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40화 - 심판
─메이데이! 메이데이! 당장 지원 바란다! 보스가 거미집을 만들었다! 측정 마나량,최소 S급..! 계속 늘어나고 있다! 아, 안 돼! 거, 거미가 온다! 여기로 온다! 안 도ㅐ¾ð¾î¶ó´ °Ç ¾Ë°í ÀÖÁö¸¸ Á¤È®È
지지지직-
무전기가 거친 노이즈를 토했다. 상대 쪽에서 연결이 끊긴 것이었다. 최후의 단말마로 그들의 운명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항공복 차림의 군인이 무전 채널을 돌렸다. 산소마스크 때문에 목소리가 변조되어 들렸다.
「통제실, 여기는 지휘기. 지상 병력은 어떻게 됐지?」
─카피. 전방 부대가 궤멸 직전이다. 살아남은 병력과 헌터는 민간인을 보호하면서 퇴각 중. 지원 부대는 임프를 생존자 및 보스와 떨어뜨려 놓기 위해 제2 경인고속도로 1시 방면으로 유도하는 중이다.
「…교전 허가는?」
─각하께서 미사일 사용을 허락하셨다. 민가의 피해는 신경 쓰지 말고 반드시 보스를 사살하도록.
「수신 완료.」
─…무운을 빌겠다.
지지직-
미사일을 실은 제트기 스무 대가 인천의 밤하늘을 가르며 날았다. 느닷없이 도심 한복판에 S급 게이트가 터지면서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당장 출격할 수 있는 전투기가 긴급 출동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할 시간이었지만, 도심 곳곳의 화재 현장 덕에 참상이 대낮처럼 훤히 보였다. 지상에서 하늘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하늘에서 바라봐도 전황은 명백했다. 국군이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연달아 열린 게이트 다섯 개에서 임프가 미친 듯이 콸콸 쏟아졌다. 게이트끼리 이렇게 가까이 생성된 적은 처음인지라 국군도 게이트를 공락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병력을 한쪽으로 집중해 게이트까지 길을 뚫어보려 해도 사람이 몰리는 족족 보스몹의 표적이 되었다.
「중령님, 어떡합니까?」
「흐음, 저기 거미집 보이나?」
명령을 내려달라는 부하의 무전에 파일럿이 눈앞의 거대한 구조물을 환기시켰다. 고층 빌딩 네 개를 통째로 감싸는 거대한 거미집. 거미줄 한 가닥 한 가닥이 사람의 시체로 만든 모독적인 둥지였다. 저 거미집을 만드느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사용된 것일까.
「저게 보스가 먹...이를 비축하는 곳으로 추정된다. A팀이 보스를 견제하는 사이 전폭기 B팀이 집을 부순다.」
「알겠습니다.」
지상에서 싸우던 헌터들이 소닉붐을 듣고 하늘을 올려봤다. 지원이 오고 있었다 ! 보스에게 날아가는 전투기를 보고 헌터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살았다!”
“드디어 공중 지원이! 싸그리 태워버려-!!”
벨리알은 전투기 소리도 듣지 못하고 둥지를 보강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창고를 꼼꼼하게 만들어놔야 쥐새끼가 음식을 훔쳐가지 못하는 법이니. 이렇게 음식이 많을 때 창고에 비축해둬야 오랫동안 두고두고 먹을 수 있었다.
「목표 포착.교전 개시.」
타겟을 락온한 파일럿이 조종대의 발사 버튼을 꾹 눌렀다. 기관총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살벌한 열선이 밤하늘을 수놓으며 보스몹의 몸통에 꽂혔다.
벨리알이 피부 한쪽이 따가워지는 감각에 돌아봤다. 날파리 같은 게 시끄럽게 앵앵거리면서 쇳조각을 쏘고 있었다. 아, 귀찮은 인간들.
=불나방이 주제도 모르고 묫자리로 날아드는구나!
벨리알이 거미줄을 쏴 날려 날파리들을맞추려 했다. 아슬아슬한 곡예비행으로 전투기들이 공격을 피했다. 정확히 자신들을 노린 공격에 중령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재수 없게 스쳤다간 바로 요단강을 건널 판이었다. 미사일을 아낄 여유가 없었다.
「아끼지 말고미사일 퍼부어-!」
지시에 미사일이 일제히 발사됐다. 전폭기 일부는 거미집을 노렸고, 나머지는 보스의 면상을 노렸다. 벨리알은 날아오는 게 뭔지 몰랐기에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미사일이 목표에 직격했다. 격렬한 폭발과 함께 거미집이 활활 타올랐다. 얼굴에서 터진 미사일도 효과가 좋았다. 화상으로 녹아내린 피부에서 초록색 피가 흘렀다.
「좋아! 계속 화력 집중해!」
S급 보스에게 유효타를 먹인 파일럿들이 환호하며 연달아 미사일을 발사했다. 한국이 드디어 무시무시한 보스를 상대로 승기를 쥐려 하고 있었다!
벨리알이 안면을 재생하면서 내심 놀라워했다. 생각보다 날파리들의 공격이 거셌다. 이제껏 잡아먹은 다섯 명의 A급 헌터 만큼이나. 한방 한방이 꽤 묵직했다.
물론 제상대는 아니었지만.
벨리알이 날아오는 미사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에서 튀어나온 입이 날아오는 미사일을 족족 삼켰다.
「뭣? 반응 소실!」
레이더에 미사일이 갑자기 없어지자 파일럿이 당황했다. 보스가 무슨 짓을 벌인 건지 짐작할 수 없었다.
=흐음, 좀 매콤한 맛이군. 돌려주마.
벨리알이 전투기를 향해 반대쪽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서 입이 돋아나더니 화염을 방사했다. 몸속에서 농축되고 마기로 한층 강력해진 폭발력이 벨리알의 손에서 토해졌다.
「고, 고도 올려!!!」
「으으으아아아아-」
퍼어어어어엉!!!
불꽃을 피하지 못한 전투기 여섯 대가 공중에서 장렬하게 산화했다. 여파에 휩쓸린 세 대도 운명을 같이했다. 전투기들이 공격 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급히 선회했다.
=이런, 낭패로군.
벨리알이 둥지의상태를 확인하고 혀를 찼다. 기껏 만든 거미집이 죄다 불타고 있었다. 인간을 산처럼 쌓아놓고 천천히 하나씩 음미하듯 먹으려했는데… 짜증이 났다. 사천왕의 분노가 창고를 부순 날파리들에게 집중되었다.
열 개의 손가락이 실뜨기하듯 어지럽게 수인을 맺었다. 손가락 끝에서 얇게 뽑혀나온 마기가 점점 정교하게 엮여갔다. 그가 자아낸 것은 아주 큰 그물처럼 보였다.
벨리알이 하늘에 손을 휘저어 마기의 그물을 흩뿌렸다. 그물이 쐐애액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내며 쇄도했다. 하늘 나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회피기동해!」
어망 사이의 틈으로 피하기 위해 전투기가 복잡한 곡선을 그렸다. 몸체가 빈 구멍을 찾아 쏙쏙 통과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파일럿 한 명이 실수했다. 실 한 가닥이 전투기 날개에 닿는가 싶더니 두부 벤 듯 강철이 잘려나갔다. 균형을 잃은전투기가 빙글빙글 돌며 추락하다 허공에서 터졌다.
「안 돼애애! 중령님!!!」
평정심을 잃은 몇 대가 추가로 격추당했다.
= 후후후. 어디 보자….
아직 물고기 열 마리가 밤하늘을 유영하고 있었다. 그물을 던졌으면 마땅히 다시 걷어야 하기 마련.
거꾸로 뒤집어진 바다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그물을 걷어내렸다.
던져올린 그물이 이제는 뒤에서 전투기를 쫓아왔다. 정면에서 덮칠 때보다 더 빠르고, 교묘하고, 집요한 죽음이 추적해왔다.
후장이 따일 위험에 처한 전투기들이 어쩔 수 없이 고도를 내리며 벨리알에게 강하했다. 달리 방도가 없었다. 제아무리 파일럿이라도 등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였으니. 꽁무니를 따라잡힌 전투기 하나가 반으로 잘리며 또 터졌다.
=옳지, 이리온….
벨리알은 숙련된 사냥꾼이었다. 손끝을 미세하게 움직이며 홀로 살아남은 비행기를 자신에게로 몰았다. 그물이 출렁거리며 비행경로를 제한하자 파일럿은 울며 겨자 먹기로 보스몹에게 직진할 수밖에 없었다.
「씨바아아아아알!!」
최후의 전투기 조종사가 발악하듯 사격 버튼을 꽉 눌렀다. 벨리알이 날아오는 총알을 입을 쩍 벌려 맛있게 삼켰다. 몇 초 후엔 총알뒤로 전투기까지 날아와뱃속에 쏙 안착했다. 위장에서매콤한 맛이 느껴지다 이내 잠잠해졌다.
= 쯧쯧. 손해가 막심하군.
벨리알이 입맛을 쩍쩍 다시며 아쉬운 눈으로 거미집을 살폈다. 하필이면 무게를 분산시키는 중요 부위가 손상된 바람에 복구하기란 요원해 보였다. 만들려면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겠지.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창고를 또 지어봤자 비슷한 놈들이 몰려와서 같은 상황이 반복될 터. 차라리 다른 악마가 빼앗기 전에 지금 전부 먹어치워 버리자.
행동방침을 결정한 사천왕이 비축한 마기를 혈관에 흘려보내기 시작했다.잠들어있던 막대한 기운이 악마 세포의 신진대사를 극도로 끌어올렸다. 몸통이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몸통에 달린 입도 함께.
입이 하늘을 삼킬 정도로 크게 쩍 벌어지며 건물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몸속에서 구성물질이 영양소로 분해되며 힘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 이 고양되는 감각..!
그는 태생부터 강한 악마가 아니었다. 한낱 하급 거미악마로 태어났으나 제 형제와 부모와 마주치는 모든 악마를 먹어치워 몇백 년 만에 기어이 최상급 악마가 되었다. 지옥의 역사상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강해진 존재는 벨리알뿐이었다.
백 년 전쯤에 사천왕이었던 마몬이 용사에게 죽어 사천왕 자리가 하나 공석이 되었을 때, 벨리알은 쟁쟁한 고대 악마들을 뚫고 기어이 사천왕이 되었다. 다른 세 명의 사천왕은 지옥이 만들어졌을 즘부터 존재하던 고대 악마였기에 벨리알은 신생 악마로서는 최고의 위치까지 오른 것이다.
지옥의 최강자 반열에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벨리알은 여전히 사냥과 힘을 갈구했다. 더 많은 것을 먹어치워 더 강한 힘을 손에 넣고 싶었다. 아쉽게도 사천왕의 자리는 혜택만큼이나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 없는 자리였다. 그는 허기를 참고 참으며 기회를 기다렸다….
2대 마왕이 결단을 내린 새로운 물질계, ‘지구’로의 침략은 그에게 천상의 과실보다 달콤한 기회였다. 먹어치운 것을 제힘으로 흡수하는 능력. 그 능력으로 물질계의 모든 것을 먹어치우면… 어쩌면 다른 사천왕, 아니 마왕마저 넘어설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시스템에 의해 제약받던 친정의 기회가 마침내 주어졌을 때, 벨리알은 재빨리 선봉을 자처해 군사권을 얻었다. 지구인들의 힘이 약한, 그래서 시스템의 제약이 강한 상태라 본신의 힘이 지나치게 줄어든 상태였지만 벨리알은 괘념치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중간계의 그 누구보다 강하다는 확신이 있었고, 자신은 먹으면 먹을수록 강해지는 존재였으니까.
과연 자신의 생각대로 물질계는 아주 풍요롭고 음식으로 넘쳐났다. 그러니 이제는 강해질 일만이 남았다. 다른 사천왕이 강림하기 전에 이 세계를 모조리 집어삼켜 버리는 것이다..!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악마가 하늘에 선포했다.
=보아라, 무능한 엘로아흐야! 네 아름다운 세계가 짓밟히는 모습을!
내가 이 도시 위에 멸망의 초석을 쌓고 위로 로힘의 신전을 세우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신전에 부딪혀도 주추를반석 위에 지은 집처럼 영원토록 무너지지않으리라───!!!
악마의 포효가 검은 하늘에 울려퍼졌다. 인천 전역의 사람들이 그 포효를 들을 수 있었다. 무슨 언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그 우렁찬 목소리를 통해 보스가 지나치게 건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A급 헌터도, 탱크도, 전투기도 막지 못하는 보스의 건재함을 보고 사람들이 절망했다. 하필이면 한국의 유일한 S급 헌터인 ‘빛의 용사’ 김재민도 외국의 게이트를 클리어하러 파견을나간 상태였다. 한국에 저 몬스터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몸집이 한층 더 커진 벨리알이 다른 고층 건물을 입에 머금었다. 이번 건 꽤 크기가 커서 소화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때까지는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기다려야-
=──!!! 이 힘은?!
***
성기사가 옥상에서 눈을 떴다.
뽑혔던 팔다리는 어느새 재생을 완료했고 전신이 새것처럼 치유된 상태였다. 가슴에 박힌 피뢰침을 천천히 뽑아내자 황금빛 기운이 서리며 구멍이 아물었다. 무의식적으로 상처를 회복하는 자연스러운 신성력의 운용. 과거의 경지를 되찾은 것이었다. 한 시간 전의 자신에겐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일어선 신재혁이 옥상에서 지상을 내려봤다.
지옥도였다.
폭격을 맞아 부서진 도로, 임프에게 뜯어먹히는 사람, 거리에 낭자한 시체, 불타는 세계.
모두가 자신이 불러들인 재앙이었다.
잔혹한 현실을 뼈가 사무치게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좌절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아직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많았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겸허히 고통을 감수할 각오가 지금의 신재혁에게는 있었다.
“내 손으로 시작했으니, 마땅히 내 손으로 끝내리라.”
제자리에서 건물을 통째로 삼키고 있는 벨리알이 보였다. 그가 정신을 잃었을 때보다 몇 배는 불어난 덩치였다. 제아무리 벨리알이라도 수천 톤의 질량을 순식간에 소화하기는 무리였는지, 움직임을 멈춰선 소화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였다.
신재혁이 옥상 바닥에 뒹구는 메이스를 집었다. 한 번 뽑혔던 환상통에 메이스의 무게를 감당하는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굳건한 의지가 꺾이려는 무릎을 지탱했다.
성기사가 문득 창공을 올려봤다. 도시에서 올려보는 새벽하늘에는 별 한 점 없었다.
“어둠이 지천을 가린 세상에별이 없구나. 길 잃은 나그네는 무엇에 의지하여 나아가고 풍랑 속의 선원은 무엇을 보고 항해하리.”
한탄이 흘러나왔다. 세상이 너무 캄캄했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도 지척마저 보이지 않을 만큼.
그래서 성기사가 아리아를 읊었다.
자신의 별에게 기도를 올리기 위해.
“심판의 때가 왔노라!
하늘이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가리고자 공의를 선포하리니
주께서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손에 법봉을 쥐이시는도다.”
중후한 신성력이 몸에서 뻗쳐나오며 일대를 장악했다. 몹시 고절하면서, 도시 전체를 덮는 광대한 양이었다. 신성력의 유동을 눈치챈 벨리알이 진심으로 경악할 정도로.
=너, 성기사! 어떻게에에에에에에에-!!!!
수십 개의 질문과 혼란이 비명 하나에 담겨 있었다.
어떻게 몸을 회복했지? 어디서 이런 신성력이? 힘을 숨기고 있었나?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자기에게 일방적으로 농락당하는 신세였는데..!
허를 찔렸다. 인간의 군대는 퇴각을 완료한상태였고 헌터들이 자기를 공격하려면 지상에 깔린 무수한 임프와 다른 악마들을 상대해야 했다. 자신이 무방비한 상태여도 안전하다는 판단을 했기에 무리하게 건물을 소화하며 힘을 키우는 것에 전념하려던 것이었는데, 지금의 상황은 상상치 못한 불의의 일격이었다.
“저가 죄인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니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두 발로 딛고, 대지 위에 서다. 맨발이 아스팔트에 닿으며 새삼 그 단단함을 기억하다.
그의 눈이 불타는 도시를 바라본다. 과거의 기억이 오래된 꿈처럼 망막 위를 스쳐 지나간다. 지키지 못한 마을들, 죽어가는 동료의 모습들, 고통스러운 과거의 현장들. 후회로 점철된 순간이 현재의 풍경 위에 오버랩된다. 그가 천천히 메이스를 들어 올렸다.
“마침내 최후의 판결이 선고되고
땅끝까지 하늘 우레가 치리라.
두려워 떠는 죄인이 감히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도다.”
영혼에서 흘러나와 한곳으로 뭉친 빛줄기는 위로, 자꾸만 위로 치솟았다.구름을 뚫고, 성층권을 넘어 위쪽을 향해.
‘모든 곳의 위쪽’에 맞닿은 문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윽고 빛줄기가 허공을 두드리며 보이지 않는 영적 파문을 만들었다. 인간의 눈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에서 그 간절한 노크에 응하여 황금빛 문이 천천히 열렸다.
“대적하는 자, 산산이 깨어질지어다.
도망치는 자,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히도다.
주께선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며 매일 분노하시는 정의이시니-”
개문한 천상에서 어떤 빛의 형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로막는 구름을 흩으며 거대한 빛의 막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관찰자에 따라 그것은 조금씩 다르게 보였다. 그것은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의 지팡이였다. 그것은 정의를 집행하는 빛의 철퇴였다.
그것은 그야말로, 신의 심판이었다.
“빛이여, 분노를 노래하소서.”
신성 주문, 천벌天罰
9 위계 최고위 대마법 메테오에 비견되는 최강의 신성 주문. 교황청의 인정을 받은 성인들조차 여럿이 힘을 합쳐야 실행할 수 있는 기적이 신재혁 한 명의 힘으로 발휘됐다. 가장 사랑받는 성인을 위해 천상이 기꺼이 지상으로 심판을 떨어뜨렸다.
지상에 있던 모든 시민과 악마가 그 장엄한 광경을 목격했다.
죽음이 결코 생각지 못한 형태로 엄습해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냥꾼의 입장에서 사냥감의 입장으로전락한 악마가 절규했다.
=아, 안돼..! 이럴순 없다-!!!
거미가 자기를 짓밟으려는 죽음에서 도망치려고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바둥거렸다. 하지만 소화가 완료되지 않은삼천 톤의 무게가 그를 붙잡았다. 뱃속이 너무 무거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신체 일부라도 생존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리를 쭉 뻗어보았지만 직경이 1km에 달하는 광선에서 도망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 이 빛은….
떨어지는 빛덩어리를 보면서 악마가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수백년 전, 자기가 미물이었던 때의 기억. 그때 11명의 다른 인간들과 지옥에 쳐들어와 겁 없이 날뛰던 한 성기사의 모습. 그리고 생전 처음 느껴보는 압도적인 기운에 겁에 질려 도망치던 자신의 모습….
=너, 너! 설마 네놈이-
벨리알은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굵은 빛줄기가 전신을 덮쳤다. 선인에게는 한없이 따스하나 악인에게는 지옥의 겁화보다 뜨거운 심판의 빛이었다. 신성한 빛이 악마의 신체 내부로 줄기줄기 뻗어 나가며 체세포를 싸그리 불태웠다.
천둥 번개가 몰아치는 날처럼 하늘이 폭력적으로 번쩍거렸고 지상에 비명소리가 끝나지 않았다. 마치 성서에서 묘사한 심판의 날이 온 것 같았다. 빛은 십 분 동안 계속 내리 찍히며 인근의 악마를 모조리 증발시켰다. 잿더미조차 남기지 않고.
찢어지는 비명과번뜩이던 섬광이 비로소 자취를 감추자 건물 속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거리로 모습을 드러냈다. 시체조차 남지 않은 황량한 폐허가 그들을 반겼다. 몬스터가 전부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시민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옥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재혁은 진이 빠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천왕을 쓰러뜨렸다는 데 기뻐할 여유도 없었다. 다리의 환상통과 오랜만에 사용한 대기적의 후유증으로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신성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영혼에서 허탈감이 몰려들었지만 가슴 속은 따뜻한 무언가로 채워지고 있었다.
따스한 충족감을 만끽하며 그의 시선이 먼 곳을 바라봤다. 지상의 참사에서 잠시만이라도 눈을 돌릴 수 있도록.
문학산과, 인천항, 그리고 그 너머에 펼쳐진 바다가 보였다. 육지의 소란은 자신과 하등 상관이 없다는 듯 수면은 고요하고 잔잔했다. 신재혁이 수면을 멍하니 응시하며 평화를 만끽했다.
어느덧 수평선 너머에서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