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화 〉28화 – 조사 (28/72)



〈 28화 〉28화 – 조사

인류의 배신자들.

에덴이 지옥에 침공받자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정체성을 포기하고 악마의 편에붙은 비열한 인종들이 있었다.

남을 파멸시킬 힘을 원했든,
충동을 억누를 수 없는 광증에 의했든,
비루한 목숨을 추잡하게나마 이어가기를 바랐든,


그 이유는 다양했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위험하고 두려운 적이었다.

에덴의 사람들은 이들을 마인魔人이라 불렀다.

교황청 행정기관인 심의회 중 신앙교리성에서는 이단심문관들을 파견해 마인들을 심판했다.

하지만 마인들을 모두 쫓을 인력도 없었고, 마인 하나하나가 두려우리만큼 강력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마인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갔다. 마인의 끝은 언제나 파멸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인간들은 당장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악신 숭배자, 악마의 계약자 그리고 타락자들이 대표적인 마인이다.

악신 숭배자들은 악마처럼 마신 로힘을 섬기며 인간을 공격했다. 한명 한명의 무력은 약했지만, 그들은 혼자 다니지 않았다. 주로 신비학을 연구하던 학술 모임이금단의 지식을 엿보고는 함께 미쳐버리면서 악신 숭배 모임이 탄생했다.

그들은 마을 주민을 전부 학살해 제물로 바치거나, 성벽 안에서 사악한 의식을 치러 지옥의 고위악마를 소환했다. 그들은 평범한 시민처럼 위장했기에 영주들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다.

악마와 계약한 존재들은 주로 마법사들이었다. 타락자들이 무차별적으로마법사를 찾아내 학살하던 ‘마법사 학살’의 시대에, 많은 마법사들이 타락자의 표적에서 벗어나고자 스스로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

지옥의 지식을 얻은 그들은 흑마법사가 되었다. 마력은 흑마력으로 변질됐고, 총명한 두뇌는 인간에 대한 멸시로 가득찼다. 한번 사악한 진리를 엿본 그들은 더욱 지식을 갈구했다. 악마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악행도 서슴지 않았다.

성직자도 삶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엘로아흐를 버리고 악신 로힘을 섬기겠다 맹세한 성직자들은 타락자라 불렸다. 사제는 빛을 저주하는 암흑사제가 되었고, 성기사는 마검을 휘두르는 암흑기사가 되었다.

시대를풍미한 고결한 성기사마저 어둠으로 돌아서고는 했다. 그들은 본래 엘로아흐를 향한 신앙심이 깊을수록 막대한 마기를 얻었다.


높이 나는 새일수록 더 깊이 추락하는 법이니.


***

「상태창의 문명 무력 수치, 0 레벨 99.9%에서 멈춰. 무슨 의미인가….」
「A급 헌터 여동연, ‘헌터의 하루’에 출연, 시청률 16%의 초대박!」
「국내 유일 S급 헌터, 김재민. 이대로 자꾸 외국에 파견해도 되는가?」
「S급 헌터 용병론, 찬반 여론 갈등이 격화되고 있어.」
「JG, 또 국방부 예산 늘려. 이대로 괜찮은가?」
「초선 국회의원 한문승, 이번엔 고아원 설립. 파도 파도 미담만….」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클릭하려던 마우스가 뚝 멈췄다.

‘조금. 조금 이따가 보자…. 일단 차은경 누나 부탁부터 끝내고.’

신재혁은 일말의자제심을 발휘해 호기심을 억눌렀다. 일을  때는 일에 집중하자는 것이 해결사로서 그의 모토였다. 뉴스링크를 클릭하는 대신 모니터 속의 마우스 포인터를 검색창 위로 옮겼다.

검색창에 인천항을 입력하고 엔터키를 눌렀다. 검색 결과가 촤르륵 펼쳐졌다. 그의 시선이 목록을 훑다가 한 곳을 향했다.

「인천항, 일부 컨테이너 터미널 폐쇄 결정.」

몇 주 전 뉴스였다. 평화로운 세상이었다면 제법 이슈가 됐을 소식이었지만, 요즘 같은 세상엔더 자극적인 소식들에 묻혀버린 일 중 하나였다.

직감적으로 흥미를 느낀 그가 기사의 하이퍼링크를 눌렀다. 화면이 기사글로 빼곡 찼다. 번뜩이는 두 눈이그것을 읽어내려갔다.

「인천항, 일부 시설 잠정 폐쇄 결정.」
「지난 3월 12일, 인천항이 결국 일부 도크와 컨테이너 터미널 등의 시설을 임시 폐쇄하겠다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 인하대 조선해양공학과 조박선 교수는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며 안타까움을 표했습니다. 조박선 교수는 지난 2월, 태평양에서 발생한 “크라켄 사건”으로 인해 국제 무역이 주춤한 여파로…폐쇄된 터미널은 1G부터 9M까지, 총 54개로…」

“흐음.”

게이트는 대부분 인구가 밀집된 도시와 주거지 부근의 지상에 열렸다. 마치 인류를 어떻게든 박멸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듯이.

하지만 모든 게이트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해상에서 출현한 게이트도있었고, 산 위의 고지대에서 출현한 게이트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은 간혹 바다 속을 헤엄치거나,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있었다.

출동한 헌터들이 대부분 처리하긴 했으나 일부 몬스터들은 도망치는 것에 성공해 자취를 감쳤다. 아주 희박하게 일어나는 사고였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공포가 되어 해상과 공중을 통한 무역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다. 태평양으로 탈출한 거대 문어 악마가 화물선 몇 대를 부순 사건이 그 위협을 증명했다.

“관련 기사는  없나?”

신재혁이 검색목록을뒤적거려봤지만 똑같은 내용의 기사가 두세 개 더 있을 뿐,새로운 내용의 기사는 없었다.

“더 찾을 수 있는 건 없는 같네….”

뉴스에서 새로운 정보를 찾기 포기한 신재혁이 이제 다음 단계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전문적이고 불법적인 일을 할 시간이었다.

“아, 찾았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뒤지던 그가 흑사파의 조직원이 쓴 것으로추정되는 게시글을 발견했다. 자기가 흑사파 조직원인데 말단에서 승진했다는 자랑글이었다.

‘사실인지 구라인지  수는 없지만 시도해 보는  나쁘지 않겠지.’

글쓴이의 아이디를 복사해 신상 추적 프로그램에 붙여넣었다. 국정원의 데이터베이스와  크롤링 기술, 매크로 기술 등을 종합해 제작한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을 실행하자 원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계정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프로필이 주르륵 나열됐다.

“이 사람은 아니고, 얘도아니겠고….”

정보를 비교하며  사람씩 걸러가던 신재혁이 마침내 한 인물의 프로필에 도달했다.

“좋아. 이놈 같은데.”

오동수라는 인물이었다. 프로필의 사진 하나를 확대했다. 그가 인터넷에 올린 셀카였다.

사진 속의 사내는팔에 문신이 있었다. 팔뚝을 휘감는 검은  문신. 손목 동맥이 지나는 곳에 양 송곳니를 박아놓은 독사의 모양이었다.

‘이게 흑사파의 로고겠네.’

뱀 문신을 보고 확신을 얻은 신재혁이 오동수의 정보를 불러왔다. 오동수가 자주 접속하는 컴퓨터 ip 주소를 확인하고는, 능숙한 솜씨로 그의 컴퓨터에 접속을 시도했다.

“오. 운이 좋군.”

운 좋게 상대방의 컴퓨터는 켜진 상태였기에 그의 컴퓨터로 잠입할 수 있었다. 신재혁이 폴더를 이것저것 뒤졌다.

파일을  털어본 결과, 그는 흑사파의 말단 조직원인 것 같았다. 쓸만한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간부의 컴퓨터를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중요 파일을 한 군데에 모아 놓은 컴퓨터가 없을 리가 없지.”

조직을 운영하려면 회계 처리는 필수다. 범죄조직이라도 마찬가지다. 어딘가에는  회계 처리 문서를 저장한 간부의 컴퓨터가 있을 터였다.

신재혁이 자판을 타다닥 두들겼다. 랜선을 타고 올라가, 같은 네트워크에 접속된 다른 PC로 침입했다. 오동수와 같은 건물에 있을 컴퓨터였다.

“에라이, 이 사람도 꽝이네.”

또 말단 조직원이었다. 그래도 그 컴퓨터의 주인도 흑사파 조직원이기는 한 걸 보아 이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건물은 흑사파의 아지트임이 확실해 보였다.

간부의 PC를 찾기 위해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지루한 과정이 계속됐다.

“씹…. 사람 더럽게 많네. 엇!”

몇 시간 만에 드디어 행정직으로 추정되는 간부의 컴퓨터를 찾았다.

“드디어!”

신재혁이 지루한 반복 작업에서 탈출한 것을 기뻐하며 수확물을 확인했다.

===
C:\Users\Admin\Desktop\행정업무

-조직원 명부.xlsx
-3월 거래 내역.xlsx
-3월 수금 내역.xlsx
-주의 사항.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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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일 위의 조직원 명부 파일을 클릭했다.

류창근이란 이름 아래로 회사처럼 부서별 인원 현황표가 정리되어 있었다. 신재혁이 흑사파 회장의 이름을 작게 뇌까렸다. 류창근…. 오케이. 외웠다.

“몇 달간 전투부서 인원이 급증했네. 총이라도 들려준 걸까?”

신재혁은 이어서 다음 파일을 확인했다. 3월 거래 내역이라는 이름의 엑셀 파일.

“밀수 현황을 정리한 파일인가.”

빠르게 스크롤을 내리며 내용을 확인했다.

===

거래번호 | 일자 | 물품 | 수량 | 위치

21329 03.15 통나무 1 7G
21330 03.15 개밥 5 5I
21331 03.15 보충제 2 8K
21332 03.16 통나무 1 2H

===

거래 내역은 밀수꾼들이 사용하는 은어로 가득했다. 스크롤이아래로 내려갈수록 신재혁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갔다. 개밥은 총기를, 통나무는 시체를 의미하는 은어였다. 이 내역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명백했다.

흑사파는 대량의 총과 시체를 거래하고 있다.

“장기밀매로 번 돈으로 탄약을 구하는 것인가. 역겹군.”

인간을 사고파는  행동이구역질이 났다. 성기사로서의 문제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문제였다.

“누님의 말대로군. 뭔가 있기는 있어….”

밀수는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특히 ‘통나무’와 ‘보충제’의 양이 상당했다.

“그런데, ‘보충제’가 뭐지?”

해결사로서 뒷세계 용어를대부분 꿰뚫고 있는 신재혁으로서도 처음 보는 낯선 은어였다.

“그건 이제부터 알아볼 일이겠지.”

계속해서 의식의 초점은 위치 항목의 낯선 기호들로 향했다. 숫자와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한 쌍의 조합. 7G, 5I, 8K, 2H. 네 조합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어떤 좌표를 가리키는 것인가?

끙끙대며 머리를 굴렸다. 뭔가, 뭔가 떠오를 것 같은데….

“아! 그 기사!”

그가 몇 시간  자기가 읽은 뉴스 기사를 떠올리곤 탄성을 내질렀다. 인천항의 일부 터미널을 폐쇄한다는 내용의 기사.

「…폐쇄된 터미널은 1G부터 9M까지, 총 54개로…」

“터미널 번호군! 그래, 흑사파는 폐쇄된 컨테이너 터미널에서 거래하고 있던 거야!”

신재혁이 재빨리 인천항만공사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추측한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공식적으로 등재된 항구 사용 기록을 살폈다. 기사에 실린 대로 터미널들은 사용이 중지되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재혁이 빠르게 인천항 측 관제 컴퓨터를 해킹했다. 방화벽이 손쉽게 뚫리며 신재혁에게 길을 내줬다.

“역시, 여기도 사용 기록은 없군.”

적어도 인천항 관리측은 흑사파가 몰래 항구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뒷돈을 받은 현장 감독들이 중간에서 보고를 누락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신재혁이 항구의 보안  겹을  해제하곤 터미널별 전기 사용 현황을 확인했다.

“역시….”

분명 사용이 중지된 컨테이너 터미널일 텐데, 막대한 전기를 사용한 흔적이 있었다. 그것도 흑사파의 밀수일과 동일한 날짜마다. 틀림없었다.

정황을 포착한신재혁이 엑셀 파일의 거래 날짜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하루, 이틀, 하루, 이틀.

“이 패턴이라면 다음 밀수일은… 오늘 밤이잖아?”

몇 시간 후였다. 신재혁이 잽싸게지도를 켰다.
집에서 인천항까진 택시로 40분 정도.

“충분하네.”

신재혁은 흑사파를 체포할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파일을 모두 복사하곤 컴퓨터 전원을껐다. 그리고 검은 옷으로 갈아입으며 나갈 채비를 했다.

현장 실습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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