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저 암캐년이 (2)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넘어간 지 오래고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이었다.
“레오폴트 생도, 있는가?”
갑작스러운 노크였다. 이제 슬슬 목욕을 좀 하고 분대 회식을 참가할까 싶어 속옷류를 챙기고 있던 레오폴트는 문을 열었다.
“교관님?”
“마침 있었군. 레오폴트 생도, 잠시 교관실로 같이 가줄 수 있는가?”
“네, 문제없습니다만.”
자기가 없어도 먼저 시작하라고, 아스테인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인 후 레오폴트는 교관을 따라나섰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하는 복도. 그 복도는 이제 금요일 밤을 맞이하여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생도들의 목소리로 생동감이 가득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지만, 레오폴트는 묵묵히 교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계단을 내려가고, 오른쪽으로 꺾으면 바로 교관실.
교관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직도 퇴근하지 않은 교관들이 상당수 남아서 한창 업무 중이었다. 무척이나 바쁜 듯 교관실로 들어서는 레오폴트를 쳐다보는 이들도 극소수였고, 보고 나서도 다소 긴장한 낯빛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
“이리로 오게.”
교관이 먼저 향한 곳은 상담실이었다. 교관실에 딸린 상담실은 비교적 작은 공간이었지만 흡음재가 잔뜩 붙어있는 데다 마법적 처리까지 되어있어 완벽한 방음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했다.
“자, 앉지. 차는?”
“아, 저는 괜찮습니다.”
이제 곧 뭔가 먹고 마셔야 할 터라서 차로 배를 어설프게 채우고 싶지는 않았다. 레오폴트가 차를 거절하자, 교관 역시도 따로 차를 준비하지는 않고 레오폴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우선, 여기 이 자리는 교관과 생도의 입장이 아닐세. 이제부터는 말이야.”
“네? 그게 무슨…”
약간 당황한 레오폴트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교관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
그제서야 레오폴트는 감을 잡았다. 지금 이 교관은 단순히 아카데미의 교관과 생도 사이가 아니라, 황제 산하의 아카데미라는 기관의 직원과 그 황제 다음가는 권력자인 황태자로서의 레오폴트, 그 관계였다.
“일어나시오. 일어나 앉아, 무슨 일인지 차근차근 설명을 해보도록.”
레오폴트의 말에 교관 역시도 부복해있던 자세를 풀고 일어나, 소파에 마주 앉았다. 그마저도 실례라는 듯 다소 불편한 자세이기도 했다.
“헬베이가를 기억하십니까.”
“헬베이가… 그 마물 말인가?”
마지막 주에 있었던 야외 훈련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났던 그 마물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 마물의 이름이 헬베이가였었다.
원래라면 거기서 나타날 리가 없는 마물임에도 어째서 나타났는지, 황제는 교관들에게 철저한 조사를 명한 바가 있다.
“최근의 일입니다만, 그 마물이 인위적으로 소환된 흔적을 찾아냈습니다.”
“인위적으로 소환된 흔적? 어떤 흔적 말인가.”
“역오망성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소환진…? 금지된 마법이지 않나.”
마물이 소환될 정도의 소환 마법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마도 기사의 길을 걸으면서 마법적인 지식도 꾸준히 쌓아온 레오폴트는 소환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마법이라면 그렇습니다. 그 근원과 위험성으로 인해 황제께서 직접 금지시킨 마법이지요. 다만 이번에 사용된 것은 주술인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주술이라고?”
“주술이라도 상당히 고위급 주술입니다. 소환은 아니고, 마계의 문을 여는 데에 사용되는 주술이 아닌가 추측하였습니다.”
“마계의 문을 여는 주술이라. 그게 이곳에서 가능할 리가 없지 않나.”
“그렇습니다. 원래라면 그렇습니다만…”
주술. 마법과는 또 다른 신비. 그 둘을 구별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진을 그리는 방법, 그리고 위력을 강화해 줄 제물의 여부.
“무엇이 쓰였지?”
“제물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마계의 문을 열었다 추측하는건가?”
교관은 송구하다는 듯 레오폴트의 시선을 피해 그렇지 않아도 내리 깐 시선을 한층 더 깊이 내리깔았다.
마치 죽을죄를 지었다는 것처럼.
“자세히 말해보게.”
레오폴트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간다.
이 아카데미는 제국에 있어서 기사를 키워내는 요람과도 같은 곳이다. 또한 기사가 갖춰야 할 온갖 전투 이론뿐만 아니라 인문지식과 교양, 사회 상식, 전문 지식 등의 교육 과정을 빠짐없이 갖춘 이른바 제국의 미래를 키워내는 막중한 임무를 띈 곳이다.
그렇기에 황제로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교육기관이기도 했는데, 그런 곳에 주술사, 즉 먼 북방의 야만족이 침입해서 그런 마물을 불러냈을 뿐만 아니라 그 마물이 자신과 미래의 황태자비 목숨을 위협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곳에 있는 교관들이 모조리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중대한 사고였다.
“얼마 전에 교내에 도난 사고가 있었습니다.”
“뭐라?”
어처구니가 없었다. 교내에 침입해서 마물을 풀어놓은 것도 모자라 좀도둑까지 들었다는 말인가.
“대체 이 아카데미의 방비를 어찌하고 있길래…!”
레오폴트의 분노는 당연하고도 정당했다. 제국의 수도인 페르상트와도 그리 멀지 않은 이곳에 침입자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도난 사고라니.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도난 사고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보고를 드리고자 합니다.”
“말씀하시오.”
“주사, 인주, 묵편 등이 도난당했습니다.”
주술에서 사용하는 진을 그릴 때 사용되는 잉크 역할을 하는 주사.
진을 그린 후 방점을 찍을 때 사용하는 인주.
진의 기척을 지우는 데에 사용되는 묵편.
“…그 말인 즉, 언제든지 마물이 또 습격해 올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째서?”
저 세 종류의 주술용구가 사라졌다는 것은 침입자가 언제든지 이 아카데미에서 진을 그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레오폴트가 말했던, 마물 소환 외에도 주술로 할 수 있는 습격이 가능해진다는 말이기도 했다.
“도난당한 주술용구는 전부 교육용이기 때문에 실제로 사용할 수 없는 가품들입니다.”
“가품들이라.”
교보재로 사용되던 가품이라고 하면 그것들이 실제로 사용될 우려는 일단 접어두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주술용구를 노렸다면 이미 사용한 주술용구를 보충하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 주술용구를 사용했다면 제물의 흔적도 숨기는게 가능했을 터. 그리고 제물을 사용했다면 마계의 문을 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아버님께는 보고가 되었나?”
“예. 폐하께는 소상히 보고를 드렸고… 이 일이 완전하게 정리되고 침입자를 모두 확인, 주살한 이후에 저희도 처분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
부친이자 황제인 크로이츠가 그런 결론을 내렸다면 레오폴트로서도 더 토를 달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못마땅한 구석은 있다.
“그래서 대응은 어찌하시고 있소?”
“경계 병력을 세 배로 늘렸습니다. 불가시화를 한 대공마룡 편대가 주기적으로 아카데미 상공을 정찰 중이고, 실버 가드와 함께 코퍼 가드까지 경계에 동원되어 있습니다.”
“어쩐지 교내가 좀 어수선하다 싶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군.”
“송구합니다.”
레오폴트는 재차 깊이 고개를 숙이는 교관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이들이라고 해서 실수를 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닐 것이다. 제국이 통일된 후 20년이 넘도록 평화로웠다. 그 평화에 젖어 드는 건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들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을 터였다.
“알겠소. 폐하께서 이미 처벌에 대한 결정을 내리셨으니 내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겠지. 허나 명심하시오. 나도 그렇지만…”
레오폴트의 시선이 번뜩였다.
아스트리드처럼 숨기지 않는 포식자의 눈빛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도사리고 있는 살모사의 그것처럼 번뜩이는 푸른 눈동자가 교관을 직시하고 있었다.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 이 나라의 건국공신인 미테리엔 대공가의 영애이자, 나 레오폴트 폰 아인트하펜의 비가 될 그녀의 신변이 조금이라도 탈이 생길 경우.”
- 끼야으응…
침대 위에서 교태를 부리던 아스트리드의 모습이 순간 레오폴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
“목숨을 바쳐 지키겠습니다.”
“그리해야 할 것이오.”
레오폴트는 시선을 거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다른 곳으로 새어 나가는 일 없이, 이 사태가 조용히 끝나기를 레오폴트는 바랐다.
‘안 그래도 사나우니, 그녀의 귀에는 이 일이 들어가지 말아야 할 텐데.’
*
‘이거 제법 재밌을 거 같은데…?’
마치 대학교 MT를 떠올리게 하는 모양이었다.
아스트리드와 에라냐, 베라시엔과 아스테인. 이 넷이 조촐하게 둘러앉아서 서로 가져온 간식거리를 늘어놓은 모습은 제법 괜찮았다.
친구가 없어서 MT를 가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아마 이런 기분이겠지. 아스트리드는 내심 뿌듯했다. 조촐하지만 간식거리도 있고 게다가 술도 있다.
술잔이랍시고 가져온 각자의 머그잔은 그 크기가 제각각이었지만 그것도 나름 운치가 있는 것이다.
“레오폴트는 언제 온대?”
“좀 늦는 모양인데요. 먼저 시작해도 되지 않겠어요?”
“그럴까. 야야, 본인 없으니까 물어보자. 야, 아스트리드!”
에라냐는 멍하니 딴생각에 빠져있는 아스트리드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와, 소리칠진 것 좀 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찰싹하는 소리에 비해서 딱히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놀랄 뿐. 아스트리드는 잠에서 깨어나듯 번뜩 놀라서 에라냐를 쳐다보았다.
“왜, 왜요?!”
“너, 솔직하게 말해봐. 레오폴트랑 어디까지 갔어?”
“엥?”
“아니, 같이 휴가도 나갔고. 집도 근처 아냐? 황태자랑 대공 딸내미니까 집도 근처일 거 아냐. 밤마다 만나서 막, 응? 그런 거 안 했어? 쌍둥이달에 아이 가지면 쌍둥이가 태어난다던데.”
“아, 아니거든요?!”
이거, 말이 너무 돌직구다.
【싸, 쌍둥이… 레오폴트 전하와 저를 쏙 빼닮은 쌍둥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돌아가고 난 다음에 해!’
【아들이면 레오폴트 주니어, 딸이면 아스트리드 주니어…】
‘너 자의식이 너무 강한 거 아니냐?! 이름에 주니어만 붙이면 다냐!?’
“야, 말 좀 해봐. 아스테인, 너도 궁금하지 않아?”
앞에 놓여있던 강정을 하나 집어 먹으며 아스테인은 에라냐를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쳐다보는 것 같았다.
“에이, 반응 좀 보세요. 손도 못 잡았나 보구만.”
“손잡았거든?! 끌어안…”
“어라.”
손도 못 잡았을 거라는 소리에 발끈한 게 문제였다. 아스트리드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지르고서야 자기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깨달았다.
그 말이 나왔을 때는 이미 놀랐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베라시엔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글싱글 웃고 있는 아스테인과, 뭘 생각하는지 눈을 초승달처럼 음흉하게 뜬 에라냐가 아스트리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얘기 좀 해 봐. 응? 끌어안고 뭐 했는데?”
“에이, 뭐 했겠어요.”
“여신께서도 남녀의 교합에는 큰 관심이 있으세요. 부끄러운 일이 아니랍니다?”
베라시엔은 뭔가 크게 관심이 있다는 양, 그런 아스트리드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어디선가 맡아본 적이 있는 냄새가 훅 날아들었다.
【이 여자, 신관이죠?】
‘베라시엔 말이야?’
【네.】
베라시엔은 수녀였다. 신관이 곧 수녀고 수녀가 곧 신관이니 비슷하긴 할 터다.
‘어… 그렇지?’
【전에 그 야시장에서 점쟁이와 같은 냄새가 나는데. 이상하군요…】
“자아, 아스트리드 분대장님? 자세하게 말씀 좀 해보세요. 저 베라시엔, 이래 봬도 남녀의 연애에도 아주 깊은 관심이 있답니다?”
“그치, 나도 그래! 베라시엔 말 잘했다!”
“어, 어어. 저는 그런 거 잘 모르는데.”
“야, 아스테인 너는 촌놈이니까 그렇지!”
“초, 촌놈이라뇨!”
시끌벅적한 소동 속에서 아스트리드만이 질문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얼떨결에 내뱉은 말치고는 그 대가가 너무나 심각해서, 아스트리드는 실수라고는 해도 그런 말을 내뱉은 자기 입을 찰싹 때리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 똑똑.
그리고 구원과도 같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레오폴트야?”
- 네.
에라냐가 묻자 문 바깥에서 레오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오폴트라는 말에, 에라냐가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아스트리드도 레오폴트라고 하니 공연히 목을 길게 빼고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 어째 둘이 같이 오네?”
“어머, 이상해? 어울리지 않나?”
허스키한 중저음의, 하지만 어딘가 침착하고 점잖은 느낌의 여성 목소리. 그리고 그와 함께 들리는 레오폴트의 목소리까지.
아스트리드의 얼굴이 굳어져 갔다.
마침내 에라냐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남자와 여자.
【바꿔요.】
‘…있어 봐. 이럴 때 날뛰면 역효과니까.’
【이걸 어떻게 참아요! 저 빌어먹을 비린내 나는 촌년 저걸 아주 그냥!】
지국 남부 해전단의 제독, 바이카르 드 오트리아의 차녀, 바이올렛 드 오트리아.
바이올렛과 레오폴트가 나란히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로 끝나는 공모전...
최후의 불꽃...!!!!!!!!!!!!
공모전 마지막날을 장식하는 최후의 2연참.......!!!
불꽃이... 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