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6화 〉46화 - 초월자 (46/72)



〈 46화 〉46화 - 초월자

“'식탐'이 죽었군.”


세계의 최심부, ‘모든 곳의 아래쪽’에 깊은 역립성逆立城이 있었다. 무려 지하의 제일가는 구두쇠인 ‘탐욕’이 자신의 주인 되시는 위대한 존재를 위해 자처해서 세워 내린 지하성.

지하의 존재들이 성의 주인을 경외하며 이르기를,

만마전万魔殿,
판데모니움Pandemonium,

혹은 마왕성魔王城.

“결국 실패한 건가.”

지하성 최하층. 빛 한점 닿지 않는 어두컴컴한 알현실에서, 본래는 ‘식탐’이있었을 빈자리를 쳐다보며 누군가 중얼거렸다.


[이래서 신생 악마는….  번째 출전 기회였는데, 고작 살의도 통제하지 못하고 날뛰어선 멋대로 뒤져버리다니. 무능한 놈-!]

수백 마리의 파리 날갯짓이 합쳐 만들어진 듯한 역겨운 목소리가 불평했다. 불쾌한 기분을 반영하듯 앵앵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더 크고 선명해졌다.

-괜찮습니다. 그는 저희 사천왕  최약체. 결국 필멸자는 지옥의 군세를 버티지 못하고 꺾이고 말겠죠.

감미로운 음성으로 '오만'이 '질투'를 달랬다. 음침한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천상의 목소리였다. 한마디 한마디가 노래와 같은 이의 외모는 얼마나 아리따울까. 그러나 검게 물든 열두 장의 날개가 히잡  여인처럼 목소리의 주인을 겸손하게 가렸다.

-그러나 호위도 부하도 없이 적진 한복판에 강림한 것은 그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 없군요…. 이 얼마나 경솔하고 오만한 선택이었는지!
[이래서야 전대 사천왕이었던 탐욕보다도 못하지 않나! 차라리 용사에게 죽은 놈은 납득이라도 가능하지!]
“진정하라고…. 인간에 대한 살의는 신생 악마의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인데, 인간을 마주하고우리 같은 고대 악마처럼 차분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게다가 열등감 때문에군공 쌓기에 혈안이  놈이었잖아. 어차피 그놈의 식욕 때문에 언젠가  번 사고 칠 놈이었는데, 미리 죽은 걸 다행으로 생각하자고. 덕분에 지구에 대한 유용한 데이터도 얻을 수 있었고.”

‘나태’에게 달린 두 개의 입 중 하나가 떠들었다. 호들갑스러운 아줌마의 목소리. 뺨에 달린 놈이었다. 수다스러운 보조 입의 말이 끝나자, 코 아래의 입이 진중한 노인의 목소리로 물었다.

“흐으음, 그런데 마왕께서는?”
[…그분께선 명상 중이시다. 늘 그렇듯이식음을 전폐하고 슬피 울면서.]

마왕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는 엉뚱한 행실이었으나, 평소 마왕의 기행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되묻지 않았다. 백 년이란 시간은 유별난 행동을 평범한 습관으로 받아들이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째서 주께서는 사천왕 중에서가 아니라, 낯선 존재를 데려다 2대 마왕으로 삼으셨을까요…. 하긴, 제가 감히 그분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을리가 없지요.’

마왕의 불참도 그들에게 중요한일은 아니었다. 이번 회의는 기존의 계획을 재점검하는 것에 불과했으니.

대신 오만은 질투의 이해 가지 않는 태도에 대해 질문했다.

- 그런데 질투 당신. 전대 마왕, '분노'는 이렇게 순순히 따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의외로 2대 마왕에게는 충성스럽군요? 당신이라면 웬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 왕좌를 차지했다고 길길이 날뛸 줄 알았는데.
[흥. 따르기는 싫지만, 로힘께서 손수 임명하셨으니 싫어도 따를 수밖에.]

악신의 이름을 팔아먹었지만, 실상 그렇게 말하는 질투의 속내는 딴판이었다.

이번 마왕은 왕좌에 관심이 없었다. 단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잠시 마왕이란 직책에 앉아 있는 것뿐. 중간계 침공이 완전히 마무리되는 날 자기에게 지옥의 왕관을 넘겨주기로 다른 사천왕 몰래 거래했으니, 그 대가로 자신도 잠자코 따르고 있는 것.

물론 약삭빠른 악마들이 그의 변명을 순수히 믿을 리는 만무했다. 질투심 많은 그가 신을 싫어하는 사실은 유명했다. 그래서 ‘질투’는 다른 사천왕들이 자신의 의중을 짐작하고 비밀스러운 진실에 접근하기 전에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화제를 넘겼다.

[그런데 제아무리 약하다 해도 그것은 우리의 기준. 명색이 사천왕씩이나 되는 녀석이 어쩌다 필멸자에게 죽은 거지? 중간계에  정도 강자가 남아있었나?]
-모두 시스템의 농간이겠죠. 용사에게 주어졌던 것과 같은 힘. 각성자라 불리는 지구인에게도 같은 축복이 허락됐다는데. 도대체 주께서는 무슨 생각이신지….
“아니. 이번 건 단순히 재수가 없었던 것 같은데. 이걸 봐라.”

마기가 꿈틀거리더니 허공에 마법적인 이미지를 영사映寫했다. 성정이 흉포하고 폭력적이라 공격 마법 외에는 범용성이 낮은 마기를 이렇게 정교하게 제어할 수 있다니! 흑마법사들이 보면 까무러칠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 모인 이들은 아무도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사역마가 찍은 영상을 확인했다. 그 정도 이적은 가뿐히 행할  있기에 사천왕이라 불리는 것이다.

- 과연…. 저 정도의 신성력이라면, 분명 그 성기사로군요.

[론지노-!]

 자리에 모인 세 명의 절대자가 모두가  필멸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초대 마왕 분노의 강력한 중앙 집권적 통치하의 지루하고 보수적인 지옥 역사상  없는 몹시 특이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몇백 년 전, 지옥에 침입한 열두 명의 파티. 파티 속에 심어둔 끄나풀 몇을 시켜 내부를 분열시키면 쉽게 와해될  알았더니, 도리어 성기사 하나가 미친 듯이 날뛰는 바람에 결국 질투가 손수 처리해야했다.

[엘로아흐가 영혼을 채  이후로 행방을 몰랐는데, 저런 곳에 있었나..!]
-여전히 압도적인 신성력이군요.그라면 힘을 제약당한 식탐이 맥을 추지 못할 법도 하죠. 바닥을 모르는 신성력으로 거의 무한히 재생하는 골치아픈 녀석이었으니.
“쯧쯧. 하필 ‘식탐’이 소환된 위치와 겹치다니. 운도 지지리도 없지.”
-아니면, 이것 역시 주의 잘나신 그 계획The Plan의일부일지도 모르고요.

한껏 비꼬는 목소리로 오만이 빈정거렸다. 한때 빛을 섬기는 대천사였던 그녀에게 엘로아흐는 존경의 대상임과 동시에 증오의 대상이었다. 흥분한 타천사의 날개에서 위압적인 살기가 흘러나왔다.

[…여튼 다음 출전은 네 차례로군. 나태.]
“제엔장, 귀찮게…. 영화 봐야 하는데…, 지구에서 어렵게 공수한 거라고.”

나태의 투덜거림에 질투가 수만 조각의 겹눈 중 육백 육십 육알 가량을 일제히 끔뻑였다.

‘밀수꾼이라도 있는 건가? 저 전동휠체어라는 탈 것도 그렇고, 미묘하게 지구의 문물에 해박한 것도 그렇고.’

뭐 상관없겠지. 그건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자기가 눈독 들인 론지노란 성기사가 어째선지 지구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질투는 다른사천왕들이 모르는 비밀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전대 마왕, 분노를 몰래 감시할 때 알아낸 사실.

론지노는 신혈을 품고 태어난 인간이다.

문자 그대로 신의 일부를 영혼에 지닌 존재. 그것을 손에 넣는다면 신과 같은 힘을 얻을 수 있을 터.

그런데 자신이 아는 론지노의 성격에 사천왕을 만나면 숨기는커녕 정면에서 달려들 것이 틀림없었고, 그랬다간 론지노가 붙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다른 이들이 그를 붙잡아  비밀을 알아내기 전에 자기가 먼저 그 신성을 취해야 하는데..! 하필이면 그의 출전 순서는 네 사천왕  꼴찌였다.

질투는 초조한 속내를 숨기고 은근하게 떠봤다.

[그래서 출전하지 않을 건가? 그럼 나에게 기회를 양보하는 것은 어떤가?]
“그럴 리가! 에덴과 달리 지구의 문화는 몹시 풍부하단 말이지. 그래서 침략할 가치가 있어. 안 그래도 백 년 사이 애니메이션이랑 게임이란 장르가 굉장히 발전했던데. 당분간 내 권태를 해소할 시간 떼우기 정도야 되겠지….”

나태란 즉슨 권태의 악마. 정신적으로는 우주에서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그였다. 영생에 가까운 삶은 자연스럽게 무료함을 낳았다. 그는 언제나 권태에 사로잡혀있으며, 지나치게 귀찮지 않은 선에서 적극적으로 따분함을 해소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므로 지구 정복은 괜찮은 심심풀이가 되리라…는 이유도 있었지만,실은 나태는 질투의 반응에서 묘한 위화감을 눈치챈 후였다.

‘질투가 저리 집착하는 걸 보면 지구에 뭔가 있긴 있군…. 식탐이 소환된 곳이 분명 한국이라는 국가였던가.’

나태의 명석한 두뇌가 성실하게 일하기 시작했다.

백 년 전 분노와 동귀어진한 줄 알았던 용사가 한국에 살아있다는 첩보를 받고 사실관계를 확인하려 일부러 식탐에게 소환지로 한국을 넌지시 추천한건데. 제 ‘설득’에 낚인 멍청한 벨리알은 원했던 성과는 아니지만, 나름의 월척을 건졌다.

‘개미집을 들쑤셨더니 튀어나온  용사 대신 몇백 년 전에 죽은 줄 알았던 성기사라. 론지노…. 인간들이 이르기를 신의 가장 큰 사랑을 받는성인이라 하던가? 녀석도 나름 괜찮은 수집품이 되겠군. 신을 모독하기 괜찮은 작품이 탄생하겠어.’

이번 출전은  흥미로운 여흥이 될 것 같았다. 마침 자기 권속 중에 론지노와 악연이 있는 녀석도 있었고.

‘하지만  한국 도심에 소환을 준비했다간 이번처럼 쉽게 들키고말겠지.’

다른 적합한 소환지가 필요했다. 한국과 가까우면서도 힘을 복구하기 위한 제물이 풍부한 장소.

머릿속에 지구의 세계 지도가 펼쳐졌다. 육 밀리 초 만에 그는 괜찮은 소환지를 물색할수 있었다. 한국 위에 있는 군부 국가. 사령술사로서의 특기를 극대화할 수 있는 나라.

한국과 너무 가까운 것 아닌가? 본래 계획대로 식탐을 이용해 용사의 생사여부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만에 하나 실제로 용사가 한국에 살아있다면. 솔직히 분노와 동급이라는 용사를 힘이 제약당한 상태에서 쓰러뜨릴 자신감은 없었다.

‘상관없겠지. 내가 비밀리에 연구한 그 비술이라면….’

설령 용사가 아니라 분노가 오더라도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으니.

6.66초 만에 계획을 확정한 나태, 벨페고르의 손끝에서 마기가 번뜩였다. 척박한 돌바닥에피처럼 붉은 마법진이 그려졌다. 진에서 빛이 뿜어지면서 로브 인영 하나가 소환되었다.

“이스카리옷, 나의 종아.”
“예, 주인이시여. 명하소서.”
“계획을 실행하라. 나의 강림 의식을.”
“받들겠나이다, 죽음의 군주시여….”

***


우주를 가르는 은하수 위에서, 밤하늘을 총총히 수놓는 별무리 위에서, ‘모든 것의 위’에서 기꺼이 발아래를 굽어살피시던 빛의 형태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이건 상정 외의 사태로군.」

천상의 궁전에 기거하시는 이께서 졸린 눈으로 지상의 한 사내를 바라봤다. 지구에 존재하는 유일한 성기사. 그 자신께서 손수 에덴에서 지구로 옮긴 영혼이었다. 자신으로부터 시작한 황금빛 길이 그에게로 이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본래는꽁꽁 얼어붙은 상태여야 할 통로….

「그의 각성은 계획에 없었는데. 어디서 틀어진 거지?」

빛께서 지옥에서 미쳐 날뛰던 성기사의 모습을 회고하셨다. 그때가 저번, 아니 저저번 잠에서 깨었을 때던가. 잘 모르겠다. 더 오래전인  같기도 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악마를 학살하던 자신의 어린 양. 어서 죽어야 계획대로 영혼을 재배치할 텐데, 재생력 때문에 죽지도 않고 까딱하다간 정신이 완전히 붕괴해 타락할 위기였다. 그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기에 성력을 차단하고 강제로 임종을 맞이하게 한 것인데.

「피의 영향인가?」

원래는 차츰 경과를 지켜보며 천천히 신성력을 회복시키려 했다. 그가 세계의 비밀을 파헤치고 자신의 뜻을 발견하여 위대한 계획을 이해할 때마다 조금씩.

빛께서는 그분의 첫째 아들이요, 최초의 피조물인 사타니엘의 경우로 중히 쓰일 말일수록 더욱 완벽히 통제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었다. 그리고 완벽한 통제를 위해서는 적절한 당근이 필요했다.

위업, <아가페>. 시스템이 인정할 정도로 광신도인 영혼이다. 신성력의 회복은 자신의 어린 양에게 무엇보다도  기쁨이요, 최고의 보상일 터. 성력의 회복을 유인책으로 제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권속을 얻으려 했는데.

「시간을 들여 완벽히 장악하려 했거늘. 스스로 회복해버리다니. 흠….」

그러나 예기치 못한 불상사에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대신, 빛께서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셨다. 이변을 대비해 준비한 안배가  역할을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빛께서 지상에 떨어진 ‘별’의 상태를 확인하셨다. 목줄은풀렸지만, 안배는 여전히 건재했다. 그러므로  사태는 충분히복구할 수 있는 오차였다….


「상관없겠지…. 사마귀 한 마리가 운명의 수레바퀴를 막을 수는 없으니.」

빛께서는 다시 눈을 감으셨다. 어떻게 운명이 흘러갔는지 확인하기 위한 잠깐의 기상조차 힘겨웠다. 아직 회복하지 못한 신성이 많았다. 완벽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가 시스템을 강제로 조작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혜택을 수백만의 인류에게 공유시키는 일은 더더욱. 우주가 몇 번 역변할 영겁 동안 시스템을 연구한 그였기에 겨우 신성을 대가로나마 시스템을 조작할 수 있는 것…,

아름다운 천상의 화음이 오직  분만을 위한 자장가를 노래했다. 만물을 탄생시키신 조물주를 향한 경의를 담은 합창. 조화로운 선율이 감상자의 귓속으로 시나브로 스며들며 지친 의식을 편안히 이완시켰다. 그리하여 회색 영혼의 수조 위에서, 태초의 빛께서 긴 잠에 빠져 드셨다. 아주  잠에.

 문명 무력 수치가 올라, 기약 없는 잠을 깨치는 알람이 작동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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