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의심과 연심 (3)
원래 귀족이란 그런 것이다.
저녁 식사를 끝냈고, 이제는 딱히 서로 볼 일이 없는데도 공연히 차를 마신다거나 간단한 다과를 먹는다거나, 분명히 아까 했던 것 같은 이야기지만 그걸 또 하면, 분명히 아까 들은 것 같은 이야기지만 거기에 또 대답하면서 시간을 끄는 것.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실례가 아니겠다 싶은 시간까지 버티고 버티다가 자, 이제 정말 더 있으면 실례가 되겠다 싶은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나는 이만 들어가도록 하지.”
“주무시고 가셔도 되는데.”
아스트리드는 일어서는 레오폴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크 드레스가 바닥에서 쓸리는 소리가 따라왔다.
레오폴트의 시선이 잠시간 그런 아스트리드를 향했다. 정확히는 아스트리드가 곱게 모아잡은 두 손을 향했다. 하얗다. 하얗고 긴 손가락. 그 손가락을 힘주어 움켜쥔 주먹. 그 주먹.
불현듯 왼쪽 뺨이 다시금 아파오는 것 같아 레오폴트는 손을 들어 뺨을 매만졌다.
“전하, 무슨 일이신가요? 주무시고 가실 생각이신가요?”
“아니, 아니다. 잠은 집에서 자야지.”
‘저게, 왜 눈치를 주고 난리야. 지가 술먹여서 그렇게 된 걸.’
【걱정하셔서 하는 말이잖아요.】
‘걱정은 무슨…’
레오폴트가 연회실의 문으로 다가가면 소리없이 문이 열렸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조용히 연 문을 나서서 복도를 지나, 2층 중앙 플로어의 양쪽으로 감싸듯이 뻗어내린 계단을 돌아내려가, 마침내 저택의 문 앞에 선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전하. 정원까지의 배웅은 여기 있는 저희 누이가 대신 할 겁니다.”
“그래, 아슈레이. 오늘 만나서 반가웠다.”
“저도 그랬습니다.”
하핫, 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아슈레이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레오폴트는 그런 아슈레이의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몸을 펴자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년에는 아카데미에서 만나겠군. 선배와 후배로.”
“그러게 말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여기 있는 저희 철없는 누이 잘 좀 부탁드립니다.”
“그래. 그리하지.”
잠깐은 망설일 법도 한데 그렇지는 않았다. 어차피 서로 파혼할 이유만 찾고 있고, 또 서로에게 합당한 배우자를 찾아주기로 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레오폴트도 굳이 이런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낼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그럼, 아스트리드. 가지.”
“네, 전하.”
아슈레이의 키보다도 훨씬 큰 정문이 활짝 열렸다.
어느샌가 보름달이었다.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택보다도 훨씬 넓은 정원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넓은 대로가 있고, 양 옆에는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다듬은 정원수가 한껏 모양을 뽐내며 서있었다.
밤이라서 물을 잠근 분수에서는 낮 동안 물을 뿜느라 지친 잉어 조각상이 쉬고 있고, 반대편 분수 역시도 그랬다.
자갈로 마감한 정원대로를 두 사람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딱히 대화도 없이, 그냥 걷기만 했다. 마차가 기다리고 있을 저택 정문까지는 걸어서 5분 가량. 별로 긴 거리는 아니지만 이렇게 아무 대화없이 걷기에는 또 짧은 거리는 아니기도 했다.
“아스티.”
“네?”
아스트리드가 아니라, 아스티.
갑작스러운 레오폴트의 목소리에 아스트리드가 움찔 놀랐다. 지금까지는 내내 아스트리드라고 불렀는데, 이렇게 아스티라고 부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아스티가 본인의 애칭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를 아스티라고 부른 사람은 그 애칭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까.
“많이 아팠었나?”
“음, 모르겠네요. 저는 그냥 잠들어 있었던 것이니까요.”
“그렇겠군. 내가 이상한 질문을 했어. 그러면, 질문을 바꿔볼까.”
걸음이 멈췄다.
레오폴트가 살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휘영청 둥근 달이 밤하늘에 떠있고, 그 사이에 검은 구름이 한자락 걸쳐있었다.
바람조차 없어 구름도 움직이지 않는 평온하고도 고요한 밤.
“…아스티, 아스티. 이렇게 네 애칭을 불러보는 게 몇년만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스티라고 불러야 맞는 것 같아.”
“전하께서 편하신대로 하시지요.”
어차피 둘 다 본인의 이름이지만 동시에 본인의 이름이 아니기도 했다.
【전하께서 제 아명을…】
‘애칭이 아니라 아명이야?’
【그거나 그거나죠.】
‘다르다고…’
아니, 진짜 얘는 무력 외에는 뭐 아무것도 없는 건가. 어쩐지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아서 아스트리드는 미간이 저도 모르게 찡그려졌다.
“아스티라 부르면 싫은가? 표정이 안좋군.”
“아니,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하고자 하시는대로.”
“그래. 음…”
레오폴트와 아스트리드 사이로 스산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일과를 마칠 무렵 모두 깨끗하게 쓸어낸 정원대로 위에, 그 사이 떨어진 나뭇잎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뒹굴었다.
“…어젯 밤 말이지.”
“…….”
어젯 밤이라면 그 얘기일 것이다. 아스트리드가 좀 추한 꼴을 보였던 그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이리라.
“네 얼굴을 코앞에서 보게 됐었다.”
“그러셨군요.”
기억이 난다. 그 장면은 이제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아스트리드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레오폴트의 목을 감싸안아 있는 힘껏 끌어당겼던, 그게 똑똑히 기억이 난다.
“그래서… 조금, 정정을 해야할 것 같아서 말이다.”
“무엇을 말인가요.”
“아카데미에서, 그 때처럼 네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본 적이 있었지. 기억하나?”
아케밀라에게 딱 들켰었던 그 때를 말하는 것이리라.
아카데미 숙소 뒤켠에 있는 벤치에 딱 붙어 앉아서 서로 얼굴을 들여다봐도 딱히 두근거림이나 그런 게 느껴지지 않는다며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던 그 날의 일.
“기억합니다.”
“그 때의 나는 네게 조금도 두근거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즉, 네게 아무런 이성으로의 매력이나 관심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말이지.”
【그럴 리가 없어요!】
‘조, 조용히 좀 해 봐!’
아스트리드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난장판을 알 리 없는 레오폴트는 느릿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입 좀 닥쳐봐 진짜! 안들리잖아!’
【……】
닥치라니까 닥쳤네. 아스트리드는 이제야 조용해진 머릿속에 안도하며 레오폴트를 쳐다보았다.
레오폴트 역시도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젯 밤. 어젯 밤에… 그렇게 가까이서 바라본 너는, 참으로 아름답더군.”
【당연한 일이죠-!】
‘야!’
“두근거렸다.”
“아.”
레오폴트의 말에 아스트리드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야트막한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이게, 이러면 안되는 건데. 그러면 안되는 건데. 이게 서로 약속이 걸려있어서, 레오폴트가 그녀를 보고 두근거리면 안되는 건데.
“네 얼굴을 그렇게 가까이서 본 게 처음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어젯밤에는 네 잠든 얼굴을 보면서 내가 두근거리더군.”
“그, 그렇군요.”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아니, 곤란하다. 아스트리드는 생각했다. 곤란하다. 이러면 안되는 게 아닌가. 이러다가는, 곤란한데. 하지만 정작 지금 그녀의 가슴도 어째서인지 몰라도 약간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 알 수 없다. 모르겠다. 하지만 두근거린다. 왜? 어째서?
“그, 전-“
【하, 하지만 저희의 약속은 예정대로… 어?】
순간 눈앞이 텔레비전 채널 바뀌듯이 변했다. 마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것 같은 이질감이 확 느껴졌다.
“전하.”
싸늘한 목소리가 안그래도 스산한 정원을 휩싸고 돌았다.
【야, 지, 지금 뭘 하려고…?! 그보다, 어떻게 바꾼 거야!?】
‘가만히 있어봐요. 지금 전하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표정을 지어야 한다고요.’
한껏 들뜬 아스트리드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망했다.
아스트리드는 그 생각 뿐이었다.
지금 여기서, 아스트리드가 자기 성질을 좀 죽이고 더 잘할테니 약혼을 유지하자라고 한 마디만 하면 레오폴트는 그러자고 할 기세였다.
그러면 안된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웨딩 로드를 걷는 것은 가짜 아스트리드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나서 하기로 했었는데 그게 모조리 물거품이 될 위기였다.
“아스티, 이게 무슨 감정일까.”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전하. 확실한 것은 하나 있겠지요.”
“확실한 것? 무엇인가, 그게.”
아스트리드의 목소리는 서리가 내릴 듯이 차가웠다.
가짜 아스트리드의 목소리나 말투는 비교적 온화하고 다정한 면이 느껴지는 목소리였으나, 진짜 아스트리드는 그런 기색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내가 동의한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바뀐 건데?! 왜!?】
‘입 좀 닥쳐봐요.’
“전하, 전하께서는 아직도 본인의 감정을 모르시나요.”
“그게 무슨 소리지, 아스트리드?”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어서, 그야말로 서서히 연심에 빠져드는 남자의 그것이었던 레오폴트의 눈매가 조금씩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확실한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내 감정에 대해 한 말이 아니었나?"
아스티가 아니라 아스트리드로 도로 돌아간 호칭.
아스트리드가 이쯤에서 말을 다시 바꾸던지 수습을 해야 할 터였지만, 아스트리드는 그럴 기색이 없었다.
아스트리드는 그런 레오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당연한 사실을 말한다는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단언했다.
“본인조차 모르는 감정을 제가 알 리 없지요. 무릇 사내란 본인의 감정을 직시하고, 그 감정에 따라 행함이 옳지 않겠습니까.”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저건 분명 연심이에요! 그러니 이제 프로포즈를 하실 거라고요!’
【너 바보냐?!】
“…흠.”
【조졌네.】
솔직히,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냥 이 상황은 망했다. 그냥 그 약속 파기하고, 자기도 변할테니 우리 더 잘해보자고 말만 했어도 다 해결되는 문제였는데.
아스트리드는 지금 레오폴트에게 자기 감정도 남에게 물어봐야 하는 멍청이라고 모욕을 한 거나 다르지 않았다.
그게 알고 한 것이건 모르고 한 것이건 어쨌든 레오폴트로서는 분노해도 정당방위였다.
아스트리드는 진짜 아스트리드가 그렇게 애타는 연심을 품고도 왜 레오폴트와 가까워지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아스트리드, 너는 이상해졌군. 마치… 예전의 너와 똑같아보여.”
레오폴트는 아스트리드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돌아선 모습 그대로, 레오폴트는 말했다.
“…아카데미에서 만나도록 하지.”
아카데미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찾아오지도 말라는 축객령.
그 말만을 남긴 채 정원을 나선 레오폴트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더 이상은 아스트리드의 배웅이 필요치 않다는 것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황망하게 정원에 서 있는 아스트리드.
아스트리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진짜 아스트리드에게 말했다.
【…너 좀 모자라는 거 아니냐?】
‘아니, 뭐죠 대체? 프로포즈가 나올 흐름 아니었나요?! 가문의 무장들에게 배운대로 했으니 확실했는데…?!’’
아스트리드는 안심했다.
지금처럼 갑자기 의식이 바뀌어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불시에 바뀐다 하더라도 진짜 아스트리드가 레오폴트를 제대로 공략해내는 사태는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것임을 아스트리드는 확신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바보가 바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