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녀는 절대 함락되지 않는다-52화 (52/62)

52화. 야시장 (4)

【좀 바꿔보라니까요!?】

‘못 바꾼다고! 바꿀 수가 없잖아!’

아스트리드는 머릿속에서 난리를 치고 있는 진짜 아스트리드를 말리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이것저것 산 먹거리들을 한가득 안고서 아스트리드 맞은 편에 앉아있는 아슈레이는, 정작 누이인 아스트리드의 이런 고생을 꿈에도 모른 채 꼬치며 과일사탕을 연신 베어먹고 있었다.

“어, 누님. 안 드십니까? 이거 괜찮은데. 설탕 시럽을 과일에 두껍게 입힌 거라서 아주 달아요. 한번 드셔보시죠.”

“…너는 그게 입에 들어가니?”

머릿속에서 난리 치는 진짜 아스트리드와는 별개로 아스트리드 역시도 내심 심기가 불편했다. 아니, 왜 하필 거기서 나타날 게 뭐야. 아니면 조금만 더 늦게 나타나지.

【저놈 저거 튼튼해서 여기서 집어던진다고 죽지는 않는다고요!】

‘어디 부러지긴 할 거 아냐.’

【안 죽잖아요!】

‘니 동생이잖아!’

【내 동생이니까 하는 말이죠!】

한편으로는 다행이긴 했다. 조금 전까지 레오폴트는 말 그대로, 정말 딱 고백을 하려는 시점이었다.

적어도 아스트리드가 보기에는 그랬다. 아직도 두근거림이 없는 거냐고 물었으니 거기서 그녀가 대답을 하건 말건 아마 레오폴트는 나는 네게 두근거린다… 정도의 말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랬으면 정말 다 끝나는 거였다. 아스트리드는 그런 상황에서 아니라는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랬으면 파혼이고 뭐고 그냥 바로…

‘그건 아니겠지. 레오폴트는 4년간 아카데미를 다녀야 하니까.’

아마 그랬으면 아스트리드는 아카데미를 퇴소하고 얌전히 신부수업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요리며 가사, 그리고 사교술과 화법, 귀족 영애로서의 몸가짐이 아닌 만인지상 일인지하라는 높은 자리에 있을 황태자비로서의 몸가짐이라던가.

‘어차피 그런 거 대부분 아는 건데. 10년 차 자취 경력자…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나 드셔보십쇼.”

생각에 빠진 아스트리드를 깨우기라도 할 듯, 아슈레이는 그녀의 손에 사과 사탕을 하나 들려주었다.

“맛있어요. 한번 드셔보세요.”

【이딴 걸로 넘어가지 말라고요!】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슈레이가 악의를 가지고 그런 것도 아니다. 다만 눈치가 없었을 뿐인 거다. 아스트리드는 손에 쥐고 있는 사과 사탕을 한입 베어 물었다.

찐득하니 묻어나는 설탕 시럽과 사과 특유의 산뜻한 단맛이 한데 어우러져 정말 달고 맛있었다.

【…맛있긴 하네요.】

‘그렇지?’

뭐, 좋은 게 좋은 거다. 아스트리드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오히려 잘된 거다. 거기서 넘어가지 않은 게 다행인 거다.

마차가 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야시장도 거의 막바지라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인도와 빈 마차를 찾는 사람들 사이로 길게 뻗은 대로.

아스트리드와 아슈레이를 태운 마차가 그 대로 위를 달렸다.

*

‘그래서, 할 얘기가 있다고 했잖아.’

【있긴 해요.】

야시장에서 진짜 아스트리드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멈췄었다. 아스트리드도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자, 말해봐.’

욕실에는 수증기가 가득했다. 수도 자택이라고는 하지만 대공 자택이어서 욕실의 넓이도 어마어마했는데, 그 한가운데에 욕조가 있었다.

금박을 입힌 사자 머리가 벽에 붙어있었는데 거기서 연신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물이 고여있지 않도록 아래로 빠지는 물의 양과 공급되는 물의 양이 거의 같게 유지되어, 욕탕의 물은 온도도 유지되면서 수면도 같은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욕조에, 아스트리드가 머리에 수건을 얹고 앉아있었다.

하루에 30분은 반드시 반신욕을 할 것. 진짜 아스트리드의 요구 조건 중 하나였는데, 아스트리드는 지금까지는 그 약속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당신, 정말 요녀 같네요.】

‘…뭐?!’

하마터면 앉아있던 욕조 디딤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요녀라니.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니, 단어의 뜻은 알겠지만 여기서 이 말이 왜 나오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야, 야!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정답인가요?】

‘아니거든?!’

정말로 아니다. 하다못해 바람둥이라고 해도 틀린 말인데, 요녀라니. 아예 단어가 지칭하는 성별부터가 틀렸다.

【그런데 어떻게, 여우짓을 그렇게 잘하는 거죠?】

‘무슨 말이야 대체…’

맥락이 없었다. 앞뒤 맥락을 다 잘라버리고 말을 하니 의도도 알 수 없었다.

진짜 아스트리드의 성격을 잘 아는데도 이렇게 당황스러운데, 그녀를 면전에서 대해야 했던 다른 귀족가 영애들은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아까, 제가 하려고 했던 말은.】

‘말은?’

【당신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저 역시도 최선을 다해서 도울 테니까.】

그리고 한동안은 말이 없었다. 아스트리드가 조금씩 답답해져 가던 그즈음.

또롱또롱,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욕조로 떨어지는 소리만이 고요한 욕실을 울렸다.

【…절 좀 도와주세요.】

‘뭘?’

진짜 아스트리드의 성격을 보아하면, 저렇게 남한테 뭔가를 도와달라고 하는 게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이 아닐까 싶다.

【저를… 좀, 도와주세요…】

묘한 기분이었다.

진짜 아스트리드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는 느낌이었다.

‘…너 설마, 우냐?’

그렇진 않을 것이다. 진짜 아스트리드가 느끼는 감정은, 아스트리드도 어느 정도는 느낄 수가 있었다.

슬픔은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어딘가 우울하고 비통한 감정이라고 해야 좋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냥, 서러워서 그래요. 제 능력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가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없는데. 오늘은 그걸 느끼게 되네요. 감정적으로 되어서 그런가.】

‘그… 음.’

이럴 때는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아스트리드는 고민 끝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진짜 아스트리드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니 섣불리 위로다 뭐다 건넬 수가 없었다.

‘…뭘 도와주면 되는데?’

일단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했다. 아스트리드는 머리에 얹고 있던 수건을 풀어서 냉탕에 휘적휘적 헹궈서 물기를 짜냈다.

- 투두둑…

힘 조절을 한다고 했는데 수건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반토막이 났다.

【제가, 레오폴트 전하와… 결혼하려면, 당신이 꼭 필요해요.】

‘뭐?’

찢어진 수건을 버리고 새로 수건을 가지러 가던 아스트리드가 엉거주춤 제자리에 서고 말았다. 레오폴트와 결혼하려면 아스트리드가 꼭 필요하다는 게, 무슨 말인지 지금 듣기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자… 답지 못하다는 것도 저는 알고 있고, 화법이나 사교성이 좋지 못해서… 만약 당신이, 당신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저만 남으면…】

그제야 진짜 아스트리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가 되었다.

“끙…”

하지만 뭘 도와달라는 것인지 아스트리드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나선다고 해도 진짜 아스트리드가 레오폴트와 결혼할 수 있게 된다는 게, 왜 그렇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고.

【제가 보기에 당신은 아주 여성스러워요. 너무나 여성스럽고, 자연스럽게 남자가 원하는 최적의 영애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니까요. 】

아스트리드는 남자다.

【아마, 레오폴트 전하나… 아슈레이나, 하다못해 우리 집 영감탱… 아니, 아버지까지도 저보다 당신을 좀 더 좋게 여길 테죠.】

몸은 지금 여자이지만 머릿속은 엄연히 남자인 아스트리드다.

진짜 아스트리드는 그런 아스트리드에게 너처럼 여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만 자기가 레오폴트와 결혼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스트리드는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제발, 제가 황태자비가 되는 걸 도와주세요. 저도 원래 세계로 돌아가실 수 있게 전심전력으로 도울 테니까… 황태자비부터 된 후에, 그 후에… 돌아가면 안 될까요? 이기적인 것도 알고 제멋대로인 것도 알지만…】

아스트리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진짜 아스트리드의 성격이 어땠는지 잘 아는 입장에서, 저렇게 자존심 굽히고 먼저 부탁을 한다는 게 진짜 아스트리드로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부탁해요…】

아니, 그렇게 말하면 이걸 또 어떻게 거절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

“매형 보러 안 가십니까?”

“안 가.”

“하기사 뭐 내일이면 또 지겹게 만나실 테니 굳이 안 가셔도 되긴 하겠네요.”

아스트리드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벌써 휴가 마지막 날이었다. 이제 내일이면 아카데미로 향해야 하고, 내일 오전에 마차를 타고 출발할 예정이었다.

“휴가 동안 뭐 별로 한 게 없는데, 아쉽지는 않으십니까?”

아침부터 찾아와서 정오인 지금까지 아슈레이는 온갖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면서 아스트리드의 방에 눌러앉아 있었다.

아스트리드도 그런 아슈레이를 굳이 내쫓을 필요도 없어서, 적당히 대꾸만 해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딱히 해야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는 하루하루.

사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북방으로 갈 걸 그랬다고 조금 후회도 했었다. 자기가 진짜 아스트리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금제이며 일종의 주술과도 같은 것이다… 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다면, 만약 휴가가 시작되고 첫 주에 바로 알았더라면 그 즉시 북방으로 향했을 것이다.

하루 한 시간은 진짜 아스트리드와 교대를 할 수 있으니까 그 상태로 북방 야만족의 주술사를 잡아 와서 금제를 푸는 방법을 찾아내고, 찾아낸 뒤에 바로 레오폴트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고,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별수 없이 여름 방학이 되기를 기다려야만 한다.

그런 사정도 있고, 내일 복귀 후 주말이 지나면 정식 수업이 시작될 것이다. 본격적인 아카데미 생활의 시작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어버이날이 지났으니 이제 표지에 타이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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