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거절할 수 있는 제안이었군요
【좀 바꿔주세요.】
‘뭐?’
【저 미친년이 하는 소리 못 들었나요? 좀 바꿔주세요.】
‘그, 뭘 어쩌게?’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좀 바꿔줘요. 빨리.】
더 이상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스트리드는, 진짜 아스트리드의 그런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 지금까지도 차가운 목소리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어조부터도 달랐다.
굳이 비유하자면, 당장 눈앞에 있는 상대를 찢어죽이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지는 그런 목소리였다.
*
탁, 탁, 탁, 탁.
아스트리드의 기세가 변했다. 기세가 변한 아스트리드가 탁자 위에서 손가락을 튕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아케밀라는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이봐?”
그리고 순식간에 그 웃음은 사라졌다. 아케밀라는 경어조차 생략된 채, 경어는커녕 반말로 자신을 부르는 아스트리드를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실례다. 실례도 이만저만한 실례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귀족끼리의 대화는 경어를 사용한다.
게다가 아케밀라 본인은 지금 평민이라도 곧 백작 작위를 부여받을 예정이고, 아무리 대공과 백작이라고 하나 명실상부한 귀족끼리의 대화가 아닌가.
“아케밀라.”
“말씀하세요.”
“너, 제정신이야?”
“이보세요, 미테리엔 영애. 기본적으로 대화는 경어를…”
하지만 그 말은 채 끝맺지 못했다.
- 우지끈.
뭔가 때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는데도, 두 사람이 마주 앉아있던 테이블이 반으로 쪼개지며 서서히 무너져내렸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냉담한 표정의 아스트리드가 아케밀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아가리 찢어버리기 전에 입 닥쳐. 이 반역자 년아. 너희 그 잘난 상단이고 뭐고, 전하에게 가기 전에 내 선에서 깡그리 털어버릴 수 있다는 거, 명심해. 명심하고서 내 말을 들어.”
“…다, 당신.”
아케밀라의 표정이 굳어져 간다. 무장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이 설원의 표범,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과의 독대에 무장을 가져오지 않았다니, 실수였다.
“모든 상단을 국유화하고, 유레이드 상단만 남겨놔 달라? 이 이야기를 레오폴트 전하나 황제 폐하께 내가 고하면 어떻게 될지 생각은 했어? 황제 폐하와 내 아버님이 피와 땀으로 이룩해낸 이 아인트하펜을 말아먹을 셈이 아니라면, 자. 설명해라. 무슨 의도로 그따위 조건을 내걸었는지.”
“그건.”
그래서 선택지를 주지 않았느냐, 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아케밀라는 그제서야 자기가 상대를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모든 상단의 국유화, 그리고 유레이드 상단만 사유화.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아인트하펜의 모든 유통망을 유레이드가 거머쥐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아스트리드, 좀 진정해.】
‘입 다무세요. 당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에요.’
【하지만, 지나치게 모욕을 주면 안 돼.】
‘모욕이요? 잘됐군요. 모욕을 느끼기 전에 죽이면 되겠어요.’
그 말과 함께 아스트리드는 주먹을 쥐었다.
“거, 거래 조건이었잖아요!”
우뚝.
아스트리드의 움직임이 멈췄다. 시선은 표표히 아케밀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사냥감을 놓치기라도 할 새라 아스트리드의 시선은 아케밀라의 일거수일투족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 거래 조건은 제국의 흥망을 걸어도 된다는 건가? 이 아인트하펜의 황태자비가 될 내 앞에서 감히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고서 그 목이 붙어있기를 바라는 건 아닐 테지.”
“그건.”
아케밀라는 말이 차마 이어지지 못했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 첫 번째 조건을 선택할 줄 알았다.
만약 둘 다 선택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거래 조건을 낮춰가며, 아케밀라 본인이 원하던 그 ‘이득’ 을 얻어낼 생각이었다.
상식이 부족하고 사교성도 부족한, 철이 들기 무섭게 전장만을 누빈 아스트리드가 여기서 파고들 줄은, 아케밀라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케밀라. 넌 나를 너무 우습게 봤어. 전장은 협상의 연속이야. 포로를 얼마나 내놓을지, 어떤 조건에 목숨 몇을 날려버릴지. 그런 협상을 계속 거쳐온 나다. 그런 내게 이따위 카드로 협상을 걸었으면 그만한 각오가 필요할 거다.”
아스트리드 주변에서 냉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설원의 폭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아케밀라는 한기를 느꼈다. 조금씩 내려가는 방 안의 온도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적어도 아케밀라의 주변을 죄어드는 죽음은 분명하게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황태자비 후보를 운운하며 까부는 것도 봐줬다. 유레이드 어르신도 날 많이 예뻐해 주셨으니, 그 딸인 네가 내게 실례를 범하는 것도 너그러이 용서했지. 그뿐이 아니지. 감히 전하와 내 약혼 사이를 운운하며!”
“힉…!”
아스트리드가 발을 구르자 지면이 움푹 파였다. 실금이 간 바닥재를 내려다보며 아케밀라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것도 봐줬다. 아케밀라, 자. 말해봐라. 너, 내가 원하는 자료가 무엇인지 너는 어떻게 알고 있나? 감히 겁도 없이 내 주위에 간자를 심은 건 아닐 테지? 실제로 그렇다면 넌.”
아니다.
결코 그런 건 아니었다.
절대로, 아스트리드에게 간자를 심거나 한 건 아니었다.
아케밀라가 아무리 간이 크더라도 그런 짓을 벌일 정도로 간이 붓지는 않았다.
“여기서 죽어야 할 테니까. 내가 원하는 자료가 뭔지, 너는 알고 있는 건가?”
“모, 모릅니다. 몰라요. 하지만 저희 상단의 정보력은 제국 제일이라…”
그 말에 아스트리드가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 이런 게… 이게, 상단의 딸이라고?】
그제서야 가짜 아스트리드도 상황을 파악했다.
적어도 아스트리드가 원하는 게 뭔지, 뭘 찾고 있는지 그것부터 확인하고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그러나 아케밀라는 그러지 않았다.
【철이 없어도 이만저만 해야지. 생각도 없고 개념도 없고 예의도 없고…】
지금 몸을 움직이고 있는 아스트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분노는, 자기가 모욕받았다고 해서 느끼는 분노가 아니었다.
이 나라, 그녀의 조국, 아인트하펜 제국의 목줄을 잡으려 든 아케밀라에 대한 분노였다.
아스트리드, 그녀에 대한 모욕은 참을 수 있다.
아스트리드, 그녀에 대한 희롱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레오폴트, 나아가 황제, 더 나아가 조국인 아인트하펜에 대한 모욕은 용서하지 않는다.
그런 분노가 아스트리드에게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자료를, 네가 찾아주지 못했다면. 만약 그렇게 됐다면 넌 어떻게 할 셈이었지? 뭔가 대책이 있나? 방법이 있나? 이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의 분노를, 너 혼자서 감당해 낼 자신이 있는가 묻고 있잖아!”
- 쾅!
재차 바닥재에 금이 크게 그려졌다.
이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무너질 참이다.
“죄. 죄…”
“죄송하다고 끝날 일이 아니야!”
“…….”
본능은 빨리 죄송하다고 말하고 이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고 아케밀라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은 그걸 억누르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돈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우며 자라났다. 비록 둘째인 아렉시아에게 모든 면에서 밀렸지만, 황태자비가 되던가…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이뤄낸다면, 아버님도 아케밀라를 다시 볼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랬던 아케밀라다.
그래서 레오폴트와 아스트리드가 불화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쾌재를 불렀고, 여러 방면으로 찔러 들어가려 시도를 했었다.
‘…실패인 건가…?’
아케밀라가 자신의 성급함을 자책할 때, 아스트리드의 분노는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가짜 아스트리드의 피나는 설득이 있었다.
【아니, 가만히 좀 봐보라고. 쟤는 그냥 멍청하고 생각이 없어서 그런 말을 한 거라고. 자기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를 거라니까? 그런 애를 데리고 이러면 그것도 좀 그렇잖아. 안 그래?】
‘알만한 나이예요. 스무 살이면.’
【너도 연애 모르잖아!】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오나요!?’
【아무튼, 이제 좀 바꿔. 애 울겠다.】
방 안의 분위기가 일순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당장이라도 아케밀라의 목을 잡아 뽑기라도 할 듯 흉흉한 기세였던 아스트리드의 분위기가 확 바뀌어, 미친 듯이 뿜어져 나와 아케밀라를 압박하던 살기는 씻은 듯이 사라져간다.
“…아케밀라.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겠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저년 저거, 반성이라곤 안 하네 진짜.】
‘가만 좀 있어봐.’
“이번만 봐주겠어. 백작이 된답시고, 함부로 설치고 그러면 안 돼. 그런 조건은 상대를 봐가면서 걸어야지. 겨우 그런 조건으로 대공녀인 나와 거래를 하려고 하다니. 너무 무모하잖아.”
너는 사람 보는 눈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통렬한 질책.
“이번만큼은 나도 못 들은 걸로 하고 넘어가겠어.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나는 원하던 자료를 이미 찾았으니까. 애초에 너와 거래가 성립되지 않는 상태였지. 그 정도의 정보는 얻어내고 거래를 걸도록 해. 알겠어?”
【알아낸 게 없잖아요?】
‘그거야, 주술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주술을 풀고 금제를 풀어서, 레오폴트에게 도움을 청하면 해결이 되잖아.’
【흠… 뭐, 알아서 하세요. 그건.】
아케밀라는 반쯤 죽은 모습이었다.
아스트리드는 그 모습에,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더 밀어붙이면,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생각 없는 쥐는 궁지가 아닌데도 고양이를 물기도 한다.
그러니,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 것이 좋으리라.
“자, 그럼 가 봐. 내가 더 화나기 전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파멸적인 연차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