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저 암캐년이 (4)
눈앞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진짜 아스트리드의 시야를 통해 내다보고 있는 아스트리드에게도 이렇게 느껴지는데, 본인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야, 야야. 아스트리드, 괜찮아?】
‘드아앙연히 갠찮쵸.’
안 괜찮잖아! 아스트리드는 비명을 질렀다. 혀가 꼬여있는데 괜찮긴 뭐가 괜찮단 말인가. 아스트리드는 눈앞이 빙빙 도는 탓에 자기까지 취기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지난번에 황궁에서 술을 마셨을 때는 아스트리드가 자기랑 바꾸라면서 난동을 부렸었는데, 이런 취기를… 아니, 아니다. 그러면 아스트리드는 본래부터 술이 약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애초에 아스트리드가 샴페인 석 잔을 마시고 취할 정도면, 의식 세계로 밀려나 있던 아스트리드 역시도 취했고, 취한 탓에 지금처럼 브레이크 없이 바꾸라고 난동을 부렸던 거라고 하면…
【너, 술 하나도 안 센 거 아냐?!】
그 말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시선은 바이올렛에게 못 박힌 듯이 단단히 고정된 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야.”
“…뭐?”
반말. 경어조차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아스트리드의 반말.
바이올렛은 그런 아스트리드의 말에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아스트리드 생도, 많이 취한 것 같…”
“야, 닥쳐.”
바이올렛은 여전히 얼굴에 웃음기가 남아있었다. 장난을 친다고 아스트리드의 감정을 찔러본 것은 분명히 본인이 의도한 바였었지만, 이런 격한 반응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그녀의 이런 반응을 보고 싶어서 한 장난이었던 데다가 그 예상을 훨씬 웃도는 반응에 바이올렛은 여전히 재미있기만 했다.
“남의 남자한테 꼬리나 치고, 이 빌어먹을 암여우 같은 게.”
바이올렛이 자란 바닷가에 여우는 없다.
아스트리드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알게 모르게 혀도 꼬이고 있었고, 아스트리드 본인은 모르겠지만 눈도 게슴츠레 뜨고 있었다.
그 모습에 레오폴트는 며칠 전의 악몽이 떠올랐다. 교태를 부리고, 아양을 떨며 술주정을 부리는 아스트리드의 그 모습. 그때는 마침 주변에 자기만 있었기 망정이지 지금처럼 옆에 자기만 있는 게 아니라 아스테인까지 있는 이 상황에.
아스테인이 있네.
레오폴트는 아스테인을 쳐다보았다. 아스테인의 그 실눈 때문에 어떤 눈빛으로 아스트리드를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아스테인은 아스트리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 걸린 희미한 웃음까지.
레오폴트는 기분이 갑자기 나빠졌다. 아스트리드의 술주정은 말하자면 귀여운 편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철벽같던, 얼음장 같던 아스트리드가 혀를 꼬아가며 교태를 부리고, 아양을 떨던 그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레오폴트는 마음이 조금 급해졌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파하고 아스트리드를 침대로 데려가야 했다.
데려가서 재워야 했다. 다만 지금 이곳에서는 재울만한 곳이 없으니, 아스테인을 여기다 두고 레오폴트의 침대에 아스트리드를 재우고 자기가 아스테인의 침대에서 자면 될 일이었다.
그래, 그게 좋겠다.
레오폴트가 마음을 굳히고서 아스트리드를 일으키기 위해 일어서려 하던 그때였다.
“야. 레오폴트.”
레오폴트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아무리 그래도 야는 좀 심하지 않나. 하지만 레오폴트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럴 수도 있지. 약혼녀의 술 투정, 그 정도 못 받아줄까.
“아스트리드, 취했… 아니, 아스트리드 분대장. 취한 것 같습니다.”
“너, 너 왜 쟤랑 같이 들어와?”
그 말과 함께 레오폴트뿐만이 아니라 바이올렛까지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저 말이 왜 지금 나올까.
방에 들어선 건 이미 한참이나 전이다. 이 회식 자리가 시작되고 얼마 안 되어서 두 사람이 들어왔으니 제법 한참 전이다. 그런데 지금 그 질문을 하는 건 대체 무슨 의도인가.
“왜 둘이 붙어 앉아…?”
그야, 에라냐가 그렇게 배치를 했으니까 그런 것이다.
“왜 둘이 술 마셔…?”
성인이니까.
성인의 음주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17세 이상이면 음주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인트하펜 제국의 법적인 음주 허용 연령이 17세이니 레오폴트와 바이올렛은 딱히 문제가 될 게 없다.
“왜 나란히 술을 마시냐구으으으…”
아스트리드의 얼굴이 붉게 붉게 물들어, 마치 활짝 피어난 장미처럼 붉었다. 레오폴트는 아스트리드가 취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더 이상 그녀를 여기 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왜 나한테는… 그렇게, 응? 그렇게… 다정하게 안해주는데에에에에… 흑.”
아스트리드의 눈가에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차올랐다. 맑고 투명한, 눈가에 가득 차오른 눈물이 어느새 한계치까지 차올라서 어느 순간 주르륵 흘러내렸다.
“왜 나한테만 차갑게 대하는데에에에에… 나아쁜놈아아아아…”
숫제 대성통곡이었다.
아스트리드는 자리에 앉은 채로, 풀썩 엎드려서 엉엉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다.
“아스트리드, 저기…. 음.”
이렇게 되니까 미안한 건 레오폴트였다. 이게 아스트리드의 속내였다면, 어쩌면 지금까지 아스트리드를 오해했었던 것이 아닐까.
아스트리드는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야시장에서의 만남 이후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지금의 모습을 봤을 때는 거의 틀림없이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전부 오해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레오폴트가 생각하고 있던 그즈음.
“됐어. 필요 없어. 나도 자존심이라는 거 있거든!? 너 아니면 남자가 없냐!? 어!?”
엎드린 채 엉엉 울고 있던 아스트리드가 누가 붙잡을 새도 없이 벌떡 일어섰다. 두 눈에 눈물 자국이 아직도 선연하다.
아스트리드는 일어선 채로, 비틀거리면서 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누가 말릴 틈도 없이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다들 지켜보는 가운데, 레오폴트만이 그런 아스트리드를 붙잡기 위해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문가로 다가간 아스트리드가 벌컥 문을 열었다.
“…으어?”
문 앞에 서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은 아스트리드를 빤히 마주 보다가, 서서히 눈동자를 굴려 방 안에 펼쳐진 광경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히끅.”
에라냐가 딸꾹질을 했다. 모르긴 해도 에라냐 뿐만 아니라 다들 똑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저 사람이 왜 지금 저기에 서 있는 걸까.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고 떠들지도 않았는데.
아니, 떠들기는 했었다.
아스트리드가 대성통곡을 하는 소리는 제법 커서, 아마 밖에서도 다 들리기는 했으리라.
“…아스트리드 분대, 전원 기상.”
교관이었다.
달이 하늘 높이 떠서 그 빛을 지상으로 흩뿌리고 있었다. 다들 잠들어야 할 취침 시간. 고요함이 가득한 연병장에는 뒤늦게 완전무장으로 뛰고 있는 생도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아니, 하필 그 타이밍에 진짜.”
에라냐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아스트리드를 제외한 회식 참가자 전원은 완전무장 상태로 연병장을 뛰고 있었다.
취식물 무단 반입, 주류 반입, 미보고 음주 행위 등등 온갖 교칙 위반을 다 저지른 상태인데다 교관에게 현장을 잡혀버린 이상 더 변명을 할 여지조차도 없었다.
아스트리드는 이미 만취 상태라 레오폴트의 침대에서 자고 있고, 그 외 나머지 인원들은 전원 완전군장 상태로 연병장 50바퀴. 거기다가 벌점이 각각 30점씩. 벌점에 대해서는 1학년으로 올라가면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고 했었다.
즉, 이들은 1학년이 되기도 전에 벌점을 30점 먹고 들어가는 셈이었다.
게다가 레오폴트는 이 연병장 도는 게 벌써 두 번째였다. 그럼에도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아니 왜 하필 그때 그랬냐, 아스테인 너는 걔 술 못 마시게 말리지 뭐했냐, 그렇게 술이 약할 줄 누가 알았냐 등등 지금에 와서는 이미 때늦은 소리들을 하면서 연병장을 돌고 있었다.
그런 소리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레오폴트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스트리드가 그랬었단 말인가.
10년 전의 그날 이후로 아스트리드는 레오폴트를 계속해서 피했었다. 게다가 아스트리드에게 보냈었던 위문편지들도 수십 통인데 단 한 통도 답장조차 오지 않았었다.
워낙 거리가 먼 탓에 자주 만나지 못한 것도 있지만 만나더라도 아스트리드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레오폴트를 대했기에, 레오폴트는 분명 아스트리드가 자기를 싫어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아스트리드의 반응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레오폴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레오폴트는 아스트리드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할 필요가 있다.
또 그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얼음장처럼 레오폴트를 대한다면, 이제 레오폴트도 그런 그녀를 상대할 방법을 손에 쥐고 있었다.
술.
식전주를 겸하는 샴페인을, 한 잔 정도만 먹이면 괜찮지 않을까.
레오폴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연병장을 계속해서 돌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주말은 쉽니다
진짜로
진짜 리얼루다가 진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