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죠
【결혼부터 하고 돌아가는 거,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만해라, 진짜.’
아스트리드는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도 심경이 복잡하다 못해 처참했다.
지금까지 황립 도서관의 소환 마법과 공간 마법 서가를 이 잡듯이 뒤져봐도 흔적은커녕 실마리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기록물을 뒤져봐야 할 차례인가…’
하다못해 유사한 사례가 기록된 게 있을까. 그것까지 뒤져봐야 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도 그럴 게 기록물이라는 게, 아무래도 제국이 건국되고 나서 계속 쌓여온 것들이다 보니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그걸 뒤져보기 전에 소환 마법이나 공간 마법에서 뭔가 실마리를 건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실패로 돌아간 지금, 꼼짝없이 기록물을 뒤져봐야 할 시점이었다.
【하지만 그 기록물에도 남아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그건 그래…’
그걸 다 뒤져봤을 때도 없다면, 그건 정말 낭패다.
【차라리 북부를 갈 걸 그랬네요. 주술사 몇 놈 잡아다가 팔다리 좀 끊어놓으면 알아서 술술 불 텐데.】
‘…넌 대체 말투가 왜 그러냐?’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은 말이었다. 진짜 아스트리드는 말할 때 보면 그 단어 하나하나가 대공가의 영애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좋게 말해서 시정잡배, 나쁘게 말하면 양아치.
그런 수준의 단어만 골라골라 말하는데, 그나마 귀족들을 상대할 때는 나름 신경을 쓰는지 단어는 괜찮아졌지만 그 대신 돌려 말할 줄을 모르게 됐다.
직설적이고 저돌적인, 공격성을 전혀 감추지 않는 그 말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상처를 받거나 아스트리드에게 적대감을 심어줄 정도였다.
【…저도 제 말투가 이상하다는 건 알아요.】
덜컹.
돌부리를 타고넘는지 마차가 약간 흔들렸다.
‘그래? 근데 왜 그래.’
【저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고풍스럽고 우아하고 얌전하고 조신한 아가씨 말투를 써야 한다는 걸 저도 잘 알죠. 근데 그게 안 되는 걸 어떡해요. 그냥 배운 게 이런 건데.】
‘…끙.’
아스트리드만 탓할 게 아니었다.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아버지인 볼프강이 잘못한 것이다. 정서가 함양되고 올바른 가치관이 형성되어야 할 유년기에 제 몸보다 큰 무기를 들고 사람 목을 자르고 다닌 데다, 같이 다닌 동료들이라고는 거친 입담을 자랑하는 군인들이었으니 아스트리드가 귀족적인 모습을 어디서 배울까.
이만큼이라도 하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래도 괜찮았죠. 하루하루 전하에게서 날아오는 편지를 읽는 게 낙이었으니까.】
‘편지?’
【모르셨나 보네요. 다른 귀족들은 전부 저를 피해 다녔지만 전하만은 제게 수시로 편지를 보내주셨어요. 그 편지로 인해서 저는 전장에서도 버틸 힘을 얻었죠.】
뭐지.
아스트리드는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 그 편지가 지금 어디에 있는데?’
【북부 저택의 제 방에 있죠.】
그런 건 없었다.
아스트리드가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일기장까지 다 찾아내서 읽었는데 그런 편지를 못 찾았을 리가 없다.
확실한 건, 아스트리드가 북부 저택에 있는 동안에는 그런 편지를 찾아내지 못했다.
【아무튼 전하는 다정한 분이세요.】
기분이 묘해졌다.
진짜 아스트리드가 이렇게까지 레오폴트에게 강한 연심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토록 무거운 애정일 줄은 몰랐다. 그러면 이 정도면 정말 애정이나 사랑 수준을 넘어서 어쩌면 지금까지 전쟁터에서 그녀를 버티게 해 준 원동력, 그런 기둥에 가깝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 진짜 아스트리드를 그대로 둔다면…
레오폴트의 마음을 얻어낼 수 있을까.
회의적이었다. 그럴 가능성이 너무 낮았다. 만약에 아스트리드가 거의 완벽에 가깝게 레오폴트의 마음을 얻어놓고서 그러고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진짜 아스트리드가 혼자 남으면 그마저도 제대로 못 해내고 파혼당하지 않을까.
이게 가능성이 없는 얘기가 아니라는 게 더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내가 양보해서 결혼식을 먼저 하고 나서 빼도 박도 못하게 기정사실로 만들어놓고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
“으앗?!”
【까, 깜짝이야! 무슨 일인가요, 당신!】
‘아, 아냐… 아냐, 아무것도.’
무섭다.
의식의 흐름이 무섭다.
지금 자기가 한 생각에 자기가 놀랐다.
빨리 돌아가야겠다.
냉정하게 말하면 진짜 아스트리드가 어떻게 하던 그녀로서는 알 바 아니다.
*
“누님, 이제 오십니까?”
“어머, 마중이라니. 어쩐 일이니.”
마차에서 내려 정원대로를 통해 저택으로 돌아오니 아슈레이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제 2주 넘게 수도 생활을 하더니 제법 때 빼고 광도 내서 사람 모습처럼은 보였다.
“손님이 와 계시는데 말입니다.”
“손님?”
올 손님이 없는데.
【전하 아닐까요?!】
‘설마 그렇겠어?’
아마도 아닐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아슈레이는 능글능글하게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아, 레오폴트 전하는 아닙니다.”
【저놈 저거 뒤통수 한 대 때려주세요.】
“…누가 뭐래니.”
“기대하실까 봐.”
머릿속의 주문을 애써 무시하며, 아스트리드는 아슈레이에게 물었다.
한편으로는 진짜 궁금했다. 손님이라니, 아스트리드를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시끄러워. 누군데?”
“그, 아.”
이놈 이거 설마.
아스트리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설마, 잊어버렸니?”
“어, 그게. 이름이 좀 어렵더라고요? 머리가 벌꿀색이라는 거는 기억나는데.”
“엥.”
【엥?】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스트리드와 진짜 아스트리드는 동시에 얼빠진 소리를 냈다.
“어쩐 일이신가요.”
“한참 기다렸어요.”
“미리 기별하지 않은 아케밀라 양 잘못이죠.”
“어머, 그런가요?”
응접실 공기는 싸늘하다 못해 차가웠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아스트리드와 아케밀라는 빈말로도 좋은 분위기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아무튼, 요즘 황립 도서관을 자주 드나드신다고 들었어요.”
“대공 영애의 뒷조사는 좋지 않은데, 예의를 모르시는군요. 평민이셔서 그런가요?”
“어머나.”
앞에 놓인 연갈색의 차를 한입 머금으며, 아케밀라는 여유있는 미소를 지었다.
“평민, 평민이라 하시는데. 저희도 곧 백작 작위를 받는다는 걸 모르시진 않을 텐데요.”
‘사실이야?’
【그,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네요…】
도움이 안 되네.
하지만 이 제국이 건국되는 데에 군자금을 그렇게나 많이 댔는데 여태 평민이고 또 앞으로도 평민이라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곧 백작이 된다고 하는 것도 아스트리드는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자기가 그렇다는데.
여기서 당장 확인을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니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뒷조사 같은 걸 한 건 아니에요. 이미 이 페르상트에 소문이 파다한데 정작 본인은 모르시나 보군요.”
“무슨 소문 말씀이신가요?”
“그야, 미테리엔 영애께서 황립 도서관에 드나든다는 소문이죠. 게다가 마법에 대한 자료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니신다는 소문까지.”
말도 안 된다.
도서관에 드나드는 거야, 그 정도야 누군가가 볼 수도 있는 일이니 소문이 날 수 있다지만 마법에 대한 자료를 찾는다는 소문이 나는 건 불가능했다.
【이 건방진 평민 나부랭이가… 잠깐 바꿔봐요.】
‘아냐… 네가 나서면 오히려 악화될 뿐이야. 좀 진정해. 좀 얌전하게, 영애답게 대응해야 하니까 좀 진정하라고.’
“레오폴트 전하의 애정을 잃을까 봐 마법의 힘이라도 빌리고자 하시는 게 아닌가 하고.”
‘바꿔줄게. 힘 빼면 되지?’
【…시끄러워요. 당신이 해결하세요.】
“…아케밀라 양, 지금 저한테 시비를 걸러 온 건 아니실 텐데요.”
“물론 아니에요. 당연히 아니죠.”
“그런데 자꾸 저를, 이렇게 도발하셔서 좋을 게 없지 않겠어요?”
아케밀라가 방긋방긋 웃음을 띠었다.
하지만 어딘가 꿍꿍이가 있어서 막상 보기에는 그리 달갑지 않은 그런 미소.
아스트리드는 그런 아케밀라를 보면서 슬슬 짜증이 치밀기 시작했다.
“도발이라니요. 저는 그저 거래를 제안하러 왔을 뿐인걸요.”
“거래를 제안하러 온 분의 태도가 영 아니네요. 대상단의 따님께서, 거래 상대방의 심기를 이렇게 건드려서 좋을 게 있겠어요?”
“어머. 하지만 저는 미테리엔 영애의 심기를 거스른 적이 없는걸요. 저도 들은 소문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뿐이고.”
아케밀라가 했던 말들은 전부 ‘소문’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거에 대해 화를 내면 아스트리드가 모양이 이상해진다. 아케밀라는 들은 소문에 대해서 말했을 뿐이고, 그에 대해서 의견을 말하지는 않았음에도 아스트리드는 아케밀라에게 화를 내는 옹졸한 도량의 영애가 되는 것.
그렇다고 반응을 하지 않자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듣고도 대응하지 않는 허울뿐인 종이호랑이가 되어버리는 것.
“사실 저는 미테리엔 영애의 힘이 되고자 온 거에요.”
“힘이라. 무슨 의미일까요?”
“제안을 하나 할까 해요. 제가 미테리엔 영애에게 도움을 드리는 대신, 미테리엔 영애도 제게 도움을 주시는 거죠.”
또 무슨 꿍꿍이일까.
아스트리드는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말해보세요. 들어보기나 해보죠.”
아케밀라는 여전히 방글방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분명히 아스트리드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근거를 알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리라. 아스트리드는 그 미소가 참으로 보기 싫었다.
“미테리엔 영애의 표정을 봤을 때, 아마 원하는 자료를 찾아내진 못하셨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요.”
그게 사실이니까.
“그게 무엇이건 간에, 제가 저희 유레이드 상단의 정보력을 동원해서 해결해드릴게요.”
소설을 보면, 정작 국가 정보력보다 이런 대상단의 정보력이 훨씬 뛰어났다. 그도 그럴 게 아스트리드가 있었던 현대사회와 달리 이 세계는 정보의 수집이나 전달, 정리, 보존이 훨씬 떨어졌다.
인편에 의지해서 정보를 다듬어야 하는 시대적 배경 상 국가의 정보력보다 국토 곳곳까지 퍼져있는 상단의 정보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닌 시대.
아스트리드는 아케밀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걸 그냥 넘겨주겠다는 말씀은 아니겠죠. 원하는 게 뭔가요?”
“간단해요.”
“그러니까 말해보세요.”
“레오폴트 황태자께, 제가 접근하는 것을 너무 방해하지는 말아주세요. 공정한 경쟁이 되게 해달라는 얘기죠.”
【뭐라는 건가요, 이 정신 나간 년이.】
진짜 아스트리드와 아스트리드가 의견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모처럼.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아니면, 다른 하나의 조건이 있어요. 이걸 선택하셔도 상관없지만요.”
“…말씀하세요.”
“저희가, 미테리엔 영애가 찾으시는 정보를 모두 찾아드릴 테니 황태자비가 되시고 나면 이 제국의 상단을 모두 국영화해주세요.”
아케밀라가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호로록-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이윽고 달칵하고 찻잔이 소서 위에 놓였다.
“저희 유레이드 상단을 제외하고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어버이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