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화 〉21화 - 무원無援 (21/72)



〈 21화 〉21화 - 무원無援

“어떡하지?”

신재혁은 자기가 아주 곤란한 처지에 처했음을 알았다.
아주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그는 현재 눈에서 즉사 레이저를 쏘는 석상들 한가운데에 갇혀있었으니까.


다행히 돌기둥 뒤에 숨은 덕에 아직 이 유적의 수호병들에게 감지되지는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그 시야에 포착되는 즉시 죽음의 광선이 날아오리라.

오늘을 위해 기껏 반년 동안 치유 주문과 보호막 주문을 연습했는데도 소용이 없을  같았다. 석상의 공격은 보호막을 유리창처럼 깨트릴 것이었고 그의 몸은 치유 주문을 읊을 틈도 없이 증발할 것이었다. 전생의 신성력이라면 광선을 맞으면서도 몸을 회복할  있었겠지만, 현재 수준에서 그 정도의 재생력은 무리였다.

‘그보다  석상, 마력집광포을 장착한 골렘인가?’

신재혁이 에덴의 과학 상식을 떠올리며 놀라워했다.

마력집광포는 막대한 양의 마나를 극도로 압축해 무엇이든 녹일 수 있는 가상의 무기다. 대마법사, 현자, 혹은 현왕이라 칭송받던 레온하르트 제국의 황제, 헤르메스 레온하르트가 돋보기로 태양광을 모아 종이를 태우는 현상에서 착안한 무기로 알고 있다.

‘마력집광포라니….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하긴, 비문에 따르면 이 유적은 자기가 죽은 거의 300년 후에 지어졌다.  정도 기간이라면 ‘마법사 학살 사건’에서 살아남은 대륙의 마법사들이 지혜를 모아 최첨단 무기를 개발했을 법도 했다.

인류에 이런 결전병기가 존재했다는 것을 깨닫자, 인류 최강의 무력을 지닌 12 영웅이 모두 죽은 후에도 어떻게 인류가 멸망하지 않을  있었는지 납득이 갔다.

에덴에서 지옥 군세의 가장  골칫거리는 임프였다. 고위악마라면 소드마스터나 팔라딘들의 협공으로 어떻게든 쓰러뜨릴 수 있겠지만, 그들조차 끝없이 몰려드는 임프에게는 체력이 다해 목숨을 내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유기체를 순식간에 녹일 있는 강력한 무기를 성벽에 여러 대 설치해두면 확실히 임프를 상대하기 용이했으리라. 물론 고위악마라면 강력한 재생력과각종 특수 능력으로  광선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있었겠지.

“시발….”

물론 이 사실을 떠올렸다고 해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묘책이 생각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상으로만 존재했던 무기의 강력함을 목격하자 신재혁의 자신감은 한꺼풀 꺾여나갔다.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신성 주문이 마땅히 생각나지도 않았다.

그의 갑옷이 아무리 마계철석으로 만든 강력한 무구라지만, 그조차 난생 처음 보는 마력집광포를 견딜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신재혁 또한 그런 멍청한 도박을 감행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이곳에서 존버를 할까?’

지금 탈출한 생존자들도 결국 보스를 쓰러뜨리지 않는  게이트에서 탈출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젠가는 태세를 정비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그때까지 이곳에 조용히 숨어있는다면 생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재혁은 금세  선택지를 포기했다. 그들과 달리 신재혁은 식량과 보급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버티다가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컨디션이 가장 좋은 지금 살길을 찾는 편이 현명하다.

신재혁의 머리가 활로를 찾아 팽팽 돌아갔다.

‘그래!  석판.  석판을 더 해석하면, 이 유적의 방비 시스템을 끄는 방법이 있을지도….’

실낱같은 살길이 눈앞에 드리워지자, 신재혁은 곧장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이 석상은 아마 시야로 생명체를 감지한다….’

여태껏 돌이 부서지고 갑옷 소리가 절그럭거렸는데도 아무 석상도 반응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거의 틀림없었다.

기둥 뒤에서 신재혁은 자기 방패를 살짝 앞으로 들었다. 그리고 방패 뒷면을 마치 거울처럼 이용해 석상들의 위치와 시야각을 확인했다.마치 그리스 신화의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상대할 때 사용했던 방법처럼.

‘좋아.  경로로 가면 안전하겠군….’

경로를 계산해보니, 다행히 안전하게 비석까지 도착할  있을 것 같았다. 도망치는 헌터들을 쫓느라 석상들의 시선이 대부분 입구 쪽으로 향해 있던 덕분이었다.

신재혁은 석상의 시야각이 미치는 범위를 피해 걸음을 옮겼다. 컴퓨터 게임에서 CCTV를 피해 몰래 잠입하는 게임을 하던 경험이 도움이 됐다.

‘역시 게임은인생에 도움이 돼…. 그러니 주여, 앞으로도 게임을 많이 하겠습니다.’

다행히 신재혁은 무사히 제단 뒤에 도착했다. 신재혁의 눈이 이전에 읽지 않은 글귀를천천히 해석해나갔다.

‘지킨다…. 아니, 막고 있다. 강력한. 고대의 악마. 제단.’

수호 골렘들은 이 제단을 강력한 고대의 악마에게서 지키고 있다는 것일까? 신재혁은 잠시 비석의 해석을 멈추고 제단을 조사했다.

제단은 돌로 만들어진  상자였다.

석궤의 뚜껑 위에는 기묘한 모양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보기에도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마법진이었다. 아주 수준 높은 마법사가 설치한 것 같았다.

하지만 마력광을 발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하니, 무슨 용도였는지는 몰라도 이미 효력이 다 한 듯했다. 신재혁은 갑옷 장갑을 벗고 석궤의 빈틈에 손을 넣어 뚜껑을 옆으로 살짝 밀었다.

“역시, 아무것도 없나.”

뚜껑이 살짝 열려있고 마법진이 작동하지않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골렘들이 지키던무언가는 이미 이곳에 없는 것 같았다. 도굴꾼이든 탐험가든, 먼저 접근한 누군가가 이미 석궤 속의 귀물을 가져갔으리라.

혹시 남은 것이 없나-하는 생각에 신재혁의 손이 석궤 벽면과 바닥을 슥 흝었다.

“윽. 이게 뭐야.”

석궤 안엔 무언가 축축한 것이 있었는지, 여전히 마르지 않은 물기로 가득했다. 신재혁은 괜히 찝찝해져서 손을 빼고 옆의 이끼에 손을 닦았다. 그리고 뚜껑을 다시 닫아 석궤 위에 맞춰놓았다.

그러자 갑자기 철커덕,하고 석궤 뚜껑과 본체의 이음새가 맞물리며마법진이 은은한빛을 뿜기 시작했다.

‘이런!’

당황한 신재혁은 급히 자세를 낮추고 석상들의 동태를 살폈다. 혹시 자기가 뭘 잘못 건드림으로써 석상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지 않았나하는 마음에서였다.

신재혁은 다시 자신의 방패-거울을 이용해 석상의 반응을 관찰했다. 의외로 석상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석상들의 눈치를 살피다 안전하다고 판단되자, 다시 일어나 뚜껑의 마법진을 관찰했다.

“무슨 용도지?”

마법진에서 나온 네 가닥의 마나로드(Mana Road)가 석궤의  귀퉁이와 연결됐다. 마나로드는 아주 미약한 마력광을 뿜고 있었다.

그중에서 그나마 선명한  가닥을 추적했다. 그 가닥은 석궤 모서리를 따라 내려가 유적 바닥과 연결되더니, 원형의 파문을 이루며 공터 바닥을 퍼져나갔다.

원형으로 퍼진 마나로드는 석상의 발과 연결되어 있었다. 미약한 마나가 마나로드를 타고 흘러 석상의 발로 들어갔다. 신재혁은 마법에 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었으나, 그조차도 이 현상을 보면 마법진의 용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군. 충전용 마법진인 건가.’

아마 석궤 속에 있던 무언가는 거대한 에너지원이었으며, 그 에너지원을 통해 사원의 골렘을 충전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강력한 악마에게서 얻은 에너지원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강력한 악마가  에너지원을 뺏으려 해서 이를 지킨다는 것인지는 비석을 더 해석해봐야 알겠으나,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그 ‘무언가’가 현재 석궤에서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마력집광포를 사용하려면 막대한 마나가 필요하겠지. 그렇다면 골렘의 잔여 마나만 전부 소모시키면 골렘과 직접 싸우지 않고도 무사히 탈출할  있을 텐데….”

문제는 골렘에 마나가 얼마나 남았는가-였다.

신재혁이 마법진을 다시 쳐다봤다. 마력원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마법진은 이미 빛이 꺼져 잠잠했다.

‘아까 헌터들에게 마력집광포를 남발하느라 충전된 마나가 얼마 없을 터….’

신재혁이 해답을 구하기 위해 비석을 해석해갔다.

“지옥, 악의, 씨앗, 현자, 영혼, 봉인. 이 단어들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거지?”

신재혁은 계속해서 골렘이 마력집광포를 얼마나 사용할 수 있는지 찾아봤지만, 그에 관한 정보는 적혀있지 않았다.

“젠장….”

언제까지고 구조대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신재혁이 고개를 들어 탈출로를 바라봤다. 제단에서 사원 입구까지 연결된 중앙의 큰 도로를.

그러나 그 도로를 따라 탈출하기에는 양옆에서 침입자를 죽이기 위해 대기하는 골렘들의 존재가 너무나 위협적이었다. 곳곳에 헌터들의 시체가 널려있었다.

“!”

돌바닥 위에 널부러진 헌터들의 몸을 살피던 신재혁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뜨였다.

몸뚱아리 하나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생존자였다.

시력을 집중하여 바라보니, 처음 게이트에 입장했을 때, 물웅덩이를 밟았다고 불평하던 이재연 헌터였다. 그녀의 친구이자 이 참사의 원흉인 김지민 헌터는 이미 반으로 갈라져 내장을 쏟아내며 이재연 옆에서 죽어있었다.

‘저 위치는 아슬아슬한데..!’

바닥에 엎드린 상태라 운 좋게 석상들의 시야각에서 벗어났지만, 조금이라도 몸을 일으키는 순간 석상의 시야에 포착될 것만 같았다.

어떡하지? 조심하라고 소리쳐야 하나? 하지만 부상 입은 그녀가 그의 말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신재혁이 망설였다.

직접 가봐야 하나? 너무 위험한데-

환청이 들렸다.
신재혁보다 먼저 땅에 묻힌 망령의 저주였다. 이런 고된 선택의 순간에서, 그가 망설일 때마다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스승님의 음성으로 말했다.

망설이는구나.
너는 또, 도망치겠다는 것이냐?
그때처럼?

“젠장..!”

신재혁이 이를 악물었다. 그 치악력에얼굴 근육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에는 실핏줄이 살짝 튀어나왔다. 충혈된 안구에 비치는 것은 무너지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구 교황청 건물의 모습.

결코, 그때처럼은….

신재혁의 충혈된  눈이 재빨리 광장을 살폈다. 아슬아슬하겠지만, 어떻게든 석상의 시야에 닿지 않고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재혁이 다급히 몸을 일으켜 이재연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

“개새끼들! 칼을 들고 있으면 칼로 공격해야지, 왜 레이저를 쏘고 지랄이야..!”
“생존자 인원 파악해서 보고해! 어서!”
“크리스마스에 왜 이런 일이…. 엄마한테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얘기했는데….”
“강용식씨! 강용식씨 계십니까? …. 이대수씨! 이대수씨 계시면 대답해 주십시오!”

사원 앞은 멘탈이나간 사람들의 울음소리, 생존자의 신원을 파악하는 목소리, 절망에 빠진 목소리로 가득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아있었고 군인 몇 명만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누가 살아남았는지 확인했다.

“으으으….”
“조금만 참으십시오. 자, 붓습니다….”
“크으읍-!”

다른 군인은 군에 지급된 포션으로 위급한부상자를 치료했다. 그럼에도 포션은 부족했는데, E급 게이트에 다닐 헌터들의 재력으로는 포션을 구비하기엔 값이 상당히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젠장, 상황이 좋지 않군. 너무 좋지 않아.”

늘상 침착함을 유지하던 하정재 지휘관도 이번만큼은 초조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는지, 얼굴을 구기며 군화 신은 발로 돌바닥을 신경질스럽게 두들겼다. 돌바닥은 빌어먹게 단단해서 되려 그의 발끝만 얼얼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일단 생존자들을 먼저 추스르고….’

“소대장님! 신원 파악 끝났습니다.”

피로에 지친 군인의 목소리가 그의 귓속으로 파고들며 고민의 실타래를 끊어냈다. 지휘관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보고해.”
“입장 인원수 29명 중 현재 생존자 수는 12명입니다!”
“젠장….”

지휘관의 입에서 욕짓거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첫 교전에서 거의 절반의 인원이 사망했으니, 앞으로 어떻게  석상을 뚫고 보스를 처리할지 막막했다.

두 군인의 대화를 엿듣던 헌터 하나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뭐? 12명?”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어조였다.

“시스템에는, 생존자 수가 13명이라고 나오는데?”

그 말을 들은 하정재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의미는,

“석상들 사이에, 아직 한 명이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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