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저 암캐년이 (3)
어째서 저 둘이 같이 들어오는가.아스트리드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진짜 아스트리드도 동일해서, 머릿속에서는 진짜 아스트리드가 난리를 치고 있었다.
【이봐요, 저 꼴을 그대로 두고 볼 거예요?!】
하지만 아스트리드는 침착하고자 숨을 골랐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화를 낼 일이 아니기도 했다. 진짜 아스트리드가 도와달라고 말하기는 했다지만, 그렇게 도와주고자 한다고 해도 지금 그녀의 말처럼 화를 내면 오히려 역효과라고 할 수 있다.
침착하고, 차분하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그러니까 요 앞에서 마주쳤나 보군요, 라던가. 그래, 그런 거. 그런 식으로 접근해야 맞는 거였다.
‘있어 봐. 내가 이럴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잘 보여줄 테니까.’
그리고 아스트리드는 살짝 숨을 골랐다. 할 말을 정리한다. 그 사이에 레오폴트와 바이올렛은 이미 방 안으로 들어와 앉을 자리를 살펴보고 있었다.
“레오폴트 생도.”
“음? 불렀나?”
“설명하세요.”
어?
뭔가 말이 잘못 나온 느낌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게 아닌데?
아스트리드의 말에는 가시가 뾰족뾰족 돋아있었다. 차분하게 말을 한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말 속에 날카로운 가시를 담아버렸다.
그 말에 레오폴트가 선 채로 아스트리드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에, 약간 당황한 기색이 어려있었다. 아스트리드의 민트색 눈동자가 레오폴트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그 눈동자에 어린것은 선연한 분노이기도 했다.
“뭘 설명하라는 말인가, 아스트리드.”
“말조심하세요. 여기는 페르상트도 아니고 황궁도 아닙니다. 생도끼리는 경어를ㅡ”
그 말에 레오폴트는 눈을 슬쩍 감으며 손을 휘저었다. 본인이 실수한 게 맞긴 하지만 다들 모여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신경질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을 텐데. 레오폴트도 속에서 살짝 짜증이 났다.
“알았으니, 뭘 설명하라는 말인지 설명해주시지요, 아스트리드 분대장님.”
“왜 두 사람이 같이 들어오는 거죠?”
그제서야 레오폴트는 자기 옆에 선 바이올렛을 살짝 쳐다보았다. 이게 문제였구나 싶어서 레오폴트가 바이올렛과 거리를 두려던 그 순간, 바이올렛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어, 어어… 바이올렛 생…?”
그 미소가 어딘가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당황한 레오폴트가 거리를 두려고 하기가 무섭게 바이올렛이 그 옆으로 바짝 따라붙으며 오히려 레오폴트의 팔짱을 꼈다.
팔 언저리에 느껴지는 푹신한 감촉. 며칠 전 아스트리드와 겹쳐 눕고 말았을 때, 레오폴트의 가슴팍에 느껴졌던 것보다는 다소 그 볼륨이 부족한 느낌이지만, 그럼에도 그 쿠션감은 레오폴트의 이성을 잠시 마비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 모습에 당황하는 건 오히려 에라냐였다.
‘저, 쟤가 갑자기 왜 저래…?’
뜨악한 표정으로, 에라냐는 바이올렛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행동하는 바이올렛은 에라냐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냥 술자리에, 같이 놀자고 부른 것뿐이었다.
이 아카데미에서 사귀게 되었던 그 많고 많은 친구 중에서도 바이올렛은 단연코 최고의 파트너였다. 술이면 술, 음식이면 음식, 디저트면 디저트. 모든 면에서 에라냐와 바이올렛은 아주 잘 맞는 친구였다.
그랬는데 갑자기 이런 곳에서 바이올렛이 돌발적인 행동을 할 것이라고는 에라냐 역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
그 순간 바이올렛과 에라냐의 시선이 마주쳤다. 에라냐는 알 수 있었다. 그 숱한 술자리와 교관과의 숨바꼭질을 거쳐오며 쌓아온 바이올렛과의 굳은 우정 속에서 에라냐는 바이올렛의 눈빛만으로도 그녀의 의중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년 보게, 저거… 보기보다 여우네.’
에라냐는 슬쩍, 아주 작게 웃었다. 바이올렛이 눈빛으로 말하는 바는 명약관화했다.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이런 장난에 에라냐가 빠질 수 없다. 오히려 에라냐가 한술 더 떠야 직성이 풀릴, 그리고 더 재미있을 그런 장난.
에라냐는 슬쩍 아스트리드를 쳐다보았다. 아스트리드는 어딘가 넋이 나간 것 같은 표정으로 레오폴트와 바이올렛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거 재밌겠는데?’
“이야, 그러게 말이야. 그렇게 둘이 어울리더니, 결국 이렇게 되네?”
“우와. 아스트리드 분대장님은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스테인이 거들고 나섰다. 옆에 앉아있던 베라시엔마저도 두 손을 꼭 마주 잡고서 바이올렛과 레오폴트, 그리고 아스트리드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멋진 풍경을 제가 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다니. 역시 입교하길 잘한 것 같아요…”
신을 모시는 신실한 종이 할 법한 말은 아니긴 한데, 아스트리드는 그런 말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래, 언제부터인데?”
에라냐.
“언제부터긴요. 아니 뭐 자유경쟁 상태 아닌가? 먼저 따먹으면 임자 아냐?”
그러면서 레오폴트의 팔짱을 낀 팔에 오히려 힘을 꽉 주는 바이올렛. 그런 그녀의 팔을 뿌리치려 하지만, 그러면 바이올렛의 레이디로서의 체면에 큰 손상이 가기에 차마 그러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레오폴트.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황태자비 경쟁은 아직 철회된 게 아니니, 바이올렛이 저런다고 해서 아스트리드의 눈치를 볼 필요도 딱히 없었다.
게다가 아케밀라도 아니고 바이올렛이면 남부 해전단 제독의 영애가 아닌가. 미테리엔 가에 비해서 작위는 조금 처진다고 해도 명색이 귀족이니 아스트리드라고 해도 함부로 개 쫓아내듯이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그만하고 앉아요! 염장 그만 지르고!”
이렇게, 빽 소리를 지르는 것 말고는.
【아니, 지켜보라면서요. 이게 무슨 꼴이에요?!】
‘…그러게.’
이미 술 컵이 서너 번 돈 후였다. 아스트리드는 애초에 술을 마시면 무슨 사달이 나는지 알고 있으니 술 컵을 받아놓기만 하고 마시지는 않았다. 대신 바로 옆에 다른 컵을 가져다 놓고 주스만 받아서 홀짝홀짝 들이킬 뿐이었다.
하필이면 자리 배치마저도 레오폴트 옆에 바이올렛이다. 아스트리드 옆에는 아스테인.
“에이 분대장님, 한 잔 정도도 안 됩니까?”
“응. 안 마셔.”
아스테인은 그 실눈 자체로도 이미 음흉한 인상인데 말도 저렇게 하니까 더 음흉해 보인다. 사실 아스테인이라도 나쁜 마음먹고 그런 건 절대 아니겠지만 아스트리드는 이미 속에 천 불이 들끓어 오르는 상황이라 아스테인마저도 얄미워 보였다.
“기분 많이 나쁘십니까?”
【이 인간은 대체 뭘 하자는 건가요?! 불난 집에 기름통 던져넣는 것도 아니고!】
‘보통 사람은 기름통을 못 던져. 기름 붓는다고 해야겠지.’
【그게 지금 중요한가요?!】
“이것 좀 드셔봐요, 레오폴트 생도.”
고기를 얇게 실처럼 썰어서 피망, 당근, 양배추 등의 채소와 굴 소스를 곁들여 강한 화력에 볶아낸 요리였다. 이건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호오…”
레오폴트가 한입 먹어보더니, 이내 감탄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에 비해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아스트리드의 표정은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저, 저… 저저저…!】
화가 난다. 엄밀히 따지면 화를 낼 일이 아니긴 한데.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렇구나 하고 넘기고, 그러니까, 나중에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면 될 일인데.
“자, 바이올렛 생도. 나는 공식적으로 약혼녀가 있는 몸이니 너무 붙어 앉으시면 곤란합니다.”
레오폴트는 입에 쏙 들어온 요리의 맛에 잠시 감탄한 표정이었다가 이내 정상적인 표정으로 돌아왔다.
“약혼녀의 눈앞에서 이러는 건 실례입니다. 저 또한 실례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니, 이쯤 하시지요.”
나름 점잖게 말해보면, 바이올렛은 새액 미소 지으며 살짝 거리를 두고 앉았다. 장난은 여기까지 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받아줄 수 있는 허용치를 넘어서면, 그 이후부터는 이제 장난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걸 바이올렛도 잘 알고 있었다.
“아, 그러면 이제…”
하지만 지금 여기에, 레오폴트와 바이올렛은 이미 끝낸 장난이고 그에 대해 단순한 장난이었다는 해명을 하려는 바로 지금, 그걸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아스트리드였다.
【바꿔요. 빨리. 지금, 당장.】
‘지금 바꿔서 뭘 어쩌게?’
머릿속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오간다. 오늘은 한 번도 바꾸지 않았기에, 교대 기회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바꿔봐요. 내가 해결할 테니까.】
‘하아…’
이제 말리기도 지쳤다. 아스트리드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제 이만큼 했으면 자기는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었다.
걱정스럽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레오폴트도 짜증 나고, 옆에서 헤실헤실 웃으면서 누님 한잔?! 을 외치고 있는 아스테인도 짜증 나고, 역시 이게 연애죠~! 하고 있는 베라시엔도 짜증 나고, 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 아스트리드으으으으! 하고 있는 에라냐도 짜증 난다.
다 집어치우고 싶다.
‘그래, 바꿔. 바꿔줄 테니까 니 맘대로 해 봐라.’
그리고 몸에서 힘을 쭉 빼면, 시야가 바뀐다. 텔레비전을 보는 느낌.
【그래서, 이제 어쩌려고?】
‘일단 목부터 축여야겠어요.”
“어, 어어?!”
레오폴트의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스트리드는 아스테인 쪽으로 조금 치우쳐있던 자기 술 컵을 끌어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반쯤 담겨있던 위스키를 그대로 단숨에 들이켰다.
“크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공모전이 오늘이 마지막이래요...
어제 자정인 줄 알고 화려한 2연참을 했는데 오늘이 마지막이래서...
젖먹던 힘을 다 끌어내서 오늘도 2연참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