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화 〉27화 - 아브라함Abraham (27/72)



〈 27화 〉27화 - 아브라함Abraham

보육원에서의 봉사활동을 마친 신재혁은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그레이스 수녀의 권유도 마다하고 혼 빠진 사람처럼 비척비척 귀가했다. 초저녁의 찬공기가 머리를 식혀 신재혁의 우울증은 어느 정도 진정이  상태였다.

그가 집 지하 자신의 컴퓨터 앞에 앉아서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웃긴 게시글을 뒤지며 기분을 추스르고 있던 참이었다.

♬~ ♬~

별안간 스마트폰에서 들려오는 알림음에 신재혁이 돌아봤다. 전화였다.

“하루에 전화가 두 통이나 오다니! 오늘 무슨 날인가.”

범상치 않은 날임은 틀림없었다. 전화번호부가 A4용지 한 장도  되는 그에게 이런 날은 극히 드물었었다. 신재혁은 이  번째 전화가 길조일지, 망조일지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떨리는 마음으로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누구지?”

차은경이었다. 자신에게 가끔 사건의 뒷조사를 의뢰하는 여경. 오랜만에  연락이었다. 그녀와는 게이트가 열린 후 서로 너무 바쁜 나머지 연락이 거의 오가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신재혁이 귓가로 스마트폰을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야! 너, 나랑 일 하나만 하자.”

몇 달 만에 듣는 목소리가 인사도 없이 버럭 소리 질렀다. 대뜸 들려오는 소리에 신재혁이 황당함을 금치 못하며 딴죽을 걸었다.

“안부도 안 묻고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그리고 연락할 때마다 일거리를 가져오면서 뭘 맨날 하나만이래.”
“하하, 그러게. 그럼 은퇴할 때까지 쭉 부려먹어야지.”
“하아….”

저런 뻔뻔한 대답이라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너랑 나는 윈-윈 관계 아니야?”
“제가 얻는 이득이 어딨는데요?”
“네 얄팍한 전화번호부가 조금이나마 두꺼워졌지!”
“….”

유쾌한 어조로 뼈를 때리는 그녀의 지적에 신재혁이 침묵했다. 순식간에 원투 펀치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얼얼했다.

기운이 쭉 빠진 신재혁이 물었다. 무슨 부탁인가 들어나 보자-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요즘 내가중앙경찰청으로 인사 이동한 거 알지?”
“아뇨, 처음 듣네요.”
“그럼 내가 각성했다는 소식은?”
“누나가? 각성이요? 금시초문인데!”

반년 넘게 그녀의 소식을 못 들은 신재혁이었기에 그 말에 놀라움을 숨기지 않았다.

“아, 내가 말한 적이 없던가? 하하, 요즘 너무 바빠가지고…. 일 년  가장 바쁜 날이 매일매일 계속되는 느낌이야.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네.”

그녀가 머쓱하게 웃었다. 가벼운 말투와는 달리 목소리에 피로가 묻어나왔다.게이트 때문에 순직한 경찰이 많아 인력이 부족하긴 한 모양이었다. 신재혁은 괜히 측은함을 느꼈다.

“무슨 스킬을 각성했어요?”
“별건 아니야. 칼질만 좀 잘하게 되는 정도.”

그녀가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번에 신설된 부서로 특수 능력 처리반이 생겼는데, 내가거기 과장을 달았어. 새로운 부서긴 하다만 경위였는데 경장이 됐으니 2계급 특진이지. 각성자라는 것도 가산점이 있겠지만, 1차 게이트 사태 때 너한테 소식 듣고 열심히 뛰어다녔던 게 도움이 컸나 봐.”
“오, 축하해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신재혁이 감탄하며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아무리 신재혁이 소식을 일찍 전해줬다 해도 그걸 헛되이 하지 않고 유용하게 이용한 것은 전적으로 차은경의 공이었다. 분명 사태 초기에 상사들을 설득하고 부하들을 지휘하느라 진땀을 뺏겠지.

“그래, 고맙다. 특능반이 뭐하는 곳인지는 이름으로 딱 느낌이 오지?”

잠시 상황을 조합하다 자신의 추측을 넌지시 말했다.

“뭐…. 각성자 관련 사건 사고를 처리하는 부서겠죠. 요즘 연락이 뜸했던 건 처음 맡는 부서를 준비하느라 바빴던 걸테고. 갑자기 연락이 왔단 건, 특능반에서 해결할 수 없는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단 것이겠죠?”
“그렇지. 해결할 수 없다기보단,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어서 조사를부탁하기 위한 것이지만.”
“어떤 일이길래?”

그녀가 자꾸 뜸을 들이자 신재혁이 그녀를 재촉했다.

“음…. 사실 거의 9개월  이야기기는 한데, 그러니까 1차 게이트 사태가 있던 직후에 말이야. 그때 서울의 몇몇 조폭 조직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있었거든. 그때는 바빠서 자세히 조사할 여유도 없었고, 한창 살아남은 임프들이 도심으로 숨어든  이슈여서 우리도 단순히 그게 임프의 소행이라고 넘겨짚었지.”

그녀가 잠시 목을 가다듬고 설명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제 좀 여유가 생겨서 다시 생각해보니, 임프가 죽였다기엔 상처가 너무 깨끗한 시체도 많았고 상처 위치도 어색했어. 누가 임프의 공격을 따라한 것 같았다고나 할까…. 물론 단순히 내 기우일지도 모르지만, 요즘 조폭 조직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이것도 어쩌면 조폭들이 세력 확장을 위해 저지른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세력 확장?’

만화 같은 이야기였다. 조폭들 간의 다툼이라니. 여기서 닌자몰살만 등장하면 완벽한데.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신재혁이 귀를 기울였다.

“각성자가 등장하면서 조폭들 정세가 심상치 않아. 고등급 각성자 한 명이 조직 하나를무너뜨릴 수도 있는 시대가 오니까 뒷세계도 술렁거리고 있는 거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조직들끼리 서로 합치고, 분열되고 하면서 난리도 아니었어. 완전 고대 중국의 5호 16국  자체였는데.”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요?”
“대부분의 인원이  개의 조직으로 나뉘어 흡수되며 정세가 안정됐어. 하나는 부산항 근처의 적룡파, 다른 하나는 인천항 근처의 흑사파지.”

신재혁이 옛 기억을 더듬었다. 그가 고등학생 때쯤 해결사 일을 하다가 들어본 이름 같았다.

“흑사파는 들어본 것 같은데. 게이트 이전부터 총기 밀수로 꽤 잘나가는 조직 아니었나요? 적룡파는 처음 들어보는데 부산항 근처라는 걸 생각하면…. 역시 항구 쪽 조직이 밀수에 유리하니, 이런 정국에선 급격히 성장할  있었겠죠.”

아웃브레이크형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악마들을 상대하거나 상대 조직의 각성자를 처치하기 위해 조폭들에게도 총기가 중요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요즘처럼 군수 사업이 호황일 때 밀수도 활발한 법이었다.

“잘 알고 있네..? …아무튼. 적룡파는 신흥 조직인데, 각성자를 등급에 맞게 대우해주는 것으로 유명해서 수많은 각성자들이 입단하고 있어. 반면 흑사파는 기존의 질서를 바라는 조폭들이 하나로 합쳐진 세력이고.”

그녀가 확신하지 못하는 말투로 설명을 계속했다.

“아무래도 흑사파는 각성자 수가 적룡파보다 적다 보니 세력 싸움에서 위협을 느낀 것 같은데…. 우리 쪽 첩보원이 얼마 전부터 인천항 근처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컨테이너를 내리는 장면이 자주 포착된다더라.”

신재혁이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범죄계의 떠오르는 샛별, 굴러온 돌을 견제하는 박힌 돌, 갑자기 늘어난 화물…. 대충 알만한 스토리였다.

“그러니까, 흑사파가 적룡파랑 크게 한탕 하기 위해서 총기로 추정되는 화물을 대량 밀수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누나는 그 화물의 정체나, 조폭들을 입건할 수 있는 증거를 바라는 것이고.”
“역시! 척하면 척이네. 이래서 내가 너를 좋아한다니까. 내 밑에 놈들은 얼마나 답답한지….  반이라도 하면 좋겠네. 에잉, 쯧쯧.”

그녀가 노인네 흉내를 내며 장난스럽게 혀를 찼다. 그녀가 신재혁의 눈치를 살피다 물어왔다. 은근한 기대감이 담겨있었다.

“그래서, 괜찮지? 조직 컴퓨터나 항구 쪽 기록만 해킹만 해주면 돼. 간단한 일이잖아.”
“흐음….”

하긴 요즘 할 일도 없어 한가한 편이기는 했다.

‘그리고 착각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불길한 느낌이 드네.’

세달 전, 그가 게이트에서 인간으로 둔갑한 리-템을 보며 느꼈던 불안감이었다.

어쩌면, 인간으로 둔갑한 악마가 이미 인간 사회 깊숙이 숨어든 상태가 아닐까.

과연 이 세계에 미친 어둠의 손길이 존재하는지 조사하기 위해서라도 범죄조직들을 쑤셔볼 필요는 있었다.

그리고 그런 흑막이 없더라도 상관없었다. 고작 밀수 증거 확보인데, 뭐 별거 있겠나?

신재혁이 가벼운 마음으로 끄덕였다.

“좋아요. 한번 해볼게요.”

***

“죄송합니다, 아버지.”
“….”

고층 빌딩 꼭대기, 화려한 집무실 안에서 정장 입은 40대 남성이 책상 뒤에 앉아있는 노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직각으로 굽혀진 허리가 사뭇 비굴해 보였다.
중년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은 부자 관계인  같았다. 하지만 평범한 부자 관계라기엔, 그의 말투가 너무 경직되어있었다.

노인의 책상 위는 각종 차트와 표가 그려진 서류로 가득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이 서류 하나를 쥐었다. 차트의 내용을 이해하자 자연스럽게 손에 힘이 들어가며 종이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
3월 27일 수정물산 –5.1% 수정해운 –4.3% 수정건설 –3.7% …
3월 28일 수정물산 –4.4% 수정해운 –4.6% 수정건설 –1.5% …
3월 29일 수정물산 –5.9% 수정해운 –3.8% 수정건설 –2.2% …
===

파란색 숫자들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습관적으로그의 시선이 책상 위의 명패로 향했다. 멋들어진 용문양 사이에 ‘수정기업 회장, 송수정’이란 글씨가 음각된 명패였다. 노인의 손이 부들부들 떨며 명패로 향하자, 그의 눈치를 보던 중년이 몸을 움찔 떨었다.  날아올 날벼락을 예상한 모양이었다.

그로서는 다행스럽게도, 노인은 심호흡을 몇  하더니, 가까스로 화를 참아냈다.
한층 수척해진 얼굴의 노인, 송수정이 한숨을  내쉬며 둘째 아들, 송수권을 쳐다봤다.

자식 교육이란  얼마나 쓰잘데기가 없는 건지 재차 체감했다.
자식이라는 건, 그에게 늘 부족함만 느끼게 했다.

“그놈이 살아 있었더라면….”

그는 자신의 첫째 아들, 송수형을 떠올렸다.
젓가락 살인마라는 웬 미친 싸이코 새끼한테 걸려 세상을 어이없게 뜬 아들을.

한때는 암살 의뢰를 넣은 뒷배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부회장 자리를 욕심낸 둘째 놈이 꾸민 음모라고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국정원에 사설 의뢰까지 넣어 조사한 결과, 곽태우는 진짜로, 단순히, 그냥 아무나 찌르고 다니는 정신병자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직도 그 사건을 생각하면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인생이 마냥 허탈하게만 느껴졌다.

송가家의 장남이자 수정기업의 부회장이었던 송수형은 꽤 훌륭한 사업가였다. 그 깐깐한 송수정의 마음에  드는 부회장이었으니. 직접 해외로 나가 상대 기업의 회장과 담판을 벌여 사업을 따  정도로 유능한 임원이었는데….

송수정이 송수권을 바라봤다. 제 형과 달리 아주 무능하기 짝이 없는 동생놈을.
부회장 자리에 앉은 이가 유능한 사람이었다가 무능한 사람으로 바뀌니, 첫째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저 망나니 같은 새끼..!”

그가 뒷말을 삼켰다.
차라리 저놈이 죽었어야 했는데.

노인은 기분이 침울해졌다. 자신은 늙고, 병들었다. 옛날과 같은 젊음과 혈기는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자기는 경영에서 거의 물러나 회장 직위만 유지하는 뒷방 늙은이에 불과했다.

차라리, 차라리 나였다면….

울글불긋했다가 푸르댕댕했다가 거무죽죽했다가, 온갖 색으로 변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힐끗힐끗 살피던 송수권이 아버지의 책상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버지! 책상에 주먹만 한 독거미가!”

 말대로였다. 고급스러운 원목으로 만든 책상 위에 커다란 거미가 있었다. 책상 한쪽 다리를 타고 올라온 거미는 어린아이의 악몽에 나올 만큼 거대하고 징그러웠다.

거미를 본 송수정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에게서 쉬이 찾을  없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아버지가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화들짝 놀랐다고 생각한 송수권이 거미를 잡고자 몸을 날렸다. 지금이라도 아버지에게 충성심을 보이고 점수를 좀 따 보려는 얄팍한 속셈이었다.

“아버지, 조심하세요! 제가 잡겠습니다!”

그러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정신을 차린 송수정이 팔을 들어 아들을 저지했기 때문이다.

“…썩 꺼져.”
“예, 예?”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나가라고-!”

기어이 늙은이의 입에서 노호성이 울려터졌다. 그 험상궂은 축객령에 송수권은 전신을 찔끔하더니, 곧바로 허리를 꾸벅 숙이고 방에서 뛰쳐나갔다.

아들이 문밖으로 완전히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송수정이 자리에 다시 앉았다. 책상의 버튼을 몇 개 누르니, 철컥하고 회장실 문이 잠기며 조명이 모두 꺼졌다. 어둠이 방을 집어삼켰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도시의 불빛만이 희미하게 방안을 비췄다.

송수정은 별조차 비치 않는 깜깜한 밤하늘을 잠시 바라보다 심호흡을 했다.
그러더니, 책상 위의 거미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의 방문이시군요.”

직원들이 보면 늙은이가 드디어 치매에 걸렸다고 수근거렸을 광경이었다.
거미에게 말을 걸다니!
하지만 다음에 일어난 광경은 치매에 걸린 것은 자기가 아닐지 의심할 정도로 놀라웠다.

거미의 몸이 요동치며 뒤틀리기 시작했다. 거미의 배가 크레바스처럼 양쪽으로 갈라지더니 사람의 입술과 같은 모양을 만들었다. 그 틈 사이에서 내장을 꼬아 만든 혀가 튀어나왔다. 혓바닥이 교묘하게 비틀리며 문장을 완성했다.

“준비는, 얼마나, 되어가고 있지?”
“예….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더, 더 서둘러라! 내 배가 굶주렸다. 정말로 몹시, 몹시, 몹시, 몹시, 몹시-!!!”

대회 상대가 흥분한 듯, 거미의 내장-혀가 채찍처럼 발광했다. 핏물이 사방으로 침처럼 튀었다.

송수정이 속으로 놀라워했다.

‘벌써 이렇게 유창하게 말을 하다니….’

처음 만날 때만 해도 알아듣지 못할 옹알이였던 목소리는 만날 때마다 놀랍게 발전하더니, 이제는 태생 한국인인 것처럼 유창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한참을 발작하던 혓바닥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흑요석처럼 새까만 두 쌍의 거미 눈이 송수정의 표정을 살폈다.

“네게서 놀라움이 느껴지는구나.”
“…모든 악마가 한 달 만에 그렇게 자유롭게 언어를 구사할  있습니까?”

거미의 배-입술이 키득거렸다.

“탐나느냐? 악마의 우월한 두뇌가? 영원히 늙지 않는 육체가?”

지혜, 그리고 불멸!

악마가 뱀의 혓바닥으로 꼬드겼다. 그야말로 악마의 유혹이었다. 악마의 말은 송수정의 갈망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영원.

송수정의 혀가 악마를 따라  단어를 발음했다. 참으로 감미로운 울림이었다.

송수정이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라도 빨리 악마가 되길 바란다면, 어서 계약 조건을 이행해라! 조건이 완성되는 날, 네가 바라는 모든 것을 거머쥐리니!”

 선언과 함께 거미가 바들바들 떨리더니,  쌍의 다리에서 픽하고 동시에 힘이 빠졌다. 거미의 신형이 순식간에 무너져 나뒹굴었다. 상처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송수정은 볼펜촉으로 거미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죽어있었다.

송수정은 재떨이 위에서 라이터로 거미시체를 태워 없앴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불꽃이 노인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질척거리며 일렁이는 그림자가 그의 고뇌와 탐욕을 비췄다.

증거를 인멸한 그가 일어서서 창문가로 향했다.

창문 밖에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인간의 짧은 생으로는 손에 쥘 수 없는 도시가.

이번엔 그가 고개를 숙여 자신이 이룬 것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회사, 자신의 직원, 자신의 건물.
자신의, 자신의, 자신의….

탐욕에 일그러진 노인의 얼굴이 자신의 부회장을 생각했다.

둘째는 너무무능하다.
그는 결국 자신이 쌓아온 기업을 무너뜨리고 말 것이었다.
차라리, 차라리 나였다면….

“나였다면, 이 나라를,  손에..!”

노인이 입가가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그 얼굴은 이미 악마와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