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의심과 연심 (2)
“아스트리드, 늦었군.”
“언제 오신다는 말씀은 안 하셨지 않나요.”
“어딜 다녀오는 건가?”
“황립 도서관에 다녀왔지요.”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에 아스트리드는 소환마법에 대한 책을 다섯 권 정도 빌려왔다. 그 책을 가지고서 마차를 불러서 집으로 막 돌아온 차에, 레오폴트가 왔고 아슈레이와 독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황립 도서관에? 네가?”
허가를 얻긴 했으나 이렇게 빨리 다녀올 줄은 몰랐다.
레오폴트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 아스트리드가 입술을 비죽였다.
“저도 책 정도는 읽는다고요. 무슨… 사람을 대체 무엇으로 보시는 건지.”
“아슈레이, 어떻게 생각하나?”
“…그, 사람은 성인이 되면 좀 바뀌고 그러잖습니까.”
아슈레이도 역시 믿기 어려웠다. 아스트리드가 도서관에 다녀왔다니, 차마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 아스트리드가 도서관이라니.
“아무튼, 무슨 일이신가요.”
“음… 아슈레이,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나?”
“알겠습니다. 전하, 저녁은 육류로 준비하겠습니다만, 괜찮으신지요.”
“그리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아슈레이가 깊이 목례를 하고서 응접실을 나섰다. 응접실의 테이블 의자에 마치 주인인 듯 앉아서 차를 홀짝이는 레오폴트와 그런 레오폴트를 보면서 멀뚱히 서 있는 아스트리드. 마치 주인과 손님이 뒤바뀐 것 같기도 한 모습이기도 했다.
“아스트리드, 앉지.”
“그러죠.”
불편한 건 없다.
없다. 없어야 한다. 없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에 레오폴트가 조금 껄끄럽기도 했다.
‘내가 굳이 피할 필요는 없지.’
그러고 보니 어쩐 일로 진짜 아스트리드가 조용했다.
잔다더니, 정말 자는 모양이었다.
진짜 아스트리드가 깨어있었다면, 지금 이렇게 레오폴트와 독대하게 되었다면…
【…앗, 앗?! 저, 전하아아아?!】
‘너도 양반은 못되겠구나.’
【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죠, 당신?!】
잔다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또 기가 막히게 깨어났다. 또 머릿속이 지끈지끈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아스트리드는 당장 바꾸라며 난리를 치고 있는 진짜 아스트리드에게, 시간제한도 있는데 좀 더 결정적인 순간에 바꿔주겠노라며 마치 세 살 아이 대하듯 어르고 달래며 응접실 테이블로 가 앉았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니. 나도 조금 전에 왔다.”
아스트리드는 두 손을 곱게 포개어 허벅지에 올려놓고서 레오폴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생기기는 진짜 잘생기긴 했네.’
【당연하죠! 무슨 당연한 말을 몇 번씩이나 하는 건가요, 당신은!】
“그러셨군요. 그러고 보니, 제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었지요.”
“그랬지. 아스트리드.”
“네?”
레오폴트의 푸른 눈동자가 아스트리드를 향했다.
그 속에 비친 감정을, 아스트리드는 읽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의미일까. 불러놓고도 딱히 말이 없다. 한참을 그렇게 조용히 있었다. 레오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긴 시간을 견디다가, 마침내 아스트리드가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던 즈음이었다.
“많이 아팠다고 들었다.”
“어…”
맥락으로 보건대, 분명 한 달이나 잠들어 있었다던 그때를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아스트리드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 한 달, 한 달을 잠들어 있었던 건 본인이 아니다. 머릿속에서 떠들어대고 있는 진짜 아스트리드다.
“병문안을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
【역시, 역시 전하께서는 저를…!】
“뒤늦게 알게 되어서, 미안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 뒤로, 네가 많이 변한 것 같더군.”
“네?”
변했다니, 무엇이.
뭐가 변했다는 말일까.
“네 그 포악한 성정, 주변 사람들의 가슴을 난도질하는 말의 비수. 그것들이 지금의 네게서는 싹 사라져 있었지.”
【포, 포악…?】
‘자, 잠깐 있어 봐.’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상처를 주려고 애를 쓰는 네 모습이, 나는 그 모습이 참으로 싫었었다. 그래서 네게 병문안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그렇게 하질 못했지.”
【지금, 지금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저, 전하. 잠시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아카데미에서 분대장 임무를 수행하는 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군. 예전의 네가 아닌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을 잠시 했었다.”
“그… 러셨나요.”
레오폴트는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아스트리드가 맛이 없다고 질색하는 그 차를, 레오폴트는 잘만 마시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네가, 크게 아픈 뒤로 더 나아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지.”
진짜 아스트리드의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레오폴트가 말하는 과거의 모습이 진짜 아스트리드의 모습이고, 아카데미에서 변했다고 말하는 모습이 가짜 아스트리드다.
즉, 지금 레오폴트는 진짜 아스트리드가 아닌 가짜 아스트리드의 모습이 더 좋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었다.
【지금…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아냐, 뭔가 착오가 있을 거라고. 좀 더 들어보자. 응?’
뭔가, 진짜 아스트리드가 지금 느끼고 있는 그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끝없는, 바닥 모를 저 깊은 곳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인생의 등불이 눈앞에서 꺼져버린 것 같은 기분. 어둠 속에서 의지하며 걸어가던 길잡이가 마침내 안내한 곳이 끝도 없는 낭떠러지 앞인 것 같은 기분.
그런 어둡고 탁한, 습하고 축축한 그런 기분.
“그랬지만…”
레오폴트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무도회에서의, 유레이드 영애를 비롯한 조르지엔 영애, 오트리아 영애를 대하는 너의 행동은, 과거의 너와 전혀 다르지 않았지. 아프기 전의 너, 아카데미에서의 너, 무도회에서의 너. 다 다른 사람인 것 같았지. 게다가 어젯밤 너는 분명히 내게 말했다.”
달그락.
소서 위에 찻잔이 놓였다.
레오폴트의 푸르른 눈동자가 아스트리드를 직시하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사적인 흥미조차 없이, 그저 진실을 알고 싶다는 것처럼 가라앉은 눈동자.
아스트리드는 그런 레오폴트를 마주 보지 못한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너는 말했지. 너희들 때문에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느냐고. 자, 아스트리드. 말해봐라. 너희들이라는 말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애초에 술에 취해서 무슨 말을 했는지, 그것들도 단편적으로 떠오를 뿐이지 저런 말을 했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너는 마치 사람이 휙휙 바뀌는 것 같았다. 나는 알고 싶다. 네가 아팠던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떤 일로 인해 그렇게 변하게 된 것인지.”
레오폴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맞은 편에 앉아있는 아스트리드의 앞으로 다가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서 아스트리드의 손을 잡았다.
“아직 약혼녀인 네게 병문안조차 가지 않은 내게,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렇게 캐묻는 것이 경우에 맞지 않음을 안다. 하지만 아스트리드… 아니, 아스티. 알려다오. 네게 일어났던 일을. 나는, 알고 싶다.”
‘…그냥 사실대로 말하자.’
【…그래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네요.】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떤 핑계를 댄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레오폴트에게 그 말이 먹힐 리가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휙휙 바뀌곤 하는 아스트리드를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실은, 저는.”
“그래. 알려다오.”
의자에 앉은 아스트리드보다 낮아진 시선으로, 레오폴트가 아스트리드를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이 제법 따스하게 느껴져, 아스트리드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스트리드가 아-“
읍.
【얘기하다 말고 뭘 하시는 건가요.】
‘아니,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
“아스트리드가 아닙-“
읍.
말이 나오질 않는다.
아스트리드가 아니라, 그녀의 몸에 깃든 다른 영혼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 말이 나오려고 하자마자 목이 콱 잠겨버리며 말이 나오질 않았다.
“목이 안 좋은가.”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사실은 제가 아스트리드가 아닙읍.”
또다.
그 말만 하려고 하면 목이 콱 잠겨버리고 만다.
【어쩌면, 그 말을 할 수 없는 금제가 걸려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금제…?’
【일종의 금지어… 야만족의 주술에, 그런 게 있다고 들은 적이 있긴 한데.】
‘그런 게 대체 왜… 그럼 일단…’
일단, 무리해서 말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그냥, 술주정이에요. 술주정.”
“말하고 싶지 않은 게로군. 알았다.”
레오폴트가 천천히 일어섰다.
“이후에는 자연스레 알게 될 테지. 아무튼, 알았다.”
“…….”
사실을 말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스트리드는 또다시, 입술을 꾹 깨물었다.
*
다소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방문이었지만 다행인 점은, 그래도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방문했다는 점이었다.
【저 백수 자식은 어디 놀러도 안 나가나요!? 단둘만의 식사가 될 줄 알았는데!】
‘니 동생이야… 정신 좀 차려…’
불과 조금 전까지, 레오폴트에게서 본의 아니게 험한 말을 들었으면서도 그새 또 싹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레오폴트 일직선이다.
…어쩐지, 아스트리드의 목소리에서 억지로 활력을 짜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절로 머리가 지끈지끈 골치가 아파졌다.
아스트리드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이 부담스러운 자리에 더욱더 혼란을 가중시키는 지금의 이 상황을 어떻게든 무마해보고자 무던 애를 썼다.
“아이고, 이렇게 식사를 같이하는 건 진짜 오랜만입니다. 레오폴트 전하.”
“그래, 오랜만이군.”
“마지막으로 뵌 게 10년도 더 전이니까 말입니다. 아까는 미처 못한 말씀입니다만, 정말 많이 변하셨습니다.”
아슈레이가 크게 웃었다.
여자인 아스트리드의 키가 가장 작고, 그다음으로 큰 게 레오폴트, 그리고 레오폴트보다도 조금 더 키가 큰 아슈레이.
하지만 셋 다 작은 키는 아니어서, 셋이 모여앉은 테이블은 8인용 테이블임에도 불구하고 자리가 제법 차 보일 정도였다.
‘넌 대체 동생한테 왜 그러냐?’
【당연한 거 아닌가요! 전하와 단둘이서 오붓한 식사를 할 줄 알았던 제 기대가 박살 났는데, 화가 안 나겠어요?】
‘그거야 나중에 질리도록 할 텐데, 동생도 좀 아껴줘라…’
대체 아슈레이는 어떤 대접을 받았던 건가 싶었다.
아무리 피가 안 섞였다고는 해도 그래도 동생인데 좀 아껴주고 보살펴주면 안 되나. 그게 누나 아닌가 싶었다.
“전하께서는 갈수록 잘 생겨지십니다.”
“칭찬 고맙다. 아슈레이…”
레오폴트가 아슈레이를 쓱 훑어보았다. 빈말로도 미남이라고 말하기는 좀 어렵겠고, 얼굴을 가로지르는 자상이 제법 인상적이라 미남이라기보다는 쾌남에 가까운 모습.
“…너는 듬직한 게, 불곰 같군.”
【저놈 저거 분명 지 혼자 좋은 거 먹은 게 분명한데…】
‘니 동생이라니까!?’
머릿속으로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아스트리드와 그런 그녀를 웃음기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는 아슈레이, 그리고 그런 아슈레이를 쳐다보고 있는 레오폴트.
기묘한 분위기였다.
“아슈레이, 너 자꾸 샐러드만 남길 거야?”
“에이, 누님 드시라고 일부러 남긴 거 아니겠습니까?”
넉살 좋게 아스트리드의 타박을 웃어넘기는 아슈레이. 그리고서는 아스트리드가 포크를 움직여 아슈레이의 접시에 있던 샐러드를 가져왔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누님.”
제 접시에 있던 고기를 덜어 아슈레이의 접시에 옮겨주는 아스트리드.
그리고, 그런 모습을 레오폴트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저걸, 레오폴트 본인에게만 했던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면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표지에 타이포를 넣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