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8화 〉38화 – 벨리알 (2) (38/72)



〈 38화 〉38화 – 벨리알 (2)

어느 날, 나그네가 현자에게 물었다.


사천왕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오?

그러자 현자가 이르기를,

자살하시오.
죽음보다 더한 절망이 그대를 덮치기 전에.

***


밤공기를 가르며 벨리알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물질계는 입안으로 파고드는 바람마저 맛있었다. 그가  위의 불빛들을 가리키며 청했다.

= 마왕이시여! 이곳에 당신의 군세를!


‘아래쪽 위상’의 가장 아래쪽에 앉아있는 존재가 기꺼이  요청에 응했다.

벨리알의 손끝이 향한 지면에 검은 점 다섯 개가 나타났다. 추락하는 벨리알의시야에 검은 점이 급속히 커지는 모습이 비쳤다. 단순히 원근감 때문은 아니었다. 점이 실제로 팽창하고 있었다.

게이트가 열리고 있었다.

만찬의 시간이다!

게이트에서 물밀듯이 임프 대군이 쏟아져나왔다. 현세에 풀려난 소악마는 민가로 뿔뿔이 흩어지며 달아나는 사람들을 잡아 죽였다. 벨리알도 기꺼이 그 학살의 대열에 합류했다.

“게이트가  번에 이렇게 많이?! 1차 게이트 사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인데..!”
“마, 막아!”
“안 돼! 수가너무 많아!”

재난 사이렌을 듣고 출동한 헌터들이 임프 군단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헌터의 수에 비해 악마의 수가 너무 많았다. 손아귀 사이로 모래가 새어 나가듯 임프들이 포위망을 줄줄 빠져나갔다.

“괜찮아! 긴급출동명령이 떨어졌으니 조금만 버티면 군대가 온다!”
“시민들한테 향하는 녀석들만죽여!”

= 그러면 재미가 없지.


벨리알이 일련의 헌터 무리를 위에서 덮쳤다.

“보, 보스다!”
“산개해!!!”

날카로운 거미 다리가 동작이 굼뜬 헌터의 정수리에 박히며 몸을 수직으로 꿰뚫었다. 다리에 달린 입이 헌터를 몸 안쪽에서부터 잡아먹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B급 헌터가 보스의 다리에 흡수되는 것처럼 보였다.

“병수야! 마, 말도 안돼! B급 헌터가 이리 간단히..!”

B급 헌터면 나름 실전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었다. 저렇게 단숨에 목숨을 잃을 실력이 아닌데.충격에 빠진 헌터들의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보스의 출현을 알리는 메시지.

「 ===

그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쓸 데 없는 것, 무가치한 것, 불평등한 것.
야비한 자, 방탕한 자, 음미하는 자.

만물이 그의 입 앞에서 평등하게 무가치해지다.

네 군주의 일각,
마왕의 첫째 군단장,
바닥에서 기어오르는 사냥꾼,

벨-리알.

=== 」


메시지는 지나치게 흉흉했다.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끼고 헌터 몇 명이 탈주했다. 애초에  그들이 시민을 지켜야 한다는 말인가?긴급출동명령에 불응하면 헌터 협회에서 호된 제재를 먹이니 대충 막는 시늉이나 하러 왔을 뿐, 여기서 죽을 때까지 싸우러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벨리알은 한 마리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포식자로 자란 그에게 사냥감을 놓친다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었다. 한  노린 먹이는 반드시 죽이는 습성이 그를 한낱 하급 악마에서 사천왕의 자리까지 성장시켰다.

여덟 개의 다리가 칼춤을 추었다. 칼날처럼 예리한 다리가 달아나는 헌터의 몸을 슥슥 긋고 지나가니 도로 위에 오직 잘린 팔다리만이 즐비했다. 믹서기에 넣은 마냥 잘게 다져진 고기를 악마가 흡수했다. 마나가 풍부해서 평범한 놈들을 먹을 때보다 힘이 더 많이 늘어났다.

“발을 묶어야해! 마법 계열 없나?!”
“안돼! 너무 빨라-케엑!”
“으아아아아악!!”

벨리알은 계속 풀쩍풀쩍 뛰어다니며 헌터들을 사냥했다. 헌터 한 명에게 수십씩 죽어 나가는  무능한 부하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지옥에 임프 모체가 살아있는 한, 그런 무지성악마쯤이야 무한히 생산 가능하다. 강한 놈을 잡아 죽이다 보면 더 강한 놈이 자기를 죽이러  것이다.  강한 놈을먹을수록 본래의 힘을 되찾는 시기도 앞당겨질 테고.


후후, 즐겁구나.

오랜만에 맨손으로 사냥하는 것은 꽤 재미있는 여흥이었다. 무기가 없는 것은 좀 불편했지만, 오히려 그가 중, 하급 악마였을 때의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자기가 한낱 땅을 기는거미였을 시절…. 허기를 참지 못하고 형제와 부모를 모조리 잡아먹은 추억. 그때처럼 달콤한 맛이 인간에게서 났다.

= 음?

과거를 회상하는 벨리알의 다리에서 문득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시민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왔습니다!”
“아니, 저 사람은!”
“빙결술사여동연이다!”

여동연. 얼마 전에 예능 프로에 출연해 급격히 유명세를  헌터였다. 그가 손에서 냉기를 뿜어내며 벨리알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시민들이 유명한 A급 각성자를 알아보고 환호했다.

“살았어! A급 헌터가 왔다!”
“맞아, 다음 방송을 인천에서 찍는다고 들었던 거 같아!”

과연 그 말이 사실이었는지, 방송용 카메라를 든 남자가 헌터의 호위를 받으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전투를 녹화하고 있었다. 여동연은 제 활약을 찍어  유명해질 생각에, 카메라맨은 시청률을 뽑을 욕심에 정신 나간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카메라를 의식하며 여동연이 외쳤다.

“얼어붙으라-!”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처럼 그의 손에서 얼음 조각이 생성됐다. 마력으로 피어난 얼음덩이들이 보스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얼음이 여덟 개의 거미 다리를 붙잡자 속박당한 보스몹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이다! 다 같이 다리를 부숴!”

적의 가장 위협적인 무기가 봉인되자 헌터들이 화색을 띠었다. 다리 하나에 두세 명씩 달라붙어 얼음동상이 된 다리를 마구 때려 부쉈다.

= 끄아악! 이럴 수는 없어-!

다리 여덟 개가 하나씩 박살 나자 벨리알이 비명을 질렀다.  비명에 헌터들은 더욱 힘을 얻었다. 승산이 보인다!

“좋아! 마지막이다!”

마침내 벨리알의 여덟 다리가 모두 부서졌다. 다리가 모조리 부서진 거대한 거미 악마가  팔로만 몸을지탱했다. 헌터들은 보스를 확실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쌌다. 포위진 앞에서 여동연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A급 헌터인 나에게 이 정도는 가뿐하지!”

그가 허공에서 얼음검을 만들어내서 거미 몸통을 쿡쿡 찔렀다. 승자의 여유가 한껏묻어나왔다.

“놀라워. 말을 할 수 있는 몬스터라니!”

보스가 한국어를 하는 모습이 처음부터 끝까지 카메라에 찍혔다. 내 이름이 최초로 몬스터와 대화한 사람이라고 역사책에 실리겠구나! 인천을 구한 국민 영웅, 여동연!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며 여동연이 실실 웃었다.

헌터들이 포위망을 좁혔다. 여동연은 반응이 없는 보스의 지척까지 가선 몬스터에게 대화를시도했다.

“하하, 다리가 없으니까 덩치만  병신이었잖아. 이렇게  녀석이 우리한테 사로잡히다니. 지금 어떤 기분이야?”

벨리알이 자기를 도발하는 인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 아주 기분이 좋군.
“…기분이 좋다고?”

대화에 성공했다는 기쁨보다 의구심이 앞섰다. 떨떠름했다. 죽기 직전의 상황인데 기분이 좋아? 최초로 대화에 성공한 몬스터는 M 성향이기라도  것일까. 악마는 친절하게도 그의 의문에 답해주었다.

그래.이제부터 더 맛있어진 너를 즐길 테니까.

벨리알의 몸에서 마기가 폭발했다. 자신의 기량으로서는 끝을 짐작할  없는 아득한 마나량에 헌터들이 경악했다. 그 사이 다리가 잘린 단면에서 살덩어리가 재생했다. 도마뱀의 꼬리가 자라나듯 새로운 다리가 생겨나기시작했다.

“뭐, 뭣! 회복한다! 보스가 다리를 회복한다!!”
“안 돼! 막아! 다시 얼려!”

그러나 재생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여동연이 손 쓸 새가 없을 정도로. 여덟 줄기의 칼날 폭풍이 한껏 당황한 인간들을 휘저었다.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핏줌이 되었다.

“씨바알, 냉기의 화신이여-!”

뒤늦게 여동연이 냉기 돌풍을 발사했다. 냉기가 정확하게 벨리알의 다리를 휩쓸었다.

“뭐얏!”

하지만 이전과 달리 벨리알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짙게 두른 마기가 피부를 보호하고 있었다. 전력을 다한 공격에도 보스가 멀쩡하니 당황한 여동연이 주춤거렸다.

= 조금만 당해주는 척을 해도 그렇게 기고만장해지는꼴이란…. 크크크. 귀엽구나.

자기를 속여? 당혹감에 여동연이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몇 걸음 물러서지도 못했다. 뒤에서 카메라가 자신을 찍고 있었다. 여기서 도망쳤다간 국민 영웅은커녕 몬스터한테 속은 병신의 표본으로 헌터학개론 교과서에 실릴 판이었다. 제 목숨만큼이나 부와 명예가 소중했던 여동연이다.

집착은 어리석음을 낳는다.

“큭, 죽어어어어!!”

욕망이 이성의 눈을 가렸다. 여동연이 입술을  깨물고 서리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서릿바람 같은 매서운 검풍이 쏘아졌다. 대부분의 악마는  무성의한 공격에도 픽픽 쓰러졌기에,그는 이번에도 결과가 다르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래, 방금은 내가 당황해서 힘이 잠시 약해진 것뿐이다. 자기는 한국에 스물셋밖에 없는 A급 헌터였다. 내가 전력을 다하면 이런 몬스터쯤은….


벨리알이 손을 부웅 휘둘렀다. 아까의 장난과는 달리, 조금 진심을 담았다. 대포알보다 빠른 스윙이 날아왔다. 눈꺼풀을 한번 감았다 올라오자, 이미 침대만 한 손바닥이 얼굴 앞에 있었다. 다른 액션을 취할 새도 없이 여동연이 붙잡혀버렸다.

“쿠확! 쿨럭, 큭-”

입장이 반대가 됐군…. 이제 내가 물을 차례인가. 지금, 어떤 기분이지?

절망에 찬 표정이 대답을 대신했다. 흡족한 벨리알이 손을 꽉 쥐어짰다. 전신의 뼈가 바스라지고 내장이 터지며 여동연은 즉사했다. 벨리알이 변덕스런장난의 결과물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음, 맛이 좋군. 역시 재료를 조리하면  맛있는 음식이 태어난단 말이지.”

인간은 절망할수록  뛰어난 풍미를 지닌 음식이 되었다. 벨리알이 옥상에 보관한 최상품의 재료를 생각했다. 최고의 진미가 될 가능성을 품은 극상의 식재료. 그 성기사를 떠올리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완전히 꺾어놓기 위해선 많은 죽음과 절망이 필요하겠지….

아쉬운 대로 벨리알은 시체를 오독오독 씹어먹었다. 악마의 소화기관이 고기에 밴 마나를 마기로 변질시켰다. 과연 조금 전의 놈은 인간 사이에서 꽤 강한 수준이었는지 늘어난 마기의 양을 구분할 수 있었다.

= 한 방울 정도인가. 아직 한참 부족해…. 더, 더 많은 고기가 필요하다!

마침 멀리서 대량의 고기가 접근해오고 있었다. 주둥이가 길쭉한 철제 마차를 타고 오는 인간들. 분명 인간의 언어로는 탱크라 불렀던가. 군대랍시고 옹기종기 꾸려온 놈들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결국 전부 제 뱃속에 들어갈진대.

= 저 정도 수를 다 먹어치우려면 마땅한 무대가 필요한 법이지….

벨리알이 실을 뿜었다. 인육을 엮어 자아낸 실이 쐑 날아가 고층 빌딩 창문에 달라붙었다. 벨리알이 실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다른 건물에 실을 뿜었다.  과정을 반복했다.

빌딩의 숲 사이 악마가 거미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


피뢰침에 꿰인 채 신재혁이 무력하게 땅을 내려봤다. 굳이 그의 얼굴이 지상으로 향하도록 피뢰침에 꽂은 것은 재료의 맛을 숙성시키려는 조리법이기도 했지만, 기다리는 동안 심심하지 말라는 벨리알 나름의 악마적인 배려였다.

‘안 돼…. 인천이. 시민들이.’

한시라도 빨리 팔다리를 재생해 벨리알을 막아야했다. 하지만 상처 부위에 잔재하는 마기가 회복을 방해했다. 움직이기는커녕 의식을 유지하기도 벅찼다. 점차 환청이 선명해졌다.

전부 네 죄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정신이 몽롱했다. 하지만 흐릿한 시야로도 전황은 너무나 확실하게 보였다.

도망자는 태풍에 휩쓸린 나룻배처럼 무력하게 초록 해일에 휩쓸렸다. 임프가 떠난 자리는 아스팔트에 달라붙은 핏자국만이 남았다.

뒤늦게 출동한 군대가 임프의 물살에 포화를 퍼부었다. 그러나 악마의 군세에  많은 타격을 입힐수록 빨리 표적이 될 뿐이었다. 벨리알이 공중에서 거미줄 사이를 건너다니며 탱크를 하나씩 터뜨렸다. 폭발 반경에 있던 군인들이 몰살당했다.


사람이 죽고, 죽고, 또 죽었다.

죄악감에 신재혁의 마음이 바스러져갔다. 지상에 펼쳐진 지옥도는 전부 자기의 잘못으로 말미암은 일이었다.

차은경의 부탁을 들어준답시고 밀수 현장을 찍으러 갔던 것이 실수였을까, 연구소에서 흑사파 조직원들을 학살한 것이 실수였을까, 아니면 괜히 류창근을 자극해 소환 의식을 실행시켜버린 것이 실수였을까.

결국 모두 자신의 죄였다.


자신의 실수가 인천을 멸망시키고 있다.

‘엘로아흐시여, 부디 당신의 어린양을 구하소서. 제발….’

최후의 순간에 성기사가 제 신을 찾았다. 기적을 빌었다. 자신을, 인천을, 사람들을 구해달라 빌었다. 자신의 기도가 천상에 닿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여느 때처럼 신은 침묵을 고수했다.

신은 가장 절박한 순간에 무능한 법이니.


신재혁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그에게 남은 방법이 없었다.

지옥도를내려보는 신재혁이 옛 격언을 떠올렸다. 부모에서 아이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이야기. 현자와 나그네의 대화라는 이야기였다. 현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천왕이란 절망의 다른이름이다’. 신재혁은 이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성기사의 얼굴에 비로소 절망감이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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