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아카데미? 왜 갔는지 모르겠군요 (1)
‘필요한 건 다 챙겼어. 걱정 안 해도 돼.’
【그러게 왜 아카데미처럼 쓸데없는 곳을 간 건지…】
진짜 아스트리드의 투덜대는 목소리가 연신 들려왔지만, 아스트리드는 딱히 상관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지금 진짜 아스트리드의 성격을 보면, 아카데미로 간 게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었다.
‘네가 왜 아카데미를 안 가려고 했는지는 알겠는데, 그 계획대로 했으면 진짜 대실패였다니까.’
【왜요? 진짜 좋은 계획 아닌가요?】
‘아니…’
나중에 들었지만 아스트리드의 계획은 정말로 그게 전부였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카데미를 다니는 레오폴트를, 아예 수도 대공 자택에서 지내면서 매주 찾아가 면회를 한다. 그리고 갈 때마다 요리며 뭐며 준비해가서 자기야말로 정말 황태자비에 어울리는 지고지순한 여성임을 어필한다… 이게 계획의 전부.
아스트리드로서는 얘가 왜 여태까지 레오폴트를 공략하지 못했는지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튼, 절대로 안 돼. 내가 비록 네 부탁을 다 들어줄 수는 없지만,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내 말을 들어.’
원래 남자의 심리는 남자가 제일 잘 아는 법이다. 아스트리드는 장담할 수 있었다. 레오폴트의 그, 아스트리드에 대한 낮은 호감도로 비춰봤을 때 그 작전은 성공 가능성이 낮은 게 아니라 아예 없었다. 성공할 가능성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알았어요.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할게요.】
비교적 고분고분해진 진짜 아스트리드.
욕실에서 진짜 아스트리드의 그 부탁을, 아스트리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스트리드는 이 세계의 이방인과도 같은 존재. 하루빨리 이 몸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떠나야 하는 존재였다.
본인부터가 여기에 오래 머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가족이고 뭐고 딱히 정 줄 곳이 없는 곳이기는 해도, 그렇다고는 해도 여기보다는 익숙하니까. 그래서 진짜 아스트리드의 부탁을 거절했다.
‘그래. 아카데미에서도, 이 몸의 주도권을 잡게 되더라도 되도록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야한 말 좀 그만 하세요.】
‘뭐!? 뭐, 뭐가 야한데!?’
“그럼, 아슈레이. 아버님을 잘 부탁할게. 아무리 강골이셔도 연세가 있으시니까.”
“허이구, 우리 누님 진짜 엄청나게 변하셨네요. 걱정 마십쇼. 아무 문제 없이 잘 모시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아슈레이가 씩 미소를 지었다. 진짜 아스트리드는 저놈 저거 어디 한군데 부러뜨려놔야 속이 시원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었지만 그래도 그게 그러면 안 되는 거니까.
“내년에는 저도 아카데미 입학할 겁니다. 미리 후배라고 생각해두시라고요.”
“그래. 불합격을 기원할게.”
“아, 누님! 진짜 그러시깁니까?”
아스트리드보다 한 살 어린 아슈레이니까, 내년이 되면 아카데미 지원 자격이 된다.
게다가 무력이나 집안이나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으니 별일이 없다면 아마 합격하게 될 것이라, 아스트리드는 이제 내년이면 아슈레이도 아카데미에서 볼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마차에 올랐다.
“자자, 출발해!”
아슈레이의 큰 목소리와 함께 마차가 덜컹, 한차례 흔들린 후 움직이기 시작했다.
1개월의 휴가였다. 딱히 길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고 해봐야 도서관 뒤지고 다닌 거랑 야시장 갔던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나름 푹 쉬었다.
이제는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할 시간.
마차의 창 너머로 천천히 아슈레이의 모습이 사라져간다.
1개월간 지내면서 익숙해졌던 대공 수도 자택의 경관도 서서히 뒤로 밀려 나가고, 마차는 사잇길을 지나 대로로 올라 조금씩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분대원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생도 전원 휴가는 아니었고, 그 엘프나 마법사, 신관은 어떻게 지내는지 딱히 들은 거 없었잖아요?】
에라냐는 그냥 남는다고 했었고, 아스테인은 고향에 다녀오겠다고 했었다. 그리고 베라시엔은 신전에 있을 거라고 했으니 오늘 아스트리드가 복귀하면 다들 만날 수 있을 터였다.
【전하께서도 오늘 복귀하시겠지요?】
‘…모르지.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모르지.’
물어보지 않았으니 모른다.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왜죠? 왜 안 물어보는 거예요? 뭔가 의도가 있는 건가요?】
‘어? 아… 그, 그게.’
【혹시, 신비주의인가요?!】
‘응? 어, 그, 그렇지…?’
갑자기 무슨 신비주의인지는 모르겠는데 진짜 아스트리드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냥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스트리드는 엉겁결이지만 그렇다고 둘러대 놓고도 나쁘지 않은 임기응변이라고 생각했다.
도와주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사실 좀 부담스럽기는 했다.
그도 그럴 게 아스트리드는 원래 연애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짝사랑은 많이 해봤지만.
짝사랑을 많이 해봤다는 건 성공해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와도 같다. 그런 아스트리드에게 레오폴트와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은 생각보다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사이에 마차는 어느새 미셀부르크 초입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학원도시 미셀부르크. 아카데미를 중점으로 하여 발달한 도시이고 그만큼 아카데미에 기대는 비중도 높은 도시.
페르상트와도 그렇게까지 먼 거리는 아니고 해서 위성도시를 겸한 역할을 하는 도시.
이제 금요일이고, 아직 외출이 허가되는 주말이 아니기에 도시 자체는 한산한 편이었다. 가게들이야 당연히 문을 열고 한창 영업 중이었고, 그중에 어딘가 낯이 익은…
【녹색 머리? 저거 그 엘프 아니에요?】
‘맞는 거 같은데?’
마침 인도와 인접한 도로여서 마차도 천천히 가고 있었다. 그래서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식료품 가게로 보이는 가게에서 뭔가를 한 아름 안고 싱글벙글 웃으며 나오는 저 폭포수처럼 긴 녹색 머리의 늘씬한 미녀는 분명히, 아는 얼굴이었다.
“에라냐 언니?”
마차의 창문을 열고서 아스트리드가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원래라면 위험하다고 질색을 할 일이지만 어차피 이렇게 천천히 달리는 길이니까 상관없을 것이라, 아스트리드는 주저 없이 얼굴을 내밀고 에라냐를 불렀다.
“왓, 아스티! 야! 나 태워줘!”
아스트리드가 마부석 창을 열고 마차를 세우라고 하자, 이내 마차가 천천히 멈추어 섰다. 마부가 내려서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에라냐가 직접 마차 문을 벌컥 열고서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한쪽에 종이봉투를 턱 하니 내려놓는데 그냥 봐도 보통 무게는 아니다. 에라냐는 그 옆 좌석에 털썩 걸터앉자마자 한숨을 훅 내쉬었다.
“아이고, 이것저것 욕심내서 사긴 했는데 어떻게 들고 가나 걱정이었어. 널 만나서 다행이다.”
“언니는 어떻게, 하나도 변하질 않았네요.”
【전에도 보긴 했지만, 벌써 이렇게 자연스럽게 언니라고 부르다니. 역시 친화력이 좋긴 하네요.】
아니, 오해인데.
하지만 굳이 해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아스트리드는 그 말은 못 들은 체 하고서 에라냐에게 물었다.
“언니는 진짜, 휴가 동안 아무 데도 안 갔어요?”
“응. 안 갔지. 뭐 내가 고향을 가겠어 어딜 가겠어.”
“고향요? 가면 되잖아요.”
아예 마을에 눌러앉겠다고 온 것도 아니고 그냥 잠시 다니러 온 건데 그래도 쫓아내지는 않을 게 아닌가. 아스트리드는 어쩐지 에라냐가 마을을 스스로 떠난 게 아니라 쫓겨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 가기 싫어. 가봤자 세계수에 낙서했… 아니, 세계수에 맹세했는데 왜 돌아왔냐고 그럴 텐데. 가봤자 좋은 소리도 못 들을 거고.”
세계수는 그냥 큰 나무다.
이 맹세가, 지금 에라냐가 하는 말로 봐서는 어디 맹세의 종이에다가 쓰거나 한 게 아니라 세계수 밑동에 낙서를 하거나 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 달 동안 여기 있었어요?”
“엉. 여기도 재밌는 거 많더라. 즐길 거리 놀거리도 많고. 야야, 아스티야. 여기 술도 엄청 맛있어!”
술.
안 먹는다.
술이라고 하면 이제 입에도 대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도, 교칙에 술 금지 아니에요?”
“에이. 교관들이 그렇게까지 깐깐하진 않더라고. 그 애들이 어찌 보면 응? 좀 살살살 잘 긁어주면 엄청 잘 넘어온다니까? 내가 그 애들이랑 술 먹고 난장… 아니, 가볍게 음주를 즐긴 게 몇 번인데.”
【…이 엘프는 몇 살이죠?】
‘그러게.’
교관들을 그 애들이라고 부르는 시점에서 이미 까마득한 연배라고 생각되지만, 에라냐에게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 맞아. 그러고 보니까 오늘 저녁에도 술 한잔하기로 했는데, 아스티 너도 같이 가자.”
“싫.”
“소개해줄 친구도 있어!”
“술은 됐고, 소개는 괜찮아요.”
“왜?”
에라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이내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게 휘어지더니 입꼬리도 히죽이 말려 올라갔다. 말 그대로 음흉한 웃음. 정말 그려낸 것 같은 음흉한 웃음이었다.
“너, 휴가 나갔다가 술 먹고 사고 쳤구나?”
“…아니거든요.”
단번에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고,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던 아스트리드의 그 대답을 에라냐는 놓치지 않았다.
“야, 대답 망설이는 거 보니까 분명 뭐 있었구만? 뭔데? 뭔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완강하게 부인하는 아스트리드를, 에라냐는 뚱한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히죽 웃었다.
그 웃음에 등줄기에 오한이 돋는 것 같은 아스트리드였지만, 이어지는 에라냐의 말에 아스트리드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괜찮아. 저녁에 만날 친구도 술 잘 먹거든. 나랑 걔랑 해서 마시기 시작하면 너도 자연스럽게 끼게 될 거니까!”
아니, 진짜.
아무리 봐도 아스트리드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엘프에 대한 선입견이 너무나도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 친구 이름이 뭐라더라. 그러니까… 아, 맞아. 바이올렛. 바이올렛이야!”
【이 엘프가 미쳤나요?!】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는지, 아스트리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처음시작님 후원 감사합니다. 어... 건강보다 작품이 우선이죠!? 작품부터 챙기겠습니다!
9호선볼카닉바이퍼님 후원 감사합니다. 저도 수상하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최우수상! 최우수상!!!! 오오오! 꿈은 크게 가지랬으니까요!
한봄님 후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바이스카르츠님 댓글로 질문 주셨는데 제가 못봤어요!
설정상 아스트리드의 키는 174cm이고 레오폴트는 188cm입니다!
이.. 이정도는 스포일러 아니잖아요... 그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