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12화 - 염세炎世
“씨발?”
신재혁이 육성으로 육두문자를내뱉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주변의 함성에 묻혀 사라졌다. 인류의 위대한 첫 번째 승리를 목격한 사람들이 방방 날뛰며 우렁찬 목청으로 기쁨을 표하고 있었다. TV 화면 속 군인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이 보기에는 군대가 총을 와다닥 갈겨댔더니 괴물 같은, 아니 문자 그대로 괴물인 적군이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쥐구멍 속으로 숨은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와아아! 잘한다, 씨발. 다 죽여버려-!”
“이겼다아- 이겼다아아-!!”
군중이 승리의 기쁨에 취해 큰 소리를 듣고 임프가 몰려올지 모른다는 염려도 잊고 소리질렀다. 하지만 냉정하게 전황을 파악하는 이들은 이 전투가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었다. 아직 두 번째 지옥문이 관악구에 남아 있었다. 그 문도 닫기 전까지는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장교들이 흥분한 군인들을 닥치게 만든 후 다음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첫 진군 때보다 확연히 빨라진 진군 속도였다. 지휘관들도 생각보다 괴물을 상대하기 쉽다고 느낀 것 같았다.
적에게 원거리 공격 수단이 없는 이상, 확실히 지휘관으로서는 몇 가지 가능성만 주의하면 됐다. 군대의 화력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수의 인해전술로 적의 접근을 허락하는 경우와 매복한 적에게 포위되어 화력이분산돼 적의 접근을 허락하는 경우, 이 두 가지였다.
다행히 두 가능성 모두 사전에 차단되었다. 우선 관악구에서 적의 물량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두 통로 중 하나가 방금 닫힌 참이라, 군대의 화력을 상회하는 군세는 모이지 않았다. 또 지휘관들은 적병 괴물의 지능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교활함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들은 혹시 모를 매복과 위협을 파악하고자 부대를 투입하기에 앞서 항상 드론을 날려 지형을 파악했다.
실제로 한 번 임프의 군세가 부대의 사각死角에 매복하고 있던 것을 확인한 후, 그들은 더 철저히 드론으로 진군 경로를 수색했다. 그리하여 군대는 숨어있는 적과 돌격하는 적을 족족 몰살하며 전진했다.
“어어 거기 조심해야지! 그렇지!”
“좋아, 우리나라 군대잘한다!”
“그래, 아주 세금 낭비는 아니었구만!”
뉴스를 중계하는 기자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군대를 응원했다. 잔뜩 흥분한 뉴스 리포터는 이 불가해한 현상이 세계 곳곳의 주요 도시에서 일어났으며, 그중에서 검은 구체를 소멸시킨 것은 우리나라가 처음이라고 침을 튀기며 설명했다.
하지만 신재혁은 그 광경에 집중하지 못했다. 물론 주위가 시끄러워서는 아니었다. 지금 그는 상식이 깨부숴지는 광경을 보아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지옥문이 닫힌다고..? 한평생 그런 현상은 듣도 보도 못했다. 정말 악마의 세력이 약화된 것인가? 아니면 지구로 넘어오는데 어떤 제한이 있는 것인가?’
화면 속 총구가 불을 뿜을 때마다 악마의 잔당이 픽픽 쓰러졌다. 한 놈이 쓰러질 때마다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신재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핏기가 빠져 새하얘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지구인의 압승은 분명 기쁘다. 적은 피해로 악마를 몰살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받은 일이다. 하지만, 하지만. 기쁨보다 깊숙한 가슴 속에서 비열하고 질투하는 어두운 감정이 꿈틀거렸다. 성기사가 이런 감정을 품어선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봇물 터지듯 흘러넘치는 허탈한 심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에덴인의 절망과 공포가 한낱 가축처럼 도살당하는 진풍경. 그렇다면 에덴 인류의 모든 분투와 고결한 희생은 무엇이 되는가?
신재혁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그 탁한 눈동자에 지옥 같은 풍경이 스쳐지나간다. 발전되지 못한 연락수단,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성으로 달려오는 청년. 뒤늦은 출동, 쉬지 않고 말을 달리고 달려 도착한 마을. 눈동자에 비치는 불타는 집, 간살당한 여인과 창자가 터져 나온 시체.
오로지 죽음만이 남은 생지옥.
신재혁이 고개를 푹 숙이고 강박적으로 중얼거렸다. 정도로 지옥문 안에 들어가야 한다. 지옥으로 들어가서, 그 안의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에덴의 비밀이, 자신이 알고 싶은, 어쩌면 알게 된 후 후회할지도 모르는 파멸적인 진실이 모두 저 너머에 있을 것이다….
“어, 어, 어? 저 새끼들 뭐야?”
“뭐얏! 매복인가?”
“시발! 징글징글한 괴물 놈들. 시내에 저렇게나 많이 숨어든 거야? 사람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됐지?”
사람들이 일제히 경악하는 소리에 신재혁이 퍼뜩 고개를 들어 뉴스 화면을 봤다. 건물 안에서, 골목 사이에서, 하수구 밑에서 임프의 초록색 물결이 빠져나와 집결하고 있었다. 지옥문 앞으로.
그들의 집으로 후퇴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들은 지옥문을 향해 전진하는 군대 사이에 끼어들어 진군을 막아섰다. 그 구멍을 공격하게 두어선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았다. 그 본능에 충실하게 악마들이 돌격했다. 이전에 상대했을 때보다 더 원시적이고 짐승처럼 위압적인 돌격이었다. 제 몸을 신경쓰지 않는 자살돌격대가 인간의 군대에 몰아닥쳤다.
군인들도 그 갑작스러운 결집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완전한 전투태세를 갖추지는 못한 채 사방으로 총구를 돌려 마구 쏘아대기 시작했다. 몇백 년간 발전한 현대의 시가전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몇몇 병사들은 엄폐물 뒤에 숨지도 않은 채 돌격해오는 임프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넣었다.
최후의 발악인지 유독 괴물의 공세가 거셌다. 전열의 병사들이 주춤주춤 물러나며 태세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전차의 포격과 수류탄 폭발로 임프 무리를 대량으로 죽이지 못했다면 전열이 붕괴하고 말았을 만큼 거센 공세였다. 전투를 지켜보던 몇몇 눈썰미 좋은 사람들도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괴물들의 모습에 의문을 가졌다.
“뭐지? 유독 거칠게 달려드는 것 같은데.저 괴물들이라면 저렇게 달려드느니 도시 속으로 숨어서 민간인들을 공격하는 게 더 피해가 적었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저 모습은…. 마치 시간을 끄는 것 같군요.”
신재혁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신재혁의 머릿속에 한 불길한 가능성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그 즉시 신재혁이 경찰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건물 앞에 아무렇게나 주차된 경찰차에 탔다. 박성호 경찰관이 임프 떼에게 도망치느라 급히 빠져나와 열쇠가 꽂혀있는 경찰차였다. 운전면허는 없었지만, 드라이빙 게임으로 얻은 얕은 지식을 바탕으로 급히 경찰차 시동을 켜 지옥문을 향해 악셀을 밟았다.
창문 사이로 참혹한 광경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신재혁은 어쩌면 그 광경보다 더 끔찍한 참상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생각했다. 신재혁은 어째서 임프들이 저렇게 막무가내로 묫자리에 달려드는지 생각했다.
임프들은 인간에 대한 증오로돌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악마들은 군대를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 자살 돌격은 시간을 끌어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예컨대, 구원병을.
***
김 병장은 자기를 향해 달려드는 녹색 괴물의 아가리를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 시체 뒤에서 달려드는 괴물이 또 있었기에 방아쇠를 놓지 않고 꾹 압박했다. 드르륵 총구가 연속적으로 불을 뿜으며 시체 다섯 구를 새로 만들었다. 전선에서 잠깐 한눈을 팔아 옆의 전황을 보았다. 동기들이 자신처럼 K2 개머리판을 어깨에 견착하고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야 이 새끼야 집중 안 해? 빨리 쏴-!”
김 병장을 향해 호통이 날아왔다. 정신이 없어서 누구 목소린지는 모르겠다. 김 병장은 다시 전방을 주시하고 손가락을 당겼다. 이제는 익숙한 반동이 어깨를 때리는 감각을 느끼며 생각했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저 괴물들은 뭐지? 분명 평범한 18개월이 되어야 했는데.
남들처럼 선임한테 까이고, 신병한테 갑질 좀 하고. 말년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전역이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씨발….’
울분과 증오를 담아 검은 구체를 노려보며 김 병장이 총을 마구 쐈다. 군대에서 총 한번 원 없이 쏘고 가 보네. 그래, 오히려 좋은 경험이 될지도 몰라. 사회로 복귀하면소개팅할 때 썰로 풀 수 있을지도 모르고….
“어?”
무아지경으로 총을 난사하던 김 병장은 어느덧 괴물의 살인적인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을 느꼈다. 다른 병사들도 그리 느꼈는지 여유를 가지고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봤다. 좌, 우, 후방에서 몰아치는 악마는 이미 다 죽어 나자빠졌기에 군사들은 전방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러니까, 그들의 목표인 악마를 쏟아내는 구멍이 있는 곳을 향해.
“저게, 뭐야….”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밖에 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던 초록 소악마들이 암흑의 소용돌이를 둘러싸고 납작 엎드려 일제히 절하는 비현실적인 광경을.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화염에 휩싸인 거대한 손이 아스팔트 바닥을 내리찍으며 그 아래의 소악마들을 짓뭉개고 시체를 불태우는 광경을.
악마들이 불타 녹으면서도 위대한 악마의 강림을 축하하며 파멸의 축가를 노래하는 광경을.
김 병장은 저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보고 창작물에 자주 등장하는 어떤 존재를 떠올렸다. 북유럽의 한 신화에서 세상의 종말을 선고하는 악마.
온몸이 불타는 거인.
수르트.
각성한 군인들의 시야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보스 메시지였다.
「 ===
두려워하라!
지옥에 흐르는 용암 강의 주인, 불타는 대지의 영주가 현세에 강림했으니.
선봉장으로서 마땅히 인간의 대지를 짓밟고 지옥의 깃발을 꽂아 왕에게 영광을 돌리리라.
그의 이름은 브함-사르닥이요, 첫 번째 왕의 변경백이라.
=== 」
“염세炎世의 악마..?”
각성자 하나가 시스템 창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것은 악마보단 거인이라 부르기에 더 적합했다.
건물 크기의 지옥문조차 그 거인의 몸에 비하면 한없이 작아보였다. 다 큰 성인이 좁은 개구멍을 통과하듯이 불타는 거체가 허리를 숙여 좁은 구멍을 빠져나왔다. 팔, 머리, 몸통, 그리고 다리. 차례차례 거인의 신체가 구멍을 빠져나올 때마다 그 열기에 주변의 임프가 불타 사라졌다. 거인의 발이 딛는 바닥이 녹아 발바닥 모양의 용암 구멍이 되었다.
거인이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저층 건물 꼭대기가 허리에 닿았다. 그거대한 몸집이 하늘을 가렸지만, 지상은 그림자로 뒤덮이지 않았다. 지상에 강림한 태양처럼 악마의 몸에서 뿜어진 불빛이 지상을 밝히고 있었다. 그 빛은 강렬했다. 지나치게 강렬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군대가 뒤늦게 포격을 퍼부었다-고 김 병장은 생각했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군대는 불타는 팔이 구멍을 빠져나올 때부터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단지 악마에게 전혀 피해가 없었기 때문에 군대가 공격하고 있지 않다고 착각한 것이다. 군대가 쏘아낸 포탄과 총알은 거인의 몸에 닿기도 전에 열기에 녹아내려 불꽃이 되었다. 그 화염은 거인의 피부로 흡수되어 악마에게 더 큰 힘이 되었다.
이 악마는 군대와 현대의 화기에 천적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김 병장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좆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