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야시장 (3)
이 나라, 아인트하펜에도 은발은 흔하지 않다.
전 국민을 다 본 게 아니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황태자비 물망에 오를 정도로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춰진 귀족 자제들 중에서는… 사실 아스트리드도 잘 알지 못했다.
사교회에 나가질 않았으니 다른 귀족 영애들이 어떤지를 본 적이 없었고, 봤다고 해도 아카데미가 전부였다.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은발이…
‘있었던가… 없었던가.’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루하루 바쁘게 지나갔으니 다른 분대를 기억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아스트리드, 지금 귀족들 중에 은발의 영애가 우리 말고 또 있어?’
【있… 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지금 이 점쟁이가 말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일단 아스트리드 외에 다른 부인을 들인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능성이 좀 낮았다.
은발을 본 적이 없고, 아카데미에서 은발을 본 적이 있나 없나 잘 모르겠고… 그러면…
【자꾸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그러시나요.】
‘어… 응?’
때로는 진실은 너무 가혹한 편이다.
그리고 그 진실은 가끔 말해주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파괴력이 달라지곤 한다.
예를 들면-
【정황상 그 부인이라는 건 저와 당신이잖아요. 들어보면 몰라요?】
듣는 이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는 이가 말했을 때, 그 파괴력은 배가되기도 한다.
‘…….’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그냥 황태자비 되고 나서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게 좀 더…】
뭐라뭐라 떠들어대고 있어도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이럴 수가.
미래가, 그런 미래가 있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점쟁이는 용하긴 했다. 두 명의 부인. 아마도 지금 이 몸에 공존하고 있는 진짜 아스트리드와 가짜 아스트리드를 나름 꿰뚫어 봤음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둘 다 레오폴트의 아내가 된다는 끔찍한 미래까지 예언하고 있는 이 상황.
「
“저, 황태자 전하.”
“응? 왜 그러나, 아스트리드.”
“저, 이, 이걸…”
아스트리드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임신 테스트기.
물론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조차 않는 물건이긴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스트리드의 손에는 임신 테스트기가 들려있었다.
“그게… 세상에, 두 줄이잖아.”
“네, 넷째… 가, 들어선 것 같아요…!”
레오폴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레오폴트의 얼굴에 번져가고, 아스트리드는 그런 레오폴트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수줍음에 얼굴을 붉혔다.
“오오, 사랑하는 나의 비…! 넷째라니, 기쁜 소식이로군!”
아스트리드를 와락 끌어안는 레오폴트.
그리고 그 품속에서 조금도 반항하지 않은 채 오히려 기쁜 듯 미소를 짓고 있는 아스트리드의 모습이 있었다.
」
‘아니아니아니!’
【무슨 생각을 한건가요.】
진짜 아스트리드의 말에, 아무 반응을 하지 못 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지금 저 점쟁이가 말하는 건 아스트리드와 아스트리드다.
그렇다고 한들 지금 떠오른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한단 말인가.
【아직, 아직 확정된 미래인 것도 아니고. 미래는 바꿀 수 있다고 하잖아요?】
‘화, 확정된 미래… 그, 그래! 그렇지! 확정된 미래가 아니지!’
“왜 그러나, 아스트리드. 어디 아픈가? 얼굴이 새빨간데.”
“꺅?!”
갑작스럽게 아스트리드의 눈앞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레오폴트 때문에, 아스트리드는 진심으로 비명을 질렀다. 놀란 와중에 하마터면 레오폴트의 얼굴을 후려칠 뻔하다가 가까스로 멈췄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그그그냥 더더더더더워서…!”
“초여름이라 그런가. 아무튼 점괘 고맙소. 복채는 여기 두고 가지요.”
레오폴트는 딱히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몇 개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려놓고 레오폴트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아스트리드도 뒤따라 일어섰다.
그렇게 천막을 벗어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점쟁이의 모습을 한 베라시엔이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원하군.”
초여름의 밤이다.
아직은 봄의 선선함이 그 꼬리를 길게 드리우고 있어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 전이었고, 초여름의 은근한 따스함도 한데 뒤섞여 제법 기분 좋은 날씨이기도 했다.
“아스트리드.”
“네, 전하.”
홧홧하니 뜨거운 김이 피어오를 것처럼 붉어져 있던 아스트리드의 얼굴도 이제 평상시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당신,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아니라구… 절대 아니야.’
그런 미래는 있을 수 없으니까.
“잠깐, 산책이라도 하겠나?”
사양해야 한다.
산책이라니, 이 야시장에서 무슨 산책을 한단 말인가.
“뒤늦게 물어보는 거지만… 그 인형은, 마음에 드나?”
“아… 이거요?”
점을 보면서도 내내 품에 안고 있었던 표범 인형이었다. 새하얀 털에 군데군데 동그란 검은 반점이 찍혀있는 커다란 표범 인형.
아스트리드도 그 인형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크기도 크고, 안고 있으면 포근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네, 네… 그러고 보니, 감사하다는 말씀을 안 드린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전하.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많이 솔직해졌구나, 아스트리드.”
“네?”
레오폴트의 시선이 아스트리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담겨있는 감정이, 이제는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저는 조용히 있을게요.】
‘어?! 왜, 왜?!’
【지금 제가 나가봐야 방해만 될 거 같고…】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오히려 진짜 아스트리드가 당장 바꿔 달라고 난동을 부려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런데도 바꿔 달라고 하기는커녕 조용히 있겠다는 진짜 아스트리드의 그 말이 더욱 신기했다.
【제가 나서면 오히려 방해가 되는 느낌이기도 해서…】
‘무, 뭐?! 아니, 아니야! 아니니까!’
【어차피 오늘 시간 다 써서 바꾸지도 못해요.】
“아스트리드, 무슨 생각을 그리하나?”
레오폴트는 여전히, 아스트리드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법 키 차이가 있는 두 사람이라 둘이 마주 보고서면 레오폴트가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잠시 산책을 할까.”
“그, 네… 그, 그러시죠.”
야시장은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그 특성상 밤이 되면 될수록 사람이 많아진다.
“보통은 자정 무렵이 되면 해산을 하니까. 지금이 한창 인파가 많을 시간이기는 하군.”
“그렇군요.”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인파를 헤치며 걸으면서도, 아스트리드는 다소 불만이었다.
‘산책을 할 거면 좀 조용하고 한적한 데로 갈 것이지, 어쩜 이렇게 사람 많은 곳만…’
【어휴, 말하는 거 봐. 여우가 따로 없네 진짜.】
‘내, 내가 뭘?!’
【됐어요. 흥.】
대체 어디서 삐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입을 다물어버린 진짜 아스트리드에게 당황한 아스트리드는 일단 묵묵히 레오폴트의 뒤를 따랐다.
“궁금하지 않나?”
“네? 뭐가 궁금하지 않냐는 말씀이신지?”
“아까 그 점에 대해서 말이다.”
“아.”
하긴 듣고 보면 그렇기도 했다. 아스트리드야 워낙 정곡을 찔린 터라 당황했다고 변명을 할 수 있겠지만 레오폴트는 아까도 그랬고 지금도 터무니없이 담담했다.
애초에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레오폴트는 담담했다. 전혀 흥분하지도, 놀랍지도 않은 것처럼 그랬다.
“애초에 나는 운명 따위 믿지도 않는다. 미래 따위, 지금 알아버린 미래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레오폴트는 정면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점 따위 그저 흥미 본위로 봤을 뿐 전혀 믿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이.
“운명을 관측해버린 지금 이 시점에서 그 운명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군. 아스트리드, 너는 어떤가. 믿는 편인가?”
“저, 저는…”
【전 안 믿어요.】
“안 믿어요.”
【제게 있어 인생은 항상 전장이었어요.】
“제게 있어 인생은 항상 전장이었어요.”
【그 전장에서 백 번을 싸워서 백 번을 승리하고 이 자리에 선 게 저예요.】
“그 전장에서 백 번을 싸워서 백 번을 승리하고 이 자리에 선 게 저예요.”
【그리고 저는, 둘째 부인을 맞이한다거나…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제가 둘째 부인이 된다거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전하는 오로지 저만의 전하가 되어야 해요.】
그 말은 차마 따라 하지 못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이건 왜 안 따라 하시죠?!】
‘시, 시끄러워! 그걸 어떻게 말해?!’
“아스트리드?”
말이 하다가 끊어졌다.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는 아스트리드를, 레오폴트가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제가, 그런 점쟁이 따위가 한 말에 휘둘릴 듯한가요?”
가까스로 어찌어찌 수습은 했다.
“그런가. 과연 그렇군. 역시 아스트리드, 너답다. 실로 광오하구나.”
【후후… 전하께서도 제게 칭찬을…】
칭찬이 맞기나 한 건지.
“아스트리드.”
달이 휘영청 높았다.
밤하늘 한복판까지 높이높이 떠오른 달은 그 시리도록 푸른빛을 지상으로 비추고, 온건한 날씨는 밤놀이를 나온 이들에게 기분 좋은 선선함을 선물했다.
“네, 전하.”
“너는.”
레오폴트가 잠시 뜸을 들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레오폴트는 그를 올려다보는 아스트리드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민트 빛의 눈동자.
저 아름다운 민트 빛의 눈동자.
사실은, 가슴이 뛰고 있었다.
사실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사실은, 아까 그 점괘를 들었을 때부터 레오폴트는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부인이 둘이라거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스트리드와 결혼하는 미래.
서로가 파혼이라는 목표를 향하고 있는 지금, 우습게도 레오폴트가 혼자 아스트리드에게 두근거림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필사적으로 위장을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점괘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척.
“전하, 무슨 일로 그러시는-“
“아스트리드.”
주변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시끌시끌한 주변의 소음이 점차 사그라들고, 마치 세상이 조용해진 것처럼 짙은 침묵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아직도, 내게 두근거림이 없는가?”
“네…?”
“너는, 내게 두근거림이 아직 없냐는 말이다.”
레오폴트의 무심한 시선이 아스트리드를 향했다.
조용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레오폴트.
그리고-
“엇, 누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아슈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어린이날에 어린이 만드는 외전은 못썼지만
어버이날에 어버이 되는 표지는 만들었어요
후후후후후ㅜ후훟ㅎㅎ훟후ㅜㅜㅜ후ㅜㅎ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