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16화 - 폭풍우와 수라
폭풍우 치는 야심한 밤, 파랑새 한 마리가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날아다니고 있었다. 산과 산, 숲과 숲을 가르고 비가 내리는 평원을 가로질러 날던 새는 주변에 풀밖에 없는 외딴 언덕까지 닿았다. 풀이 흔들리는 언덕 정상에 고풍스러운 저택이 있었다.
저택 2층, 창틀이 화려한 한 창문에서 은은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불빛을 쫓아목적지에 도착한 새가 창턱에 앉았다. 저택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진 방은 집무실 혹은 서재처럼 보이는 방이었다. 화려한 장식품과 수많은 예술 작품이 방의 주인이 상당한 재력가임을 암시했다.
벽에는 염소 머리 박제물이 걸려있었고, 방 중앙에는 넓은 책상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전화기, 노트북, 서류, 만년필 등 각종 잡동사니가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며, 책상 왼쪽 구석에서 축음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축음기에선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의 클래식 명곡, Op.1 D.328이 흘러나왔다. 폭풍우를 연상하는 다급하고 긴박한 피아노 소리가 비바람의 소음을 덮었다.
책상 뒤에는 등받이 거대한 회전의자가 있었는데, 앞면이 의자 뒤쪽의 책장을 향해 있어 창문턱에 앉은 새의 눈으로는 의자에 앉아있는 이의 실루엣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피아노 연주에 훼방을 놓는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기의 소음이 음악 감상을 방해하는 것이 싫었을까, 아니면 전화를 기다리고 있던 것일까? 전화가 울리자마자 의자 등받이 뒤에서 양복 입은 팔이 비쭉 튀어나오더니 전화기를 집었다. 파충류처럼 창백한 손이 전화기를 귓가로 가져갔다.
“네 미스터 B입니다.”
“여기 장팔덕이요.”
기다리던 연락이었다.
“아, 대장장이. 그래, 일은 어떻게 됐지?”
“오늘 그 녀석이 왔다 갔소. 당신이 말한 신재혁이라는 각성자.”
“각성자? 흠, 그럴 수도 있겠군.”
전화기를 잡지 않은 손이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무슨 무기를 주문하던가?”
“단검, 방패, 창 그리고 메이스.”
“…. 알겠다. 그럼 수고하도록.”
핏기없는 손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팔걸이를 두드리는 손가락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메이스라, 미스터 B가 놀랍다는 듯이 그 단어를 툭 뱉더니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 훌륭하다, 훌륭해! 역시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어. 그가 분명해! 나의 호의를 투자한 가치가 있었군-!”
흥분한 남자가 손바닥을 쾅 내리쳤다. 파열음이 웅웅거리며 벽면에 반사되었다. 그 소리는 금세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묻혀 사그라들었다. 첫사랑을 만난 소녀처럼 열띤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좋아, 이것으로 패가 하나 완성됐다! 아니, 완성이 아니지. 이제부터가 시작인 거야. 하지만 시작이 반이니 절반은 온 셈인가-”
따르릉- 따르릉-
그때 갑자기 또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의자 뒤에 숨은 사내의 눈길이 그리로 향했다.
“묘한 일이군. 하루에 전화가 세 번이나 오다니. 더 올 연락은 없을 텐데? 신재혁인가?”
검고 긴 눈썹이 의아함에 찌푸려졌다. 전화를 건 이가 누군지 예상이 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화를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 번호는 중요인물만 알고 있는 직통 전화였기 때문이다.
잠시 망설이다 그가 전화기를 들었다.
“미스터 B입니다.”
“….”
전화기 너머에서는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그가 누군가 모를 상대에게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전화를 걸었으면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 예의 아닌가?”
그제야 전화기 저편에서 사람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됐다.
“나는 곽태우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대격변이 일어나기 전, 한때 세계를 들썩인 살인마의 이름이. 하지만 그가 어떻게 이 번호를 알고 있던 것일까?
“젓가락 살인마! 교도소가 습격당해 무너졌다더니, 용케 탈출한 모양이군. 그래서 무슨 일로, 어떻게 내게 연락을 한 거지?”
그는 천천히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아주 엉뚱하고, 결코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의뢰를 하겠다. 물론 거부권은 없다. 난 네 진명을 알고 있으니까. 이 이름이 알려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군, ■■■■.”
비밀스러운 네 음절이 발음되자 사내의 행동이 갑작스럽게 얼어붙었다.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한순간에 모든 움직임이 정지했다. 누군가 그 모습을 봤다면, 기계 같은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위화감과 기괴함을 느꼈을 것이다. 천천히 두 입술이 떨어졌다.
“…네놈, 어떻게 그 이름을?”
당연히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우문이군. 좋아. 받아들이겠다. 무엇이 필요하지?”
“위조 신분, 전세계 게이트의 위치, 대량의 화기, 실력 좋은 대장장이, 그리고 한 사람의 정보.”
끝없이 튀어나오는 요구에 사내가 비아냥거렸다.
“많기도 하군. 게이트의 위치와 실력 좋은 대장장이라. 직접게이트에 들어갈 생각인가. 각성했나 보군?”
침묵이 그 추측을 긍정했다.
“…. 게이트의 위치 정보는 매주 연락해 갱신받도록 하지.”
“좋아. 그 비밀의 무게에 비하면, 이 정도면 약과지. 괘씸하지만 받아들이겠다. 정보를 구하려는 사람은?”
불타는 목소리가 답했다.
“신재혁.”
대화가 끊겼다. 어째서 저 이름이 튀어나오는 것인가. 사내는 감정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다.
“…이름만으로 어떻게 상대를 찾지. 최소한의 정보는 가르쳐 주어야 하지 않겠나?”
“약 일주일 전, 나에게 면회를 온 조사관이다. 그의 신상 정보, 주거지와 일과 패턴을 원한다.”
신재혁이 면회를 갔을 때, 그의 신경을 건드린 부분이라도 있었나?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니면 단순히 미치광이?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깊이 생각에 빠진 미스터 B가 습관적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마침 축음기에서도 곡의 절정 부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결정을 내려야 할 때다.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의뢰를 모두 받아들이겠다. 대신 두 가지만 물어보지. 비밀을 지키는 가격으로는 너무 형평성이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야….”
“물어라.”
좋아. 미스터 B가 상대의 모든 것을 파헤치기 위해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네행동 동기는 무엇이지?”
“복수!”
격렬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증오에 불타는 이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런 격렬한 감정은 신뢰할 수 있는 법이다. 곽태우의 목소리와 대답을 통해 미스터 B는 그의 정체와 그가 일으킨 사건의 전말을 전부 예상했다. 미제 범행 사건의 윤곽을 잡은 탐정처럼 애써 희열을 참으며 미스터 B가 자신의 가설에 확신을 더해줄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인가?”
잠시 곽태우가 침묵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개인적이며, 동시에 인류를 위한 것이다.”
틱.
뚜우- 뚜우- 뚜우-
전화가 끊어졌다. 방안은 다시 음악 소리로 가득 찼다.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종장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번엔 그가 웃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대신 의자 뒤에 숨은 목소리가 탄식했다.
“과연. 여기까지 꿰뚫어 보았는가. 명성에 걸맞은 통찰력이구나, 현자여.”
등받이 너머에서 튀어나온 손이 책상 위에 전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의자 뒤로 숨었다.
“상대가 모르는 사이 그자의 조커를 우리 손으로 가져왔다. 그것이 우리를 찌를지, 상대를 찌를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상대가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완벽한 상황이군. 드디어 운명을 완성할 때가 왔는가.”
의자 뒤의 누군가 벌떡 일어난 것처럼 발소리가 일었다.
“그에게 연락해야겠다.”
쿠르릉- 콰릉 콰릉-!
창문 밖에서 번개가 번쩍이며 실내를 환하게 밝혔다. 뒤를 향해 있던 의자가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회전했다. 창문에 앉아 쉬고 있던 파랑새의 두 눈이 의자의 주인을 보기 위해 한 쪽으로 쏠렸다. 축음기에서 음악을 마무리 짓는 악보의 마지막 두 음표가 흘러나왔다. 두 음표는 의자가 끼익거리는 소리에 화음을 맞추며 울렸다.
끼익, 끼익...
천천히 회전해 앞쪽을 향한 의자에는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저택에서 폭풍우 치는 밤이 깊어갔다.
***
쿠르릉- 콰릉 콰릉-!
대한민국의 어느 뒷골목, 비밀스러운 아지트 안.
우렁찬천둥소리가 자그마한 방 안에 울려퍼졌다.
소규모 범죄 조직인 삼두파의 아지트였다. 불그스름한 조명이 방 중앙, 소파에 앉아있는 정장 입은 사내를 비췄다. 사내가 귓가에서 스마트폰을 떨어뜨렸다. 탁자에 휴대폰을 내려놓은 손이 파들거렸다. 다른 손으로 떨리는 팔목을 붙잡아 강제로 진정시킨다.
방금의 통화로 증오스러운 사내의 얼굴을 떠올려 버렸다. 그 저주받을 면상을 생각하면 주체할 수 없이 분노가 터져 나온다. 하루, 한시, 아니 일 초라도 빨리 그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자의 무력을 생각했을 때, 자신의 힘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는 악신에게 선택받은 존재다….
“으으으, 살려, 살려줘. 무슨 일이든 할게. 아니, 하겠습니다. 살, 살려주세요.”
신음소리를 들은 곽태우가 고개를 들었다. 등이 문신으로 뒤덮인 남성이 바닥에서 겨우 얼굴만 든 채로 꿈틀거리며 자비를 빌고 있었다. 삼두파의 보스였다.
“제발, 제발. 선생님, 앞으로는 착하게 살겠습니다. 흐흑.”
소규모라지만 엄연히 한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인 남자가 어째서 그렇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는지는 주위를 둘러보면 명백했다. 한때 그의 부하였던, 사지가 찢어지고 두개골에 구멍이 뚫린 아홉 구의 시체들이 방안에 널부러져 있었다.
그 참상은 방 안에서 그치지 않고 문밖의 복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복도 벽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싸늘하게 식은 떡대의 몸뚱아리 아래에 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단검 한 자루와 젓가락 두 쪽 만으로 이 모든 것을 일으킨 괴물을 보스가 노려봤다.
‘악마 같은 놈….’
소파에 앉아있는 곽태우가 피 묻은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부하들과 달리, 자기를 살려둔 채로 내버려뒀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얻은 보스가 소리쳤다.
“나, 나 삼두파의 보스야!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알아? 개성파 보스, 고상수 형님이 있다! 날 건드리면 형님이 가만두지 않을-컥”
삼두파 보스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눈을 깜박한 사이 날아온 단검이 성대에 틀어박혔기 때문이다.
“커-커억!”
사내가 피거품이 이는 목울대를 움켜잡고 컥컥거리다 결국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손에서 힘이 빠지며 그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착각한 게 있는 것 같군. 널 살려둔 건, 내가 휴대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곽태우가 스마트폰 비밀번호를 자기가 아는 번호로 재설정했다. 조금 전 누군가의 생명을 꺼뜨렸다고 믿을 수 없게 태연한 행동이었다.
“이 타이밍이 너희 같은 쓰레기들을 전부 치워버리기 가장 적합한 시간이로군. 경찰은 게이트 사후처리를 하느라 바쁘니 너희에게 주의를 기울일 시간이 없을 테니.”
그 말대로였다. 경찰은 게이트 사태로 발생한 실종자와 사망자를 구분하고 악마의 시체를 찾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더구나 악마들에게서 시민을 지키느라 순직한 경찰관이 많아 경찰은 인력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낱 범죄자들의 사망 사건은 중요도 면에서 후순위로 밀려나다 결국 ‘임프에게 살해된 불쌍한 피해자들’로 끝맺어질 것이었다. 곽태우가 일부러 더럽게 훼손한 시체도 그 결론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의심스러운 정황을 포착한 누군가가 그를 추격하려 한들, 밖에서 쏟아지는 폭우가 그의 흔적을 지워줄 것이었다.
“상태창”
레벨이 올라 있었다. 저레벨에 혼자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다. 쏟아지는 임프의 물량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버티겠지만, 홀로 싸우다가는 결국 체력이 다 떨어지기 마련. 그리고 체력이 떨어지면 그대로 끝이다. 쪼렙에 게이트에 뛰어드느니 이런 쓰레기들을 사냥해서 레벨을 올리는 편이 몇 배는 안전하고 효율적이다. 더욱이 이 작업은 그녀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 사냥감을 생각하다 방금 죽인 삼두파 보스의 단말마가 생각났다.
“개성파라 했나. 다음은 그곳을 처리해볼까.”
자리에서 일어난 곽태우가 혼잣말을 했다. 근처에 있는 시체의 옷소매에 단검과 젓가락에 묻은 피를 스윽 닦아내 정장 조끼 안으로 갈무리했다. 피웅덩이 위를 걷는 구두가 찰박거리며 핏물을 튀겼다.
복도를 걷는 곽태우의 손이 얼굴을 덮었다. 손아귀 사이로 상처받은 맹수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그 눈은 피와 시체의 길을 각오한 수라修羅의 눈이었다. 자기가 꺼뜨린 생명 사이를 거닐면서 수라가 다짐했다.
힘을 키워야 한다. 게이트에 들어가 악마를 죽이고 죽여 레벨을 올려야 한다. 남들보다 몇 배는 빠르고 몇 배는 많이. 그리하여 너를 충분히 죽일 수 있는 힘을 기를 것이다. 너를 넘어설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너의 기일이 될 것이다.
암흑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