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23화 – 리-템
신재혁은 이리저리 곡예를 펼치며 반투명한 손들을 피했다. 육중한 갑옷을 입은 상태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날랜 몸놀림이었다.
“부정형不定形 악마! 슬라임이냐-!”
“가암히À§ 폐하의 기만의 권능ÖÁö¸¸을 그딴 미물에 빗대다Unix¿î¿니이-!!”
신재혁의 말이 악마의 화를 돋운 것 같았다. 수십 가닥의 반투명 촉수가 이재연의 작은 등에서 우루루뽑혀 나오며 더 격렬하게 손을 뻗어왔는데, 그 모습이 말미잘을 연상시켰다.
‘그보다는 곤충 등에 기생하는 동충하초를 더 닮았나!’
신재혁의 기감에 퇴각로를 가로막으려는 여덟 개의 촉수가 포착됐다. 신재혁이 몸을 비틀어 돌파를 시도하다 이대로는붙잡히겠다고 생각하고는 신성 폭발의 아리아를 외쳤다.
“삿된 것을 물리치는 광휘여-!”
빛의 충격파가 허공을 때리자 그를 덮치던 반투명한 손들이 살구색 빛깔을 되찾으며 튕겨 나갔다.
악마가 고통에 겨워 비명을 지르는 사이, 신재혁은 재빨리 악마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저 손에 한 번 붙잡혔다가는 순식간에 증식하는 살덩이에 묻혀서 절대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붙잡히지 않겠다 해도, 그게 마음대로 될까?
‘석상들 때문에 이대로 도망치기만 하는 건 무리야….’
스치기만 해도 사망인 즉사 함정이 지천에 널린 보스방에서 한 번도 붙잡히지 않고 보스를 쓰러뜨려야 하는 불합리한 상황이었다. 게임이었다면 밸런스 패치가 뭐 이따구냐고 개발진들이 욕을 한 바가지는 얻어먹었을 불합리한 난이도.
지금은 어떻게든 석상과 악마의 공격 범위를 모두 피하고 있었지만, 곧 구석에 몰리면 도망칠 곳이 사라질 것이었다. 그럼 악마는 제 몸을 잔뜩 부풀려서 퇴로를 가로막겠지. 그러면 정말로 끝이다. 그 전에 무언가를 해야 했다.
신재혁은 눈동자를 굴리며 광장을 훑어봤다. 제단, 돌길, 석상, 시체 더미, 돌기둥. 슬라임 악마와 석상들에게서 모두 안전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그래,저기다!’
신재혁의 눈에 절반쯤 부서진 거대한 돌기둥이 보였다. 신재혁이 방패를 등에 메고, 대신 단검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낮췄다.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이 긴장되면서 발끝에 힘이 집중됐다.
쾅-!
신성력이 하체를 강화함과 동시에 신재혁의 신형이 위로 솟구쳤다. 그를 잡기 위해 보이지 않는 손들이 뻗어졌으나 그는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휭 회전해 악마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리고 회전하던 힘 그대로, 창과 단검을 동시에 휘둘러 돌기둥에 푹 박아넣었다.
마계철석으로 만든 창과 단검은 부드럽게 돌기둥 옆면에 박혔다. 양손의 무기를 잡고 기둥 옆면에 대롱대롱 매달린 신재혁이 하체로 기둥을 안아 신체를 고정했다. 안정적인 자세를 잡자, 그는 단검을쥔 왼손을 기둥에서 뽑아 더 위쪽에 박았다. 그다음은 오른손의 창을.
신재혁은 마치 암벽등반을 하는 등산가처럼 창과 단검을 번갈아 돌기둥에 박아넣으며 돌기둥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평범한 암벽등반과 달리, 몸무게는 물론 갑옷과 장비의 무게까지 모두 두 팔의 근력으로만 끌어올려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신성력을 이용한 신체 강화가 없었다면불가능할 일이었다.
“크….”
다행히 첫 점프에서 기둥 높이 반절 이상의 위치까지 도달했기에, 얼마 있지 않아 그는 돌기둥의 정상에 도달했다.
“여기까지는 못 올라오겠지!”
저 악마의 손이 뻗치기에는 많이 높아 보였다. 게다가 이 위는 석상의 시야에도 비치지 않는 훌륭한 피신처였다. 신재혁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과연 리-템이 그를 쫓아 기둥 밑단에 도착하자, 그는 잠시 멈칫거리더니 등에서 길다란 촉수손을 뻗었다. 촉수가 쭈우욱 길어지면서 점점 기둥 위로 올라왔고, 동시에 점점 가늘어졌다. 어느새 촉수는 더 길어지지 못하고 파들파들 떨리더니, 먹잇감을 잡지 못해 화가 난 듯 돌기둥을 쾅쾅 때려댔다. 곧이어 분노로 가득한 포효가들려왔다.
“C¾ð내려와´©°¡라아-, 이 벌레야아±×·¡¹아아──!!!”
신재혁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
숨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기자, 신재혁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았다. 그는 우선 상황을 정리해보고자했다. 비석문의 내용과 리-템의 말을 조합해보면 일의 전후 사정이 명확해질 것이다.
자신의 추측에 따르면 이 사원은 거대한 에너지원을 지키고 있는 유적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원이 바로 악마인 리-템이다.제단에 갇힌 리-템에게서 마나와 마기를 뽑아내는 것으로 리-템을 약화 및 봉인하고, 유적의 수호병인 골렘들을 충전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린 것. 누가 설계했는지 몰라도 상당히 영리한 방법이었다.
‘저놈의 말대로 리-템이 진짜 사탄의 최측근이었다면, 그가 이렇게 약할 리가 없다. 원래는 최상급 악마였겠지만 오랜 기간 봉인된 탓에 힘을 대부분 빼앗긴 것이겠지….’
지금의 리-템은 중급 악마, 잘 쳐줘도 상급 악마 수준으로 보였다. 봉인 상태였던 그는 모종의 방법으로 봉인궤에서 탈출한 후, ‘기만의 권능’이라는 것을 이용해 몸을 변화시켜 물웅덩이로 위장해 있던 것이다. 자신의 힘을 회복하기 위한 숙주를 찾기 위해서.
‘아마 그 과정에서 게이트 속에 살아 움직이던 다른 생명체를 모두 포식했을 테고, 물웅덩이를 밟은 이재연 헌터 역시 희생양이 된 것이겠지.’
신재혁은 기둥 끝으로 접근해 이재연의 형태로 기둥 밑에 달라붙어서는 난동을 부리는 악마를 슬쩍 쳐다봤다. 밑에서 그렇게 난리를 피우는데도 석상들은 아무런 반응 없이 단지 지켜만 보고 있었다. 왜 골렘이 녀석을 공격하지 않는 거지? 이 유적은 봉인된 리-템을 지키기 위한 시스템이 아니었나?
“과연, 이것 역시 기만의 권능이라는 것인가.”
신재혁은 리-템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 사탄에게서 부여받았다는 기만의 권능. 말 그대로 무언가를 속이는 것에 특화된 능력인 것 같았다. 어쩐지, 몇 리 밖의 악마도 감지할 수 있는 파마의 룬이 고작 두 발자국 거리에서야 악마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점이 의아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저 석상도.’
본래라면 누군가 악마를 탈출시키기 위해 침입자가 접근하던가 악마가 봉인에서 풀려나면 마력집광포 세례로 침입자나 악마를 죽이는 것이 골렘의 역할일 터인데, 하필이면 상대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리-템은 필히 기만의 권능으로 골렘의 감지체계를 속이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역시 저 석상들은 게이트 클리어 조건과 상관이 없다는 말이겠고,’
게이트 클리어의 조건은 게이트를 유지하는 핵의 역할을 하는 보스를 쓰러뜨리는 것. 석상과는 상관없이 단지 리-템을 죽이면 게이트가 클리어될 것이었다. 신재혁에겐 차라리 그것이 더 희망적이었다. 지금의 자신이 혼자 석상들과 리-템을 모두 물리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하지만 신재혁이 평생 상대해 온 악마라는 생명체만이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상대는 약화된 악마였고, 자신은 악마에게 상극인 신성력이라는 힘이 있었다. 신재혁의 두 눈이 희망으로 번뜩였다.
희망을 품은 성기사가 주를 향해 기도했다.
“엘로아흐여. 당신의 빛을, 나의 손으로. 그 형태는 창, 그 성명聖名은 번개.”
신성 주문, 뇌창雷槍.
빛의 신이신 엘로아흐의 힘을 빌려 번개의 창을만들어내는 신성 주문.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 몇 개월간, 얼어붙은 신성력을 녹이는 꾸준한 수련으로 다시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 신성 주문 중 하나였다. 현재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원거리 공격 기술이었다.
신재혁이 마음속으로 창의 형태를 그렸다. 그의 의지에 응해 손바닥 위에 신성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신성력은 실처럼 가닥가닥 엮이며 긴 창을 만들어냈다. 타닥, 타닥. 극도로 응축된 빛의 창에서 스파크가 튈 때마다 전광이 번뜩이며 신재혁의 발아래 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신재혁이 투창 자세를 잡고 기둥 아래의 리-템을 정조준했다. 각도가 예뻤다.
“먹어라-!”
투-콰앙-!
기둥 위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힌번개는 리-템의 몸통 중앙에 정확히 박혔다. 그리고 창이 박히고 나서야 뒤늦게 우렛소리가 울렸다.
쿠르릉-! 콰쾅-!
K̴̮͐͋̾̾͒͐͆̃̏̒̈́̕̚͠ķ̶̛̲̣̮͐̒̈́̓̏͗͆͛̚ͅķ̵̧̱͙͈̺̞͍̭͉̳͚̫̞͔͝ŕ̵͔̣̺̞̭͗̅̿̆̎̈́̈́̂̔̆͑͝ȃ̶̟̯̹͎̻̩̐̇͠ą̵̤̼̠̹̥̹̲͇͙̗̙̯͐̓͗̂̐̈́́͛̄̐́̚͝͝ͅͅȁ̷̢̠̻̪̀̄͋͛́̋̇̒͛́a̶͔͙̔́̈́̀̐̚ȇ̸̢̜̲̱̠̰̗̖͔̻͋̐̍͛̒̈́̎̾͂ẹ̷̯͕̟̤̱͓͈͉̼̱͊͂̒̕͠͠ẽ̶̡̜̜͙̼̹̊į̴̼̙͙̙̫̓̐̋̔̐͠ḡ̵̛̰̬̜̙̠̝̱̓͛͆͛̇̈́̽̀̿̇͛̋͘g̶̡̩͓̺̥̺̩͔̫̘̹͛̓̈̍͗͒̓́̈́̂̃̇̃̋͝ǵ̶̘̮͖̙͔̭͚̠̗̬͒̊͊͋͗̿͗̎̚̕͠͝h̴͓͐́̋́̏̏͗̽̆̇̚ḧ̶̡̙̠̤̖̬̺̼̘͓̙̼́̐̂̎͌̑͋̈͛͋̊̽̕͘ͅͅẖ̵̡̰͎̗͎̰̭͌͛́̿̉͒̋̒̋͂̕͘͜͝h̸̤̫̯̜̙̝̪̜͚͔͖̫̲̲̼̄͗̑͂̋̑̽̐̐̓͠h̴̢̢̬͛̏̈́̇̎̕ḧ̶̡͔̝̝̗̭͚͍̲̏͑͗̋͐̓̆̃̅͝͝h̷̖̣̣͇͈̜̫͓̲͇͖͔̮͂̀̄͜h̶͙̱̞̭̋̐̒̅͒̄͘-̴̢͎̟̼̘͎̖̮͕̭͓̪̣̊̈̿͗͋̃͐͛͘͜!̶̢̡̛̭̦̳̼̺̮̭͖̠͍͙̀͛̏̿͌͋͛̀̏̓!̴̢̠̼̲͈̐̎̈́̒̋̉̒͐̄̀͋̕̚͘!̸̡̯̩̺̃̏
웅장한 천둥소리를 반주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여태껏 들었던 비명 중 가장 크고 처절한 소리였다. 몸통에 뇌창이 박힌 악마가 고통에 몸을 이리저리 비틀자, 그 몸에서 뻗친 수십 가닥의 촉수도 사방으로 발작해댔다.
“좋아!”
확실히 지금의 공격은 치명타인 것 같았다. 성기사가 자신의 내면을 관조했다. 영혼의 형상을 둥근 플라스크로, 신성력을 그 속에 담긴 성수로. 5분의 4 정도 높이에서 성수가 찰랑거렸다.잔여 신성력은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이대로 뇌창을 몇 발만 더 맞추면 리-템을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거물이라 걱정했더니, 이렇게 우주 방어를 펼치니 의외로 간단한 상대였군.’
그렇게 생각하며 재차 뇌창을 소환하려던 참이었다.
쿠우웅-! 쿠우웅-!
육중한 타격음에 맞춰 기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재혁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재빨리 고개를 숙여 기둥 아래를 관찰했다.
리-템의 등에 붙어있는, 몽둥이로, 망치로, 어쩌면 도끼로 보이는 거대한 촉수가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돌기둥을 두드리고 있었다. 수십 갈래의 촉수를 하나로 합쳐 두껍게 만든 것이었다. 질량이 커진 만큼, 그 파괴력 또한 더 위협적이었다.
“젠장, 오늘은 마음대로 풀리는 일이 없군..!”
거대촉수는 계속해서 돌기둥을 두들기고 있었다. 이젠 기둥이 기우뚱거리기 시작하는 것이, 곧 밑둥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빨리 무엇인가 액션을 취해야 한다.
‘일단 뇌창을 한 방 더 먹일까? 아니면 기둥이 곧 무너질 테니, 착지를 준비해야 하나?’
신재혁이 잠시 두 선택지 사이에서 갈등했다.
‘도끼질에 정신이 팔린 사이 몰래 기둥 밑으로 내려가자. 돌기둥이 무너지면서 균형을 잃으면 리-템 뿐 아니라 석상까지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 그건 너무 위험해. 차라리 지금 먼저 빠져나가는 것이 안전하겠지.’
결단을 내리자마자 신재혁은 단검을 다시 쥐고 리-템이 볼 수 없는 방향에서 돌기둥을 내려갔다. 본래는 내려가는 일이 올라가는 일보다 쉬웠겠지만, 지금은 리-템의 도끼질 때문에 기둥이 앞뒤로 기우뚱거리고 있어서 도리어 내려가는 일이 훨씬 어려웠다.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조각배처럼 양팔로만 기둥에 달라붙은 몸이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탁-!
‘됐다! 이제 조용히 도망쳐야..!’
겨우 바닥에 도착한 신재혁은 악마가 눈치채지 못하게 돌기둥에서 멀어져, 다른 기둥 뒤에 숨었다. 절그럭거리는 갑옷 소리는 돌기둥이 부서지는 소리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신재혁이 기둥 뒤로 몸을 피신한 직후 반쯤 부서진 돌기둥이 크게 기우뚱거리더니, 나무꾼이 밑둥을 베어낸 나무처럼 천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질량의 돌덩어리가 바닥과 부딪히자 폭탄 터지는 소리가 발생하면서 돌조각이 튀었다. 애써 기둥을 넘어뜨렸는데 신재혁을 찾지 못한 리-템이 발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어디이ÆÁ에 Á·Î±있냐아아Á¤È─!!!”
신재혁은 자욱한 먼지구름 속에 몸을 숨긴 채 조용히 아리아를 읊었다. 당신의 빛을, 나의 손으로. 새로운 뇌창이 그의 손 위에 만들어졌다. 신재혁은 뇌창이 형성되자마자 먼지의 커튼에 비치는 흐릿한 실루엣을 향해 뇌창을 던졌다. 비명이 들려왔다.
K̵̞̫̮̮̣̗͕̹̱̭͉̹̟̬͋̀̃́͘k̷̨̪̹͇̣̞͚̲͙͇̀̈́k̴̨̡͓͇̣͉̖̜̞̦̄̇̄̿̓̌̋͜ȑ̴̛̘͔̥͖͊̒̃̃̋͊͑̑͊̆̕͝a̸̩͎̹̠̘̖̥̜͔͖͕̮͠ͅͅa̸̛̯̪̻͍̻̺͖̮̫͓͗͊̋̓̉͐̈́̇̍̍͒̚͝=̷̡̨̡̢̱̯̠̖̠̖̦̫͐̆̚̚
그리고 비명은 비정상적으로 짧게 멈췄다.
불길한 징조였다.
“거어ó´Â°Ç ¾Ë°í 기이 구나아Û ÇÁ·Î아아-!!!”
뇌창이 날아오는 방향을 통해 신재혁의 위치를 눈치챈 리-템이 먼지구름을 뚫고 달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