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5화 〉45화 – S급 회의 (45/72)



〈 45화 〉45화 – S급 회의

정원 한가운데 노인이 있었다.

신선과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초로의 노인이었다. 백설을 맞은 듯 하얀 머리가 서리 낀 모양의 수염과 무척이나 어울렸다. 그의 절제된 몸놀림에 맞춰 일본식 검도복이 나풀거렸다.

노인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나무 앞에 이젤을 세워놓고, 이젤 위에 캔버스를 올려서 자신의 붓을 휘두르고 있었다. 일 획의 휘두름마다 정교한 선이 그어졌고, 수묵화 속의 나무는 더욱 진짜 같아졌다.


정신을 집중해 붓을 휘두르는 노인에게 선글라스를  여성이 다가왔다.

“お年寄り, すぐに会議の時間です。”
어르신,  회의시간입니다.

노인이 자신의 붓- 카타나를 내려보았다. ‘쿠사나기’라 불리는 자신의 애검. 날에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은 채, 오로지 칼끝만 먹물로 더러웠다.

그는 검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캔버스에는 단 하나의 칼자국도 없이, 오로지 먹으로 이루어진 노목이 당당한 자태로 뿌리를 박고 서 있었다.

“もう時間がそうなったか。年齢をすぎ食べてみると、時間の感覚がますます曖昧になるというね…。”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나이를 지나치게 많이 먹다 보면 시간 감각이 점점 모호해진다는 말이지….

노인은 얼룩덜룩한 피수건으로 날을 닦고 카타나를 검집에 넣었다. 스릉-. 익숙한 길을 따라 칼이 저항감 없이 집에 안착했다. 여성이 카타나를 정중히 받았다.


노인은 저택 안채로 향했다. 그가 홀로 사용하는 거대한 일본식 저택이었다. 한 명이 생활하기엔 지나치게 넓었지만, 그는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일본 내각에서 노인 하나만을 위해 진상한 저택이었으니.

그가 도착한 곳은 특수 개조된 방이었다. 벽면 전체가 거대한 화면인 화상회의실. 늦게 도착했는지, 이미 회의 상대의 영상이 화면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노인의 출석을 발견한 한 여성이 브라질어로 인사를 건넸다. 통역사가 실시간으로 말을 번역했다.

“검귀 할배! 오랜만이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무거운 엉덩이를 든 거지?”

친한 친구 사이에서 오갈 있는 짓궂은 인사말. 하지만 여성의 이죽거리는 어조만으로도 통역사가 최대한 순화해 표현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영국인이 끼어들었다.

“멍청하긴,그만큼 중요한 안건이라는 거지. 돈이나 벌 생각으로 여기 모인 돈벌레는 너밖에 없다고.”
“…지금 시비 거는 거냐, 꼬맹아?”
“또 덤벼 보시지, 아줌마. 다시 박살 내줄 테니.”

텔레포터Teleporter, 아드리아나 마노엘라의 말을 제우스Zeus, 유피미아 테일러가 받아쳤다. 서로를 째려보는 두 여인 사이에서 불꽃이튀었다. 둘의 사이가 안 좋기는 유명했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졌다. 금방이라도 싸움이 터질 것 같아 노인이 입을 열었다.

“허허, 노부는 그저 강자를 찾고 있을 뿐…. 싸울 상대를 찾는다면, 노부가 손수 상대해 주겠네.”

검귀劍鬼, 사사에 타카하시의 쭈글쭈글한 눈매가 섬뜩하게 빛났다. 화면 너머로도 선명히 느껴지는 형형한 살기에 통역사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이것이 S급의 기세..!'

러시아의 A급 헌터이자 2대헌터 협회장 빅토르 안드레예프에 의해 긴급 소집된 S급 회의. 최강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초인들의 모임이었다.

S급 회의에는 각국 협회 본부장이나 다른 임원들도 부르지 않고, 오로지 협회장과 S급 헌터만 참가가 가능했다. S급은 헌터임과 동시에 하나하나가 협회의 최고이사회 임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세만으로 좌중을 진정시킨 타카하시가 회의 참가자의 면면을 훑어봤다.

“클클, 그리고 엉덩이 무겁기는 다들 매한가지 아닌가? ‘용사’, ‘천마’, ‘초능자’가  회의에 모이는 것이 얼마 만인지…. 그런데 의외로 ‘파라오’가 출석하지 않았군?”
“그분은 한 달째 사하라 사막에서 S급 보스, 괴목怪木 네펜데스를 상대하고 있는지라. 불가피한 불참이라 소집 불응 패널티도없을 겁니다.”

회의 진행자 역인 빅토르 협회장이 타케하시의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강자에게만 관심을 갖는 검귀도 몇 주 전에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대도시 하나 크기의 거대 나무를 상대하기 위해 빛과 물을 차단하는 모래 돔을 만들어 가뒀다던가. 서로 결정타를 먹일 공격기가 없어 자연스럽게 지구전양상으로 흘러간 것. 괜히 밖에서 간섭했다가 빛이 조금이라도 새어 들어가면 네펜데스가 광합성으로 순식간에 체력을 회복했기 때문에 네펜데스와 파라오의 일 대 일은 한 달 동안이나 지속되고 있었다.

“그 싸움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보스나 그 친구나 참 독하군, 독해…. 여튼 간만에 얼굴 보니 반갑구만.”
“반갑소, 어르신.”
“….”
“….”

검귀의 인사에 동양에서는 천마天魔, 서양에서는 스카이스크래퍼SkyScraper라고 불리는 헨리 클라크가 화답했다. 통역사의 입모양을 읽은 용사勇士 김재민도 고개를 까딱 끄덕였다. 초능자超能者 장 우이는 밀린 중국 국가 주석업무를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기에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에잉, 이런 사교성 없는 녀석들….”
“큭큭, 만나면 싸울생각밖에 없는 전투광 할배를 누가 좋아하겠어?”

S급 회의가 굳이 화상 회의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비행기를 타는 수고를 덜기 위한 것도 있지만, 주된 이유는 S급 간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한 명 한 명이 재해에 가까운 초인인데 싸움이라도 났다간 회담국에 두 배의 재앙이 제 발로 찾아온 셈이다. 그리고 태풍과 지진의 싸움에서 태풍이나 지진은 죽지 않는다. 죽어 나가는 것은 민간인들뿐이지.

실제로   제우스와 텔레포터가 싸움이 붙어 대재앙이 일어날 뻔한 이후로 협회의 방침은 최대한 S급 간의 거리를 떨어뜨려 놓는 것이었다. 민간인의 피해도 피해였지만, S급 간의 결투에서 한 명이 심각한 부상이라도 입었다간 인류 전체의 전력 손실이나 다름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피미아와 아드리아나의 대결은 아드리아나가 왼쪽 귀를 태워 먹고 물러서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자자, 그만 싸우시고. 파라오, 무함마드 샤리프 빼고는 다 오신 것 같군요.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소란을 진정시킨 빅토르 협회장이 화면에 동영상을 틀었다. 요즘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가장 핫한 영상. 하늘에서 떨어진 빛기둥이 건물 크기의 보스 몬스터를 녹이고 있었다. 화끈한 일격에 몇몇이 감탄사를 흘렸다.

“호오오…. 이건.”
“미리 안내드린 바와 같이, 오늘의 안건은 대한민국 인천이라는 도시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한 것입니다.”
“새로운 S급의 등장이 추정된 사건 말이지? 신원이 확인된 겐가?”

강자 물색에 적극적인 검귀가 열의를 보였다. 아쉽게도 협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입니다. 박주관 대통령에게 협조를 요청했지만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어서. 눈치를 보아하니 정체를 숨길 작정인 모양입니다만….”
“쩝, 아쉽구만.”

잠시 이야기가 새었군요. 빅토르가 헛기침하고 본제로 돌아갔다.


“이번 사건은 평범한 게이트 아웃브레이크가 아닙니다.”

모두가 침묵으로 내심 동의했다. 보고서를 읽었기에 알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문명 무력 레벨 경험치가 99.99%에 도달하자 연달아 터진 다섯 개의 게이트. 그 게이트를  것으로 추정되는, 기존의 S급을 초월하는 무시무시한 보스. 다른 보스들의 메시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윤곽이 드러난 네 명의 왕 중 하나.

“‘사천왕’이라….”
“서울 용암 거인이랑 아마존 악어, 베를린 도마뱀의 메시지에서 언급된 녀석들이었지? 솔직히 반신반의했는데, 실제로 존재하는 거였구나.”

긴 금발을 손가락으로 꼬며 유피미아가 보고서의 내용을 머릿속에 되살려 아는 체를 했다.

사천왕. 수십 개의 메시지가 증언한 몬스터의 우두머리들. 사천왕에 관한 것이 진실이라면, ‘마왕’이라는 존재도 실제로 존재할 가능성이 높았다.

눈앞으로 다가온 위협에 S급들의 안색이 다들 심각해졌다.

사실 이번사천왕, 벨리알의 경우는 무력 자체는 S급 헌터로 비벼볼 만했지만, 힘이 늘어나는 속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만약 이들 중 누군가가 벨리알과 일 대 일로 싸워야 했다면 벨리알의 성장을 따라잡지 못해 소모전 끝에 잡아먹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천왕 하나가 저리 강할진대, 다른 사천왕이나 마왕은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가라앉은 분위기에 누구도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행히 어색한 정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서류 한 장에 막 사인을 마치고 다른 서류를 집어 들면서 장 우이가  뱉었다.

“보스가 처리된 순간 떠오른 시스템 로그를 기억하시오?”

당시 자경단 활동을 하느라 시스템을확인할 여유가 없었던 헨리 클라크가 보고서를 뒤적거렸다. 관련 부분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 ===


문명 무력 수치 레벨업.
Lv. 0 > Lv. 1

문명 보상을 제공합니다.
-신성력 각성자 해금

=== 」


“신성력? 신성력이 뭐요?”
“마나 같은 새로운 기운으로 추정됩니다.  그래도 며칠 전부터 마나가 감지되지않는데 각성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놀랍게도 실제로 이능력을 사용하더군요. 영상에서처럼 황금빛을 띠는 기운을 이용해.”

스킬 테스트 영상으로 화면을 바꾼 빅토르 협회장이설명했다. 신규 각성자들이 상처를 회복시키고, 황금색 망치를 소환하는 등의 스킬을 시전했다. 기존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스킬들.

영상을 유심히 살피던 아드리아나 마노엘라가 날카롭게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힘과 상당히 비슷한 것 같기도 하군. 짐작 가는 바가 없나? 김재민.”

회의 참가자의 관심이 김재민에게 쏠렸다. 모두가 내심 궁금해하고 있었다. 김재민의 성명절기로 불리는 <폭풍의 시>. 그 기술을 사용할  나타나는 황금색 빛기둥과 상당히 유사해 보이는 기운이었다.

의외로 김재민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맞다.악마를 상대하는 데 특화된 기운이지. 악마 한정으로는 마나보다  강한 위력을 낼 수 있다.”
“과연…. 상성의 효과란 건가요? RPG 게임 같군요.”

S급 사이에서도 유독 빠른 게이트 공략 속도의 비밀을 알게 된 이들이 납득했다. 그러나 긍정적인 반응만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심성이 배배 꼬인 아드리아나가 또 시비를 걸어왔다.

“흥, 그럼 그렇지. 네가 그렇게 보스를 쉽게 잡을  있던 것도  이유가 있었군. 이번 인천의 보스도 사실 네가 죽인 건데, 새로운 S급이 나타난  대통령이랑 짜고 치는 거 아니냐?”
“잠깐, 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브라질 최대 범죄 카르텔의 보스인 아드리아나는 회의 참가자 중에선 제 말에 자꾸 토를 다는 영국 창년 다음으로 김재민을 싫어했다. 그가 열성적으로 타국의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것이 아니꼬웠다. 상대방이 절박해질수록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기 마련인데, 저놈은 용병술의 기본조차 몰랐다.

애초에 다른 S급은 타국 게이트를 클리어해주는 일에 그리 관심이 없었다. 기껏해야 강한 보스가 발견되면 검귀 할배나 관심을 가지는 정도. 스카이스크래퍼는 똥개처럼 지 집 지키느라 바빴고, 초능자는 이름값도  하고 매일 국가 주석 업무에 시달렸으며, 겁쟁이 제우스 년이나 이집트의 파라오도 용병 일엔 소극적이었다.

그리하여 용병 시장에서 유의미한 S급 인력은 사실상 텔레포터 자신과 용사 김재민, 둘 뿐이었는데 김재민은 제 스케줄이 비는 대로 시간표에 게이트를 꽉꽉 채워 넣으며 헐값에 게이트를 처리해줬다. 덕분에 손해를 보는 것은 자기뿐이었고.

“어디 한 번 해명해 보시지? ‘용사’ 나리.”

개인적인 앙심과 짜증을 담아 아드리아나가 쏘아붙였다. 면전에서 모욕적인 말을 들어 화가 날 법도 했지만, 김재민은 무덤덤했다. 그는 불신과 적의에 익숙했다. 그는 타인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조금 더 생산적인 추론을시도했다. 신성력이라. 한국에서 자신을 제외하고 신성력을 사용하는 이를 딱 한 명 알고 있었다. 어머니 가게 단골이라던, 관악구 게이트 이후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내.

‘신재혁…. 하지만 녀석의 신성력은 사천왕을 일격에 쓰러뜨릴 정도가아니었는데. 고작 공작급 최상위 악마도 쓰러뜨리지 못했었지.’

경찰서에서 보니 제법 잘 싸우던데, 게이트에서 열심히 사냥해서 레벨을 올린 것일까? 하지만 어머니께 듣기로는 심각한 히키코모리라 하던데, 그런 신재혁이 S급에 오를 만큼 노력했을까. 김재민은 확신하지 못했다.

‘어쨌든 직접 만나보지 않는 이상에야 알 수 있는 건 없지.’

생각을 정리한 김재민이 입장을 발표했다.

“나는 그날 필리핀에 있어서 인천 참사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집을 지킬 S급이 새로 생겼으니, 내가 외국의 게이트를 더 적극적으로 클리어할  있게 된 것은 희소식이라 수 있겠군.”

그래. 자기는 빌어먹을 악마나 쓰러뜨리면 되는 것이다. 어머니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오로지 집에,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백 년 동안이나 에덴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무도 그의 발언을 의심하지 않았다. 인천에 게이트가 열렸을 때 김재민이 필리핀에 있었다는 공식적인 기록과 증거는 충분히 차고 넘쳤다. 아드리아나도 그냥 화풀이로 한  찔러본것에 불과했기에 별다른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빅토르 협회장이 상황을 정리하고 회의를 재개했다.

“흐음. 김재민 헌터께서도 아시는 게 없으시다면야…. 박주관 대통령이 숨기고 있는 게 아니라 정말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걸 수도 있겠군요. 뭐, 이 건은 나중에 한국 본부장을 통해 더 알아보도록 하죠. 그럼 지금부터는 문명 무력 수치에 관한 건과 향후 방침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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