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술 취하면 귀여운 편 (1)
‘술이 세긴 뭐가 세. 너 진짜… 진짜… 아니, 됐다, 됐어. 말을 말자. 네 말을 믿은 내가 바보다.’
【실례잖아요. 어제 결국 끝까지 남아서 버틴 건 저라구요.】
‘뭔 소리야!?’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 유일하게 온전히 침대에서 자고 있었던 건 아스트리드였다. 다른 사람들은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은 채 방바닥에 널브러져 자고 있었다.
어제가 금요일이었으니, 오늘은 토요일. 주말 아침인데도 아스트리드는 혼자 쌩쌩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분명히 다른 사람들은 술에 취해서 먼저 뻗어서 자고, 아스트리드만 유유히 침대로 와서 자고 일어났다는 것이 진짜 아스트리드의 주장이었다.
‘말이 되냐!?’
【하지만 그게 사실이잖아요.】
‘아니라니까… 너 진짜 한잔 먹자마자 취해가지고 완전 울고불고 난리였다고.’
【거짓말하지 마세요.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스트리드는 그냥 말을 그만하기로 했다.
그녀 역시도 어젯밤의 일을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드문드문 기억하고 있었는데, 개 중에는 진짜 아스트리드가 대성통곡을 하던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정확한 기억인지 아닌지, 자다가 꿈을 꾼 것인지 뭔지 확실하지 못하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지금, 진짜 아스트리드의 주장에도 아스트리드는 제대로 반박을 하지 못했다. 기억이라도 확실하게 남아있으면 반박이라도 할 것인데 그게 그렇지 않았다.
진짜 아스트리드와 교대를 하고 나서 술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가 제대로 기억나질 않는다.
아스트리드가 대성통곡을 하고, 뭐라뭐라 레오폴트에게 떠들어댄 건 기억이 나는데 뭐라고 했었는지, 그런 부분들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진짜 아스트리드는 자기만 끝까지 남아서 술을 마셨다고 우겨대고 있지만 그건 말이 안 된다.
진짜 아스트리드의 주장은, 아침에 그들이 널브러져 자고 있던 그 주변에 팽개쳐져 있던 군장들에 대해서는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는 술 마시지 말자.’
【왜죠? 저 술 세다니까요? 술 마실 일이 있으면 저랑 교대하면 되는 거잖아요.】
‘아니, 그게 더 위험해.’
아스트리드는 그래도 술에 취하면 나름 조절을 한다. 그건 지난번 레오폴트와 술을 마셨을 때도 그랬듯이 증명할 수 있는 전례가 있다. 하지만 진짜 아스트리드는 둘 다 기억이 불분명하니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몰라서 더 위험했다.
‘술 취하면 레오폴트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음… 뭐 저도 술에 취한 채로 첫 경험을 하고 싶지는 않네요. 자칫 힘 조절 못하면 큰일 나니까.】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레오폴트와 단둘이 있을 때 진짜 아스트리드가 술을 마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아스트리드는 거듭 생각했다.
그보다도 중요한 일은 어젯밤에 자기가 레오폴트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뭘 했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다.
【일단 식사를 하러 가죠.】
‘그래. 마침 배도 고프고…’
아침 식사 시간이 아직 남아있다.
주말 아침 식사는 자율이었다. 결식만은 안 되지만, 정해진 시간대 안에 식당으로 가서 식사만 하면 된다.
아스트리드는 아직 지끈지끈한 머리 때문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방문을 열었다. 좀 전까지 같이 방에 있었던 에라냐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아서 기다리다가 이러다간 결식 인원으로 체크 당할 것 같아 혼자라도 식사를 하러 갈 생각이었다.
“아.”
그리고 하필이면 딱 마주쳤다.
숙소 방이 서로 마주 보고 있어서 이런 일이 간혹 생기고는 했었지만, 지금은 영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샤워를 했는지 덜 마른 머리가 화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갓 세면을 해서 물기를 머금어 촉촉한 피부의 레오폴트가 아스트리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이전과는 달리 거부감을 비롯한 미묘한 감정들이 사라지고 없었지만, 아스트리드는 그런 레오폴트의 눈빛을 알아채지 못했다.
“아스트…”
“머, 먼저 갑니다.”
지금 레오폴트를 마주치면 안 된다. 오로지 그 일념이었다.
후다닥 멀어져가는 아스트리드의 뒷모습을 레오폴트는 불러 세울까 하다가 말았다. 허둥지둥 멀어져가는 아스트리드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던 레오폴트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문득이지만, 그녀의 그런 뒷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아침 식사 시간이 슬슬 마무리되어갈 시간이라 식당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스트리드는 식당에 들어서며 식판을 하나 집어 들고 배식구를 향해 다가갔다.
아침 메뉴는 크림 수프와 함께 흰 빵, 그리고 버터와 계란 샐러드. 무난한 조합이었다. 크림 수프가 있으니 해장도 될 것이라 아스트리드는 수프를 넉넉하게 담았다.
그렇게 아침 식사를 담은 식판을 들고 빈 테이블에 앉아서 막 숟가락을 들던 참이었다. 앙, 하고 수프를 먹으려는 아스트리드의 맞은편에 누군가가 앉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 멀쩡해 보이네. 아스트리드 생도.”
“…바이올렛 생도?”
아스트리드의 이마에 곱게 주름살이 생겼다.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 중 하나인 바이올렛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
“사람을 보자마자 그렇게 인상을 쓰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예의에 어긋나잖아.”
넉살 좋게 웃어 보이는 바이올렛이지만 아스트리드는 심기가 그리 편치 못했다.
【이 촌년은 또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거죠?】
‘내 말이.’
요즘 들어서 묘하게, 진짜 아스트리드와 의견이 일치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아마 그게 좋은 징조는 아닐 것이었다.
“다른 분대의 회식에 멋대로 참석해놓고는, 예의를 찾는 건 좀 아닌 것 같네요.”
냉정한 아스트리드의 목소리였지만, 그 상대인 바이올렛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빵을 반으로 갈라 수프를 크게 찍어서 한입 베어 물었다.
“그거, 너무 그러지 마. 오히려 나는 네 덕분에 벌점도 먹고 연병장까지 돌았다고.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너 제외 전원이다. 그러니까 난 오히려 네게 사과받고 싶은 심정이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죠?】
‘난들 알겠어?’
“그게, 무슨 소리죠?”
“뭐, 됐어. 신경 쓰지 마.”
우물우물 빵을 씹어 삼키던 바이올렛이 식판을 통째로 들어 올려 수프 칸에 입을 대고 들이마셨다. 후르륵, 귀족 영애의 입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기 어려운 소리와 함께 수프를 들이킨 바이올렛이 식판을 내려놓고는 혀를 내밀어 입가에 묻은 수프를 핥았다.
“잘됐지 뭐야. 너도 좀 오해를 하고 있는 거 같아서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까 생각했는데,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네.”
“뭘 말이죠?”
“음, 사실은 말이야. 나는 네 편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지.”
갑작스럽게 나는 네 편이라고 한들, 그걸 아스트리드가 바로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뭐가 네 편이라는 것인지, 이렇게 덜렁 말하면 누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아스트리드는 자세한 설명을 하라는 표정으로 바이올렛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뭐, 길게 설명할 수는 없을 거 같고. 이따가 점심시간에 밥 같이 먹자. 할 말이 있으니까.”
“저는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요.”
아스트리드의 가시가 잔뜩 돋친 말에 바이올렛은 예상했다는 것처럼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같이 먹는 게 좋을걸. 내가 방금 한 말, 나는 네 편이라는 그 말. 너한테 절대 손해 볼 일은 아니거든.”
“…….”
“좀 이따가 예비 소집이야. 1학년이 되기 전에 뭐 이것저것 알려준다고 하더라. 그거 끝나면 점심시간이니까, 그때 같이 밥 먹자고. 내가 찾아갈게.”
【일단 들어나 보죠? 제 편이라는 걸 보면 뭐 손해 볼 소리는 아니지 않겠어요?】
‘그럴까… 뭔가 볼수록 얄미운 애라서 좀 그렇긴 한데.’
【어쩌겠어요. 그래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전투에서 패하지는 않는다고요.】
어디선가 들어본 말인데.
아스트리드는 그런 진짜 아스트리드의 말에 공감하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프를 떠먹었다.
맛이 괜찮았다.
*
강당에는 생도들이 바글바글했다.
250명이나 되는 생도들 중에서 10명이 퇴소하고 나서 이제 240명이 된 생도들은 제법 군기가 든 모양새였다. 그 많은 인원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잡음 없이 일사불란 하게 오와 열을 맞추어 도열한 모습은 이윽고 등장한 교관들에게도 제법 흡족한 풍경이었다.
“제군들, 훈련생도 과정을 무사히 수료한 것을 축하한다.”
연단에 올라온 교관이 좌중을 훑어보며 말문을 열었다.
“이제 다음 주 월요일이면 제군들은 1학년 생도가 된다. 훈련 생도의 모습을 벗어나, 이제 자랑스러운 아인트하펜 제국의 황립 군사 아카데미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모두 그 기초를 다지기 위한 것들이며, 이제부터 여러분은 정규 과정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그 말과 함께, 강당의 발표대에서 커다란 장막이 펼쳐졌다.
훈련생도 시절과 비교해서 달라지는 것들과 새롭게 배우게 될 교육 과정, 그리고 일과표 등등이 적혀 있는 장막.
교관은 그 과정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1학년은 공통 과목 위주의 수업 과정으로, 각각의 병과 과목 외에 전술/작전/전략을 비롯하여 무기, 전쟁사, 군사교육 및 훈련, 군사행정 및 정책, 군법 등의 과목이 포진해있었다.
지금까지의 과정이 병사인지 간부인지 알 수 없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정말로 이 제국의 간부가 되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과정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과목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뒤로도 기숙사 배정, 주의사항 등 각종 설명이 좀 더 이어졌다.
*
“이상으로 예비 소집을 마치겠다. 그럼, 즐거운 주말 보내기 바란다. 이상. 해산!”
이제부터가 진짜 주말의 시작이었다.
바이올렛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큰 키 덕분에 까치발을 들지 않아도, 은빛 머리의 아스트리드는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바이올렛은 그런 그녀를 찾아내고서 슬쩍 웃었다. 지금까지의 이미지와는 달리, 그리고 몇 번 만나봤을 때의 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제법 많이 변해있었다.
날카롭고 신경질적이기까지 하며 직설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어찌 보면 제법 귀여운 면도 있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레오폴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녀의 모습이라던가.
이전의 그녀라면 절대 볼 수 없을 그런 모습.
바이올렛은 그런 아스트리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약속대로, 오늘은 그녀와 점심을 같이할 예정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주말 동안 열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