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아카데미? 왜 갔는지 모르겠군요 (2)
“에이, 나라고 한달 동안 놀고먹은 거 아냐. 친구도 엄청 사겼다니까?”
“그건 알겠다고요. 근데 바이올렛이 언니랑 대체 접점이 뭐가 있는지 제가 모르잖아요.”
에라냐는 엘프이고 바이올렛은 대륙 최남단 바닷가 출신이니까 접점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도 둘이 친구가 되었다고 하니까 아스트리드는 그게 오히려 신기했다.
“아무튼 오늘 저녁에 같이 한 잔 하자. 그러면 다 친구 되는 거야. 바이올렛도 그렇게 친구 된 거거든?”
“저는 싫다고요…!”
게다가 바이올렛도 황태자비에 입후보한 영애가 아닌가.
아스트리드로서는 좀 꺼려지는 게 당연했다.
【그냥 둬요. 와서 쓸데없는 소리 하면 저랑 바꾸면 되니까.】
‘그거 더 문제야!’
하아.
속으로 한숨을 쉬며 아스트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됐다. 어차피 신경 써봐야 될 일도 아니고, 에라냐가 친구를 어떻게 사귀었건 그걸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아스트리드는 연신 마시자, 마시자 하며 옆에서 졸라대는 에라냐의 말을 무시하며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미셀부르크의 시가지를 지나서 마차는 계속해서 달렸다.
학원도시라고는 해도 한복판에 있는 건 아니고 약간 외진 곳에 있었다. 들어서야 하는 건물의 크기나 그 수, 게다가 넓은 연병장이 여럿 필요한 아카데미의 특성상 도시 한복판에 자리 잡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여기서 놀았다고요?”
“당연하지! 한 달도 모자랄 정도였는데?”
아스트리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카데미에서 뭐 할 게 그렇게 많았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달 동안 놀았는데도 오히려 그게 모자랐다고 하는 에라냐가 대체 지난 한 달 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아스트리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일단, 원래 우리 식당이 유명하더라.”
입교하자마자 일주일 동안 전쟁식이랍시고 갈아낸 순무에 이상한 톱밥 빵 같은 걸 줬었던 그 식당을 말하는 것 같았다.
“왜요?”
“원래 밥이 엄청 맛이 없기로 유명하더라고. 그래도 정식으로 1학년이 되어서 건물을 옮기면 괜찮아진다는데?”
“그래요?”
1학년이 되면 건물을 옮기는 건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훈련병… 윽.
“아무튼 그래서요? 또 뭐 있는데요?”
에라냐의 설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1학년이 되면 일과 후에는 시내에 나가는 정도는 괜찮다고 하더라, 남자 숙소와 여자 숙소가 분리되어 있다고 하더라, 어디의 디저트가 맛있다더라…
“디저트요?”
“그치이?”
에라냐의 얼굴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득의양양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스트리드가 거기서 반응할 줄 미리 알고 있었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그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털실 과자라고 들어봤어?”
“털실 과자요? 그게 뭔데요?”
아스트리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에라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히죽히죽 웃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털실 과자. 이름만 들어서는 이게 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아까 내가 나온 그 가게에서 한정 판매를 하는 과자라고. 자, 말 나온 김에 하나 먹어볼래? 엄청 달고 맛있거든. 나도 몇 번 못 먹어봤지만 매번 생각나는 맛이라고?”
엄청 달다.
아스트리드는 그 말에 집중했다.
【애도 아니고, 무슨 단맛을 그렇게 좋아해요?】
‘나,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아스트리드는 억울했다. 그는 원래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꿀을 먹어도 머리가 슬슬 아파지는 그런 체질인데다, 단 걸 먹었을 때 혀가 얼얼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이 몸으로 깨어난 이후로는 단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게 되었다.
‘니 몸이 그런 걸 어떡해?’
【거짓말하지 마세요. 저도 단 거 안 좋아해요. 달고 신 거 엄청 싫어한다고요.】
생각해보면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아스트리드는 감귤 소스를 싫어한다고 그랬었다. 감귤 소스 특유의 그 달콤하고 새콤한 그 맛을 싫어한다고 했었는데, 아스트리드는 그 달고 새콤한 맛이 너무 좋았다.
“자, 이거 먹자.”
어느새 종이봉투에서 조그만 통을 꺼낸 에라냐는 쨔쟈쟌, 하고 입으로 소리를 내며 상자를 열어 보였다.
“우와.”
정말로 털실 같았다. 가운데에 갈색으로 잘 구워진 크래커를 몇 겹이나 겹쳤는데 그 사이사이에는 노란 버터가 두텁게 발라져 있었다. 그렇게 겹친 크래커가 척 보기에도 벌써 다섯 겹.
그뿐이 아니었다. 그런 크래커는 양 끄트머리만 보일 정도로 새하얀 털실 같은 것이 둥그렇게 말아져 있어서 마치 털실을 한가득 모아놓은 것처럼 생겼다.
“이 하얀 털실처럼 생긴 게 전부 설탕이라고. 설탕을 뭐 어찌어찌해서 이렇게 실처럼 만든 거래!”
“우와.”
보기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간다.
보기만 해도 엄청나게 달아 보인다.
보기만 해도 먹고 싶었다.
“자, 하나 먹어 봐. 이 언니가 힘 좀 썼지.”
한 달 동안 에라냐가 아카데미에서 진탕 놀아재끼며 여기저기서 좋은 생활 정보들을 얻어냈다고 하더니, 과연 그런 모양이었다.
- 바삭…
잘 구워진 크래커 특유의 파열음과 함께 설탕실과 크래커가 한입, 아스트리드의 입 속으로 사라져간다.
혀에 올라가자마자 사르르 털실이 녹아내리며 극한의 단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단맛이 일순간에 몰려오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에는 바삭한 크래커에서 흘러나오는 고소함과 노란 버터의 약간 느끼한 맛이 그 단맛과 함께 어우러지며 균형을 이끌어냈다.
한마디로, 맛있었다.
“어때, 맛있지?”
그 말대로였다.
맛있었다. 아스트리드가 여기 와서 먹어본 맛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엄청 단데, 고소함과 약간의 느끼함이 기가 막힌 조화를 이끌어냈다.
“이거 과자가게 주인 여자애가 이 아카데미 졸업생이래. 아카데미에 들어올 때는 군인이 꿈이었다는데, 제과 동아리에서 꿈을 찾았다면서 졸업하자마자 여기서 제과점을 시작했다더라.”
에라냐가 뭐라고 하건 간에 그 소리는 아스트리드에게 들려오지도 않았다.
“…마지막이야.”
에라냐의 풀죽은 목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면, 상자에 여섯 개 들어있던 털실 과자는 이미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마도 마지막일 털실 과자는 아스트리드의 손에 들린 채 절반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맛있어?”
기세등등하던 에라냐의 손에는 아무 부스러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에 비해서 아스트리드가 입은 제복 앞섶이나 허벅지 쪽에는 하얀 부스러기와 갈색 부스러기가 한가득 떨어져 있었다.
아마도, 그 여섯 개가 전부 아스트리드의 입안으로 사라진 모양이었다.
“이거라도 드려요?”
“응.”
아스트리드가 손에 들려있던 털실 과자 반쪽을 슬쩍 내밀자, 에라냐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주긴 뭘 주나요! 빨리 입에 털어 넣어요!】
‘안 그래도 그럴 참이야.’
넘겨줄 생각 따위 애초부터 없었다. 맛있는 건 혼자 먹어야 제맛이니까.
*
휴가 복귀 신고는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숙소 1층 중앙에 있는 교관실에 가서 복귀했노라고 얼굴 보여주면 끝.
“그럼 나도 갈게요!”
휴가 복귀 신고를 하는 아스트리드와 외출 복귀 신고를 하는 에라냐. 아스트리드와 함께 교관실을 돌아 나와 계단을 올라가면,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숙소에는 다른 생도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에라냐 언니, 털실 과자 사 왔어?!”
저 멀리서 갈색으로 묶어 올린 머리를 찰랑이며 여생도 하나가 후다닥 달려왔다.
털실 과자.
그 말에 에라냐의 얼굴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잉? 언니 왜요? 표정이 왜 그래요?”
에라냐가 아무 말 없이 옆에 있던 아스트리드를 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얘가 다 먹어버렸어.”
“먹어보라고 한 건 언니잖아요?”
아스트리드도 할 말은 있다.
누가 달라고 했나, 자기가 먼저 먹어보라고 했으면서.
애초에 여러 통을 샀으면 될 일이다. 한 통 샀으니까 그런 거지. 따지고 보면 한 통 덜렁 사 온 에라냐의 잘못이다.
【당신 좀 뻔뻔하네요…】
‘반토막 남은 것도 주지 말라던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 아스트리드 생도.”
아는 척을 하지만 아스트리드는 이 갈색 머리의 생도가 누구인지 몰랐다. 사실 알아야 할 이유도 딱히 없었지만, 이렇게 아는 척을 하는데 무사하기도 좀 애매했다.
“얘는 아미라. 나랑 같은 궁수.”
“같은 엘프가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만나서 반가워요, 아미라 생도. 저는 아스트리드예요.”
아미라는 그런 아스트리드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이가 활짝 드러나게 웃어 보이는 그 얼굴이 퍽 귀엽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아스트리드 생도! 저는 아미라에요! 궁수고요! 다행히 엘프는 아니에요!”
“야, 다행히 엘프가 아니라니. 너 그거 무슨 말이냐?”
에라냐가 마침내 그 말뜻을 알아챈 듯했다.
“그야, 언니 만나고 나서 엘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박살이 났거든요.”
“저만 그런 게 아닌가 보네요.”
“아스트리드, 넌 또 무슨 소리야?”
아니, 맞잖은가. 아스트리드는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에라냐가 더 신기했다.
“엘프가 숲의 자식인 줄 알았다고요, 지금까지는. 아미라 양도 비슷하지 않았나요?”
말하는 걸 보면 그랬는데.
“아스티, 너 진짜 너무한다야.”
한 달 만에 돌아오는 숙소는 여전했다. 청소는 전담 직원들이 정해진 시간에 해주니까 그나마 깔끔하기는 한데 옷이며 속옷 정리된 꼴을 보니 과연 이게 엘프가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스트리드는 일부러 무시했다.
“너무하긴 무슨. 숲의 자식인 줄 알았지 고기와 술과 간식의 자식인 줄은 몰랐죠.”
“야, 너도 오래 살아보… 아니.”
가져온 여행 가방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서 옷가지며 생활용품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아스트리드의 옆으로 다가온 에라냐가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얘얘, 있잖아. 너 교관실 갔을 때 뭔가 이상한 거 못 느꼈니?”
“이상한 거요?”
정리를 하던 손을 멈추고 아까 복귀신고 하러 갔었던 교관실을 되새겨보았다. 별달리 다른 건 못 느꼈는데, 이상한 게 있었던가?
【교관들이 평소보다 많았죠. 일과 후인데도.】
‘아.’
확실히 그랬다. 교육을 받을 때 교관실에 가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일과가 끝나는 시간이니 교관들도 대부분 퇴근하고 일찍 근무하는 인원들 서넛 정도 남아있어야 할 시간.
하지만 아까 갔었던 교관실에는 스무명에 가까운 교관들이 그대로 남아서 바글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얼굴이 다들 피곤해 보였어요. 그렇게 말해보세요.】
“음, 금요일 일과 후인데도 교관들이 많이 남아있었고… 어째, 다들 피곤해 보이기는 했어요.”
“우와.”
에라냐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스트리드가 전혀 못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역시 대단하네, 아스티.”
“왜요?”
“완전 정답이야.”
“무슨 일인데 그래요?”
“요즘에 교관들이 퇴근을 못해. 거의 전원이 다 학교에서 숙식을 다 하거든. 분위기가 좀 싱숭생숭해.”
“분위기가요?”
“응. 요즘 좀 그래. 교관들도 다들 칼같이 군기 들어있고, 들리는 소문에는 뭐 아카데미에 고위급 간부들이 깡그리 갈렸다는 소문도 있고.”
그거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아스트리드는 에라냐에게 말을 계속해보라는 듯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자세하게는 나도 몰라. 교관들한테 술을 먹여서 알아보려고 해도 거절하더라고.”
“그래요?”
“그래서 교관들은 분위기가 좀 안 좋긴 해. 우리랑은 딱히 상관없지만 말이야. 아무튼, 오늘 저녁에 어때?”
“뭐가요?”
오늘 저녁에 뭐가 어떠냐는 말인가 싶어서 에라냐를 쳐다보는 아스트리드에게, 에라냐는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서 손목을 탁 꺾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시늉을 해 보였다.
“마실 거지?”
“안 마신다고요.”
“바이올렛도 온다고 그랬다니까?”
“싫다고 했어요.”
“레오폴트도 올 건데?”
“더 싫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대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공모전이 이제 막바지네요
마지막까지 열심히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