, 소환.”
소환의 ㅅ으로 시작하는 서고를 찾아서 제법 한참 걸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아스트리드가 깨어났을 때 글자라던가 언어는 모두 알고 있는 상태였기에, 의사소통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소환… 음, 여기 있네.”
지금 아스트리드는 마법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아예 문외한이고, 진짜 아스트리드에게 물어봤을 때도 마법처럼 치사한 술수는 익힐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걸 보면 분명 마법에 대한 소양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면 결국 기초부터다.
소환의 기초와 그 기본에 대한 이해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역시 기초를 다져야 한다.
아스트리드는 일단 그 책을 서가에서 뽑아 들고서 책상에 올려놓았다. 다른 책들을 더 뽑아올까 생각했는데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기초이니까, 이 책부터 조사해 볼 생각이었다.
소환.
가능성이 제일 높은 건 역시 소환이다.
원래 세계에서 그냥 편의점에 가고 있던 건 기억이 났다.
그런데 거기가 마지막이다. 한밤중에 편의점에 가고 있었는데, 눈을 뜨니까 이 아인트하펜이었고 그중에서도 북부대공인 미테리엔 대공가의 영애,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이 되어있었으니까.
영혼이니 뭐니 이런 걸 믿지는 않았었는데, 이쯤 되면 그 영혼이라는 게 실제로 있긴 있고 그 영혼을 소환해서 이 몸에다가 쑤셔서 넣었다… 라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가설이기도 했으니까.
‘자… 어디.’
제법 화려하게 금박으로 입혀진 표지를 펼치면 약간의 책 먼지가 폴폴 날아서 햇빛에 반짝였다. 책은, 어쩔 수 없지. 아스트리드는 먼저 서론을 펼쳤다.
「이 책은 위대한 아인트하펜의 통일 황제 크로이츠 폰 아인트하펜의 이름 하에, 인도적이고 올바른 방법으로 집필되었음을 보증하며, 또한 국가와 신민의 안전을 지킬 목적으로 정확한 지식을 모아 담았음을 알린다.
하술할 내용들은 한 치의 의심조차 허용하지 않을 완벽한 내용이므로 그 내용에 의문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악을 멀리하고 선을 추구하는 제국 신민의 의무라는 것을 가슴속 깊이 새겨야 하며…」
‘뭐 이딴 서론이 다 있지.
아무리 봐도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이게 정말 맞는 건가?”
의문이었다. 서론부터 보자마자 이 책에 대한 신뢰도가 급감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보통 이렇게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부터 나오는 책은 대부분 학문으로서의 신뢰도보다는 황실에 잘 보이기 위한 목적인 경우가 많으니까.
아스트리드는 책을 덮었다. 황립 도서관이니까, 분명히 다른 책들이 더 많을 것이다.
좀 더 오래되고 전문적이며, 뭔가, 뭔가… 아무튼 뭔가가 더 있겠지 싶어서 아스트리드는 책을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고 다른 책들을 찾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미테리엔 영애, 혹시 찾으시는 책이 없으신가요?”
아까 만났던 사서였다. 갈색 머리가 인상적인, 어딘가 서글서글한 인상이…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한 사서여서 아스트리드는 잠시간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 아니. 아니에요. 실례했어요.”
습관적으로 가슴팍 앞섶을 누르며 가볍게 목례를 하고서, 아스트리드는 마침 잘됐다 싶어 사서에게 물었다.
“소환에 관련된 책을 찾고 있는데…”
그렇게 사서에게 책을 여러 권 더 추천받았다. 제국이 건국되기 전에 만들어진 책들을 위주로 추천을 받았고, 그 책들을 여러 권 가지고 와서 책상에 올려놓고 먼저 한 권을 펼쳤다.
「일반적인 원소 마법과 다르게 소환 마법은 역오망성(Reverse Pentagram)을 사용한다. 이것으로 소환마법의 근원은 악마의 힘을 빌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소수의 허가받은 인원을 제외한 신민에게 이에 대한 연구를 금지한 황제 폐하의 혜안을 찬양할지어다.」
“오…”
이것도 건국 이후에 출간된 서적인 모양이지만, 제법 뭔가 그럴 듯이 한 말이었다.
하지만 어떠랴, 어차피 원하는 걸 알아낼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그리고 적어도 이 책은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다만 사용해도 문제가 없을 소환 마법은 몇 대중에 허가되었으니 그에 대한 내용을 아래에 서술한다.」
-소환 마법의 기초.
-고양이 소환 마법.
-박쥐 소환 마법.
-…
-…
-…
“…이게 다야?”
고양이를 소환해서 뭘 하라고.
고양이 소환술이 있으면 쥐 소환술도 있어야지, 쥐는 왜 또 박쥐인 거야.
게다가 이곳에 있는 소환은 그저, 근처에 있는 존재를 자기 앞으로 데려오는 것뿐이라서 애초에 아스트리드처럼 아예 다른 세상에 있는 존재를 데려오는 것과는 아예 그 차원이 달랐다.
‘큰일이네. 이게 전부라면 낭패인데.’
아스트리드는 서서히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
같은 무렵이었다.
부드러운 승차감을 자랑하는 황실 마차가 대로를 달려 마침내 당도한 곳은 미테리엔 대공 수도 자택 앞이었다.
“어서오십시오, 전하.”
덩치가 큰, 마치 곰을 방불케 하는 남자가 저택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와 깊이 부복했다. 황실의 적통이며 차기 황제가 확실한 레오폴트 폰 아인트하펜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다행히 안에서 뒹굴거리며 누나를 기다리고 있던 아슈레이가 바로 달려 나와 그를 영접했다.
“아스트리드는?”
“누님은 아직 귀가 전입니다.”
“흠. 먼저 귀가한다고 나간 지 한참인데.”
‘무슨 일이 있나?’
레오폴트는 잠시, 아스트리드에게 뭔가 변고가 생겼을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무얼 상상해봐도 아스트리드에게 물리적인 위해가 가해졌을 가능성에 대해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아스트리드를 쓰러뜨리고자 한다면 로열 가드가 동원되어야 할 판이다. 적어도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으니, 별일은 없을 터.
“…마침 잘됐군.”
당사자가 없는 지금이, 레오폴트는 마침 잘됐다 싶었다.
“아슈레이.”
일부러 이름으로 불렀다. 어젯밤, 아스트리드를 부축할 때 그녀가 웅얼거렸던 그 이름, 아슈레이.
혹시나 몰라서 다시 한번 불렀다.
“예, 전하.”
“아슈레이 미테리엔, 맞나?”
“제 이름입니다만, 뭔가 문제가 있으십니까?”
부복하고 있던 아슈레이는 의아한 얼굴로 레오폴트를 올려다보았다. 황제의 존안을 함부로 올려다보는 것도 아니니 이 정도는 딱히 예의에 어긋나는 것도 아닐 터, 레오폴트도 굳이 문제삼지는 않았다.
“아니, 아니다. 들어가지. 마침 본인이 없다니 잘됐어.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으니 말이야.”
“아, 예. 그러시지요. 자, 응접실은 준비가 됐나?”
아슈레이가 일어서며 뒤에서 마찬가지로 부복하고 있던 시종들에게 묻자, 시종장이 후다닥 달려와 아슈레이에게 귓속말로 준비는 다 되었다고 속삭였다.
“그냥 말하면 될 걸 무슨 속삭임을 하고 그러나. 알았네. 그리로 가지. 전하, 이쪽입니다.”
아슈레이가 직접 나서서 걸음을 옮기자, 시종들도 일제히 비켜서며 길을 텄다.
“마침 잘 됐다고 하시면, 누님이 들으면 곤란한 걸 물어보시려는 것 같습니다.”
응접실의 테이블은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다.
실용성보다는 어쨌든 장식품의 역할에 좀 더 충실하게 만들어졌다 보니, 거기에 앉아있는 아슈레이의 덩치에 비해서 의자가 터무니없이 작아 보여 금방이라도 내려앉는 게 아닌가 싶어질 정도였다.
“그렇지. 본인에게는 차마 물을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그렇습니까? 하지만 본인에게 물을 수 없는 말이라도,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묻는 걸 실례가 아닐까요?”
“그건 그렇다만.”
아슈레이로서도 지금 레오폴트의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
정곡을 찌른다고 해 본 말이었는데 선선히 레오폴트가 인정할 줄은 몰랐다.
“절대 좋은 일이 아니지. 앞에서 하지 못 할 말은 뒤에서도 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아스트리드에게 직접 묻지 못할 말을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묻는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렇습니까? 그러면 왜…”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
아슈레이는 입을 다물었다.
레오폴트는 그런 아슈레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트리드가, 반년 정도 전에 매우 크게 아팠었다고 들었다.”
“예.”
“그리고 한 달을 깨어나지 못했다고 했고.”
“맞습니다.”
“그러면, 내 물어보지.”
아슈레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뭘 물어보려는 걸까.
“아스트리드가… 혹시.”
“예.”
“머리를 크게 다쳤는가?”
아슈레이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정답이었다. 계단에서 크게 굴러떨어지고, 머리에 큰 충격을 받은 아스트리드는 그 이후 한 달이나 깨어나지 못했었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는 마치 딴사람이 된 것처럼-
“근래 들어서 아스트리드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말이야.”
“그건…”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아스트리드의 기억상실은 대공가 사람들이 쉬쉬하는 비밀이었다.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인가.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이건 역시, 아무리 동생이라고는 하나 제가 대답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인 것 같군.”
레오폴트는 그런 아슈레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역시 그랬던 건가.
머리를 크게 다쳤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 미테리엔 영애 드십니다.
이 대화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공모전 본선 진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