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43화 - 거래
“다 왔어. 안에 대통령님이 기다리고 계셔.”
청와대, 대통령의 집무실 앞에서 홍하린이 신재혁의 차림새를 점검했다. 손이 한 번 닿을 때마다 구겨진 부분이 펴지며 말끔해졌다. 미적 감각이 뛰어난 홍하린이 골라준 옷이었기에 꽤 잘 어울렸다.
“안에 들어가면 기감이 제한될 건데, 아티팩트 때문이니까 당황하지 마.”
게이트에선 종종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이템이 발견됐는데, 이는 아티팩트라 불리며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다. 특히 이용하기에 따라 사용자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는 호신용 아티팩트는 수십, 수백억을 호가하며 자산가조차 하나 구매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박주관 대통령은 비밀스러운 키다리 아저씨로부터 후원받은 막대한 비자금이 있었다. 덕분에 집무실은 도청이나 침입자를 경계하기 위한 아티팩트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나도 같이 들어갈 거니까, 대통령님께 무례한 소리는 하지 말고. 그랬다간 나한테 한 대 맞는다."
말투는 장난스러운데 입이 웃고 있지를 않아서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긴장을 풀어주려는 의도였으리라. 실제로 신재혁은 그녀의 말 덕분에 긴장이 한층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좋아….”
저 너머에서 대한민국의 주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재혁이 한번 심호흡을 하고, 문고리를 밀었다.
***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딱딱한 인상의 대통령이 그를 맞이했다. 박주관입니다- 군대에서 습관이된 절도 있고 각진 자세로 박주관이 악수를 건넸다. 군인모형 장난감처럼 그의 표정엔 기분이 일절 드러나지 않았고, 새 옷같이 빳빳하게 다려진 정장 와이셔츠 아래로 탄탄한 근육이 선명했다.
전형적인 군인의 표본. 그의 얼굴은 너무나 우직한 고목과도 같아서, 정치가의 얼굴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 된다. 저 감정 기복 없는 표정 아래 어떤 능구렁이가 살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타고난 정치적 감각으로 군 장성에서 국무총리,국무총리에서 대통령이 될 정도로 정치적 수완이 탁월한 남자다.
“신재혁입니다.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신재혁이 소파에 앉으며 과거의 비슷한 상황을 떠올렸다.
전생에도 론지노는 왕의 부름을 받은 적이 종종 있었다. 보통 왕족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 교황이 인정한 성인의 축복을 내려주십사 청하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현대 대한민국. 이 교활한 사내가 그런 일로 자신을 불렀을 리가 없었다.
“예, 그렇습니다. 두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 아니, 부탁이란 말은 어폐가 있겠군요. 부탁이란 건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득이 되는 관계니. 저는 신재혁 헌터님과의 거래를 원합니다.”
여기까지는 신재혁도 예상하는 바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박주관이 행한 행동은 신재혁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먼저인천을 구해주신 데에 국군과 국민을 대표해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한국 최대의 권력자가 허리를 직각으로 꾸벅 숙였다. 비굴할 정도로 공손한 태도에 신재혁은 속으로 놀랐다. 살짝 부담스럽기도 했다.
서로 다른 생각이 교차했다.
‘뭐야. 무슨 부탁이길래 이런 저자세로 나오는 거지….’
‘반드시 잡아야 한다!’
상대는 새로운 S급 헌터로 추정되는 존재였다. 박주관은 S급 헌터 한 명이 어떤 이득을 가져오는지 알았다. 평범한 무역으로는 결코 벌어들일 수 없는 외화, 국제회의에서의 권력, 국가 전체의 안전. 박주관은 지독히 계산적인 사고를 지닌 위인이었고 다분히 타산적인 정치꾼이었다. S급 헌터 하나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알량한 자존심 따위 얼마든지 팔 수 있었다….
“이번 인천 사건이 너무 크게 터졌습니다. 제가 어떻게 손쓸 새가 없을 정도로. 군대가 출동했는데도 막을 수 없었고, A급 헌터였던 여동연 씨의 죽음이 방송에 찍히는 바람에 대중의 관심이 지나치게 쏠려 버렸죠.”
이번 일로 자신의 국방 지원 정책의 효용이 의심을 받을 터다. 보스 하나를 상대하는 데 비싼 돈을 들여 사들인 수십 대의 탱크와 최신형 전투기도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군대에 돈을 투자해도, 걸맞은 성과를 내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실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제가 성인 나이 제한을 18세로 내린 적이 있지요.”
“아…. 알고 있습니다.”
신재혁이 위키에서 본 항목을 떠올렸다.
안 그래도 출산율이 저조한 나라인데 게이트 때문에 인구수가 더욱 줄어들자 경제활동 가능 인구를 늘려야 한다는 이유로 성인 나이 제한을 내리는 법률을 통과시킨 사건이었는데, 실상은 전국 곳곳에 배치할 군인을 더 징발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연히 국민의 반발이 있었지만, 방패막이로 내세운 여성가족부를 폐쇄하고 국회의원 몇 명을 모가지하는 것으로 일단락된 사건이었다.
“그때는 언플으로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이번 일로 그 일까지 재조명되었다간, 반대자들이 기세를 탈 수 있어서 말입니다.”
아무리 독재자라도 적은 있기 마련이다. 오히려 독재자이기에그를 찌를 기회만을 노리며 구밀복검하는 하이에나들이 더욱 많았다. 두 번의 연달은 실책은 하이에나들에게 합법적으로 독재자를 찌를 명분을 주리라.
‘크음….’
신재혁이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전생에 귀족을 상대하는 데 이골이 난 성기사는 그의 발언 속에 숨긴 의미를 해석할 수 있었다.
자신의 약점을 먼저 내보이는 것으로 ‘나는 너를 신뢰하고 있다’라는 기분을 주는, 능숙한 정치인의 화법. 내가 이런 위기에 처해 있으니 자기를 도와 달라-라는 간접적인 요청이었다.
골치 아프게 빙 돌아가는 것을 싫어하는 신재혁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뭘 바라십니까.”
호오. 박주관이 눈을 빛냈다. 새파랗게 어린 나이치고는, 꽤 노련한 대처였다. 국회의사당의 늙은이들조차 자신을 앞에두면 보통 위축되기 마련인데, 이 청년은 그런 낌새가 전혀 없었다. 단순한 치기는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의 힘에 대한 확신일까? 아니면 이런 상황에 익숙한 걸까….
박주관이 자세를 고쳐앉았다. 턱을 괴고, 상체를 앞으로 쏠린 자세. 상대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모션이었다.
“…이름을 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름을?”
신재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새로운 S급의 이름값을 팔아먹겠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정체를 밝히는 건 곤란한데.’
해결사 일이든, 에덴의 비밀을 조사하는 일이든 어느 쪽도 유명세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침묵에서 불만을 읽은 박주관이 재빨리 반응했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신재혁 각성자님이 신원이 알려지는 일을 꺼리는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각하, 여기는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잠자코 둘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홍하린이 끼어들었다. 공적인 자리였기에 존댓말로 상황을 설명했다.
“영상이 SNS로 빠르게 유포된 바람에 새로운 S급 헌터가 있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습니다. 다른 S급 헌터인 김재민 헌터도 현재 필리핀에 열린 게이트를 처리하러 파견 나간 상태라 그의 공적으로 떠넘길 수도 없죠.
정부에서도 2번째 S급 각성자가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는 부정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대신, ‘정체는 밝힐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할 겁니다. 헌터 협회의 압력도 있겠지만 정부에서 막아드릴 수 있습니다.
동시에 S급 헌터가 한국군에서 키운 비밀 특수 부대에 있다는 소문을 유포할 생각입니다.
국민들은 국가기밀이라 s급 헌터의 정체를 밝힐 수 없는 것이라 알아서 착각해 주겠죠. 국방비 일부가 각성자 특수부대 양성에 투자된 것이라는 말이 돌면 정치인들도 이를 문제 삼을 수 없을 테고요.”
영리한 수였다. 적대자의 프레임을 약화하는 동시에 국방 우선책을 유지할 명분을 만들 수 있는 묘수.
게다가 자기 정체가 탄로 나지 않으니 용납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신재혁의 기색을 살피던 박주관이 다음 조건을 제시했다.
“두 번째는 국민의 안전을 위한 부탁입니다. 아시다시피, 김재민 헌터는 용병 일을 하느라 자주 자리를 비웁니다. 그런데 오늘처럼 그가 한국에없을 때 감당하기 힘든 게이트가 터진다면, 그때는 부디 국민을 위해 힘을 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국군이 전폭적으로 협력할 것을 약속드리며, 게이트 클리어 보수도 넉넉하게 드리겠습니다.”
“흠….”
신재혁으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 부탁이었다. 그는 성기사였고, 성기사란 누군가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 법이니.
하지만 일부러 그런 속내를숨겼다. 저 음흉한 너구리에게 괜히 목적이나 생각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대가는?”
박주관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가 서랍에서 준비해 둔 계약서를 꺼냈다.
면세 혜택, 살인 면허,요인 경호, 평생 연금, 국정원의 지원 등등…. 사인을 하면 즉시 이용할 수 있는 각종 최상위 혜택을 명시한 계약서였다.
“무엇을 좋아하실지 몰라서 일단 되는대로 준비해봤습니다만, 더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주십시오.”
확실히 계약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독소 조항도 없었고. 괜히 S급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죽 쑤는 꼴이 없도록 애초부터 최대한의 성의를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신재혁은 이런 조항들보다는 다른 이점을 원했다.
“저 역시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경청하겠습니다.”
"각성자 등록을 하고 싶습니다. 제 명의로. 등급은 B급으로."
“위조 라이선스를 바란단 의미이시군요. 물론 가능하지요.”
“국내 게이트의 자유입장을 허용해주십시오. 등급에 상관없이, 제가 원하면 언제 어디든.”
“게이트 관리는 국군과 협회의 공동 책임이니, 역시 문제없습니다.”
좋아. 신재혁은 망설임 없이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박주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원만한 관계를 이어나가기를 바라죠…. 아, 참. 근데 혹시 계약서 뒷면을 봐 주실 수 있습니까?”
뒷면? 설마 무슨 장난질을 쳐 놓은 건 아니겠지. 갑작스러운 부탁에 신재혁이 떨떠름하게 계약서를 뒤집었다. 수상한 조항이 있다면 즉시 찢어버릴준비를 마치고.
“그, 별 건 아닌데. 누가 뒷면에 메모를 해 놨길래. 요즘 제가 눈이 좀 침침해서 그런데, 뭐라 쓰여 있는지 읽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때와 장소에는 그닥 어울리지 않는 부탁이었지만, 별 것 아닌 부탁이길래 신재혁이 흔쾌히 요청을 들어줬다.
“나는 오늘 절대로 아무 부작용이나 조건, 대가 없이 상태창을, 상태창-아 죄송합니다. 눈앞에 상, 그게 떠올라서 닫느라.흠흠- 각성하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며 누구도 강탈해 갈 수 없다-라고 적혀 있네요.”
그냥 누군가 장난으로 낙서한 뻘글 같았다. 중간에 상태창이란 단어를 읽으니 자동으로 상태창이 나타나면서 시야를 가리는 바람에 좀 버벅거렸다. 불편한 시스템 같으니.
“아, 죄송합니다. 제 아들이 장난친 모양이군요. 집무실에는 그렇게 들어가지 말라고 말했건만. 제가 단단히 혼을 내 두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장난 좀 칠 수도 있죠.”
중요한 일은 아니었기에 신재혁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이제부터 번거롭게 미스터 B를 거칠 필요 없이 ‘합법적’으로 게이트 탐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감사합니다. 부탁을 들어주셨으니, 저도 마땅히 선물을 드려야겠지요….”
박주관이 명함을 한 장 건넸다. 대통령 자신의 개인 명함이었다. 대기업 회장이나 정계 최중요 인사만 받을 수 있는 보물.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생기신다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아니면 국정원 측을 통해서 연락 주셔도 좋구요.”
메모 하나 읽어준 것치고는 지나치게 값비싼 대가였다. 정확히는 메모를 구실로 좀 더 긴밀한 관계를 이어나가길 바란다는 간접적인 의사표명이겠지.
그렇기에 신재혁은 명함을 받아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이걸 받는다면 뭔가 빠져나올 수 없는 길에 엮이고 말 것 같았다.
‘하지만 상대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자다. 하나쯤 받아두면….’
어차피 제 인생은 충분히 꼬일 만큼 꼬였다. 더 복잡해질 일도 없었다. 결심을 굳힌 신재혁이 명함을 받았다. 명함을 받으면 마땅히 하나를 줘야 한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미안한 표정으로 신재혁이 박주관을 쳐다봤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명함이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명함을 교환하지 못했음에도 박주관은 전혀 아쉬운 표정이 아니었다. 신재혁이 계약서에 사인했을 때부터, 메모를 읽을 때, 명함을 받을 때까지 그의 표정은 한결같이 똑같았다.
“제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연락드릴 수 있으니까요.”
권력자權力者가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