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47화 - 테스트 (1)
헌터 협회와 군대.
두 집단은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단체다.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주는 최고의 상생체계.
헌터는 개인의 무력은 강하지만 체력이 한정적이라 물량 군세에 약하다.
군대는 집단의 화력은 강하지만 방어가 유동적이지 못해 보스몹에 약하다.
따라서 수는 많지만 몸이 약한 잡몹을 군대가 잡고, 헌터 공격대가발 빠르고 재생력이 강한 보스를 잡는다.
이것이 헌팅 체계의 기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이처음부터 정석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게이트 사태 초기 헌터의 효용이 입증되기 전, 일부 군벌 국가들은 굳이 헌터 없이도 군대만으로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헌터 협회에가입하지 않고 오만하게도 자국의 각성자를 온전히 통제하고자 했다.
러시아가 대표적이었다.
오래전부터 한 명의 군사 독재자에게 지배된바, 러시아는 게이트 초기의 혼란을 강력한 군사력으로 진정시켰다. 그곳에 각성자의 자리는 필요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땅덩이가 지나치게 컸다. 군대만으로 전 국토를 커버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존 체계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결단이 필요했다. 각성자에게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헌터를 채용해야 할까? 독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중국의 베이징 참사를 떠올렸다. 게이트에 군대를 들이부었다가 언데드가 역류한 사건. 그 사건은 러시아의 독재자에게 잘못된 교훈을 주었다. 게이트에 멍청하게 군대를 밀어 넣는 대신, 밖에서만 공격하면 되는 것 아닌가?
러시아의 지배자는 최강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 무기만 있다면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는 ‘무기’를 사용하기로 결단했다. 자국의 무력을 선전하고, 각성자에 대한 입장을 세계에 포고하기 위한 기념행사로 수도에서 무기 시범 시행을 처음 실시하고 차츰 국토 전역으로 사용을 확대하려 했다. 그렇게 모스크바의 A급 게이트에 인류 최강의 결전 병기가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핵폭탄이.
몇몇 사람들은 그 결정에 우려를 표했지만 오만한 독재자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이번 일이 성공할 거란 나름의 근거도 있었다. 게이트에 포화를 퍼부으니 게이트가 소멸한 사례는 많았기 때문이다. 게이트를 통과한 총탄이 보스를 쓰러뜨린 것. 그래서 총보다 강력한 폭탄을 사용해도 그리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과연 게이트는 순순히 핵미사일을 통과시켰다. 게이트는 평등하다. 게이트는 단지 통로일 뿐, 핵미사일이라고 해서 출입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문제는, 후폭풍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평등했다는 점이다.
A급 보스를 녹인, 5000만 톤의 TNT에 필적하는 폭발력과 섭씨 일억 도가 넘는 열풍이 어떠한 제지도 없이 게이트 밖으로 풀려났다. 대응할 틈도 없이 모스크바가 초토화되었다. 국가적인 이벤트에 모인 국민, 장관들, 군인들 그리고 독재자 자신마저 한 줌 잿더미로 불탔다.
이튿날, 360도로 피어오른 버섯구름의 사진이뉴스 헤드라인에 박혔다. 세계가 그 소식에 경악했다. 각국의 지도자들은 게이트 연구도 없이 섣불리 행동한 점을 비난했다. 구호단체들도 방사능으로 오염된 도시에 함부로 발을 내딛기 꺼렸다. 모스크바는 체르노빌을 이은 죽음의 땅이 되었다.
사흗날, 러시아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임시수도로 지정했다. 외교상의 이유로 모스크바 행사에 불참해 살아남은 뱌체슬라프 이바노프 부총리가 임시 대통령이 되었다.
나흗날, 러시아는 기존의 태도를 정반대로 바꿔 곧바로 헌터 협회에 가입했다. 수도의 전력과 군사력을 잃은 상황에서 러시아가 의지할 곳은협회뿐이었다. 가장 적극적으로 협회를 배척하던 러시아는 아이러니하게도 국운을 각성자에 걸 수밖에 없었다.
적극적으로 협회에 지원금을 보내고 도시마다 협회 건물을 지었다. 뱌체슬라프의 무수한 지원과 뒷공작 덕분에 주석 업무에 바쁜 장 우이가 협회장 자리를 내려놓은 후 자국의 A급 헌터인빅토르 안드레예프가차기 협회장이 될 수 있었다.
‘모스크바 핵폭탄 사건’은 러시아란 강대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헌터 협회가 날아오르는 계기가 되었다.최대 반反협회국이던 러시아가 돌아서자 간을 보던 다른 나라도 하나둘 대세에 편승했다. S급 보유국인 미국, 영국, 중국, 한국, 일본, 브라질, 이집트가 협회를 지지했고 러시아, 인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강대국이 협회를 지원했다.
그렇게 헌터 협회는 세계의 질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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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 발신] [헌터 협회 한국 본부]
안녕하십니까, 신재혁 예비 각성자님.
귀하의 의무 각성자 테스트 일정이 정해졌기에 문자로 공지드립니다.
5월 5일, 오전 10시까지 서울 강남구의 헌터 협회 한국 중앙 본부로 참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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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 발신] [헌터 협회 한국 본부]
5월 5일, 헌터 협회 한국 중앙 본부로 각성자 테스트 일정이 잡히신 분들께 연락 드립니다.
이번 행사에는 어린이날을 맞아 협회에서 YJ 엔터테인먼트, GAP 엔터테인먼트 등 기획사와 연계한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사오니,
부디 방송에 송출되기 부적절한 언행은 삼가 주시고 자랑스러운 한국 예비 각성자에 걸맞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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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휴.”
신재혁이 휴대폰 화면을 껐다. 더 읽지 않아도 고리타분한 설교가 펼쳐질 것이 뻔했다. 헌터 협회가 각성자 이미지를 몹시 신경 쓴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나저나 드디어 날짜가 잡힌 건가."
벨리알을 잡고, 박주관 대통령과 비밀스러운 거래를 한 지 거의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박주관 대통령 덕에 S급을 찾으려는 소란은 잦아들었다. 국정원의 바람잡이와 댓글부대 덕에 여론은 새로운 S급이 국가 기밀에 속하는 비밀 특수 부대에 속해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그래. 그건 좋은데. 이 건은 왜 이리 느려?”
그런데 헌터 신분증을 준비해달란 부탁은 지금에 이르러서야 일을 하는 모양이다.
며칠 전에 홍하린에게 연락받은 바에 따르면, 심지어 협회에 방문해야 한다고 했다. 자신의 진짜 신분으로 B급 라이선스를 위조하는 일이라 수상한 정황을 남기지 않기 위해 테스트받는 시늉은 해야 한다는 듯하다.
“으으음. 영 못 미더운데….”
내심 미스터 B처럼 며칠 만에 라이선스를 뚝딱 대령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역시 국정원으로선 그 정도 일 처리는 무리인 것 같았다. 아니, 이 경우는 미스터 B가 지나치게 유능하다고 해야겠지. 그는 위조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프로페셔널이니.
그보다 신재혁은 라이선스를 발급받은 후의 일정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당장의 목표는 단순했다. 게이트를 클리어해 레벨을 올리고 마력을 쌓는 것. B급 헌터의 신분이면 세간의 관심이 지나치게 쏠리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힘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마력을 키우는 일이 급선무지.”
막대한신성력의 영향으로 상태창에 집계된 레벨은 매우 높은 편이었지만, 막상 레벨에 비해 자신의 마나량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각성 스킬이 타인과 자신의 상태창을 살필 수 있는 ‘통찰안’이라 신재혁이 마나를 이용하는 수단은 각성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마력 신체 강화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신재혁이 레벨을 올려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놀랍게도 마나를이용한 신체 강화와 신성력을 이용한 신체 강화는 중복 적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시너지인지, 일종의 곱 연산인지 각각을 따로 적용했을 때보다 두 종류 강화를 동시에 적용했을 때 효과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혼원>이라는 위업의 영향이 아닐까 추정 중이다.
"마나량이 많아질수록 출력과 유지 시간이 올라가겠지…."
어서 힘을 키워야 해. 신재혁이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뇌까렸다.
그간의 훈련과 인터넷 조사로 신재혁은 몇 가지 사실을 추론할 수 있었다. 상태창의 ‘문명 무력 수치’라는 항목은 전세계 각성자의 레벨이 오르거나 보스를 잡았을 때 경험치 바가 채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경험치가 100%에 근접했을 때 사천왕이 소환되며, 사천왕을 쓰러뜨림으로써 레벨이 오르면 보상으로 시스템의 기능이 일부 해금되는 것이 아닐까. 거의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실제로 자기가 벨리알을 쓰러뜨린 날 이후로 세간에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각성자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마나 대신 신성력을 사용하는 이들. 신유형의 각성자들은 에덴의 신성 주문과 비슷한 스킬을 사용하며 축복받은 무기를 소환하거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이나 김재민처럼….
“상태창.”
음성을 인식하고 신재혁의 눈앞에 초현실적인 창이 떠올랐다. 창 하단을 확인했다. 현재 문명 무력 수치는 1레벨. 최대가 5레벨이니, 앞으로 네 번의 레벨업이 남은 셈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남은 사천왕은 셋, 그리고 마왕까지 세면 전부 넷….”
몇 년? 몇 달? 아니면 몇 주? 언제 다시 사천왕이 소환될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는 이번처럼 소환을 미리 발견하지 못할 공산이 크다. 아마 다음번 소환되는 사천왕은 이전의 패배를설욕하고자 단단히 준비를 해오겠지.
“힘이 필요해….”
제약받지 않는 사천왕과 맞서려면 자신도 힘을 길러야 한다. 파멸을 노래하는 운명의 물살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고, 소중한 이를 지키고, 끝내는 마왕을 죽일 수 있는 힘을….
***
"본부장님, VIP로부터 연락입니다."
"박주관이? 그놈이 무슨 일로."
황희종 본부장이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무슨 일이실까요, 각하? 곧 일정 있어서 내가 쬐끔 바쁜데."
-황희종이. 너, 무슨 생각이야? 국정원 요원들이 검사받는 날에 방송국 카메라를 들이밀어? 지금 장난해-?!
스피커에서 노호성이 버럭 터져 나왔다. 황희종이 눈썹을 찡그리며 스피커 음량을 낮췄다.
아, 그렇군. 대통령이 이벤트에 관한 내용을 보고받은 모양이었다. 당일이 되어서야 항의 연락이 오다니. 보고가 늦어지도록 중간에 손을 써 둔 것이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속으로 그를 비웃으며 변명했다.
"그걸 이제 와서 컴플레인 걸면 어떡하나? 이미 연예인이랑 스케줄 다 잡혔는데. 여태까지 별말 없길래 나는 당연히그냥 실행해도 된다는 의미인 줄 알았지."
'행정상의 실수'로 보고가 '누락'된 것은 네 책임이지,내 책임이 아니라.
“그리고 유명인들 옆에 있으니 오히려 관심을 덜 받겠지. 나무는 숲에 숨기라는 말도 있지 않나?”
네가 S급을 요원 사이에 숨긴 것처럼 말이야.
“걱정 붙들어 매게. 내가 잘 처리할 테니.”
꺼어어어어어억~
간교한 세 치 혀 놀림에 박주관 대통령이 침묵했다. 반박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황희종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서 한 놈의 실수로 인한 불찰이었으니 책임은 자기 쪽에 있었다.
‘이 새끼….’
박주관이 생각했다. 이 눈치 빠른 새끼는 명단 중에 S급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정체를 알아내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이벤트를 저지했다간 오히려 그의 의심에 확신만 심어주는 꼴. 더 압박했다간 역효과가 날 수 있었다. 박주관은 화가 나더라도 물러서야 할 때 물러설 줄 아는 정치인이었다.
-이번 일 때문에 차후에 국정원의 계획에 지장이 생긴다면… 그때는 내가 오늘 일을 잊지 않겠네.
…그리고 지원금은 깎을 줄 알게.
뚜우- 뚜우- 뚜우-
"에라이, 속 좁은 새끼."
황희종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전화기를 비서에게 넘겼다. 하지만 말과 달리 입은 히죽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놈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상당히 기분이 나쁘겠지! 내가 이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황희종이 비서를 돌아봤다.
"조사한 거 리스트 뽑아놨지?"
"예. 여기 있습니다."
비서로부터 두툼한 서류뭉치를 건네받았다. 박주관이 국정원 요원이라면서 통보한 인물들의 과거를 뒷조사한 보고서였다. 그가 찬찬히 명단을 훑었다.
"이놈들 중에 S급이 있단 말이지…."
황희종의 눈이 교활하게 빛났다.
오늘의 이벤트는 일종의 덫이었다. 박주관이 그토록 꽁꽁 숨긴 S급의 정체를 까발릴 기회.
“영상 증거에 의하면 신 S급은 김재민 헌터처럼 신성력 각성자로 추정되는데, 누군지 알아낼 수 있을까요?”
신성력의 경우 마나와 달리 기운을 측정할 수 있는 검사기가 발명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 신성력 각성자는 스스로 밝히거나 다른 이의 기감에 감지되지 않는 한 각성 여부를 알아낼 수 없었다. 비서가 그런 상황을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 황희종은 거기까지 계산을 끝낸 뒤였다.
“그래도 상관없어! 제아무리 S급이라 한들 고등급 헌터 사이에서 정체를 숨기진 못하겠지.”
연예인 초청 이벤트가 묘수가 된 것은 두 가지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토끼는 방송국 카메라로 하여금 S급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을 생방송으로 포착해 박주관이 미처 대처하기도 전에 신 S급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로 끌어들이는 것이요,
두 번째 토끼는 고등급 각성자 경호원들을 건물 곳곳에 배치하는 것으로 S급이 누군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과연 철저하시군요…. 역시 본부장님이십니다. 헤헤.”
비서가 감탄하며 아부했다. 황희종도 오늘만큼은 속 보이는 아첨이 불쾌하지 않았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뛰어난 계획이었기에.
“박주관이 김재민을 손에 꽉 쥐고 있느라 이때까지 내가 얼마나 숙여야 했는데….“
마침내 관계 재정립을 시도할찬스가 온 것이다! 물론 정체를 까발린다고 신 S급이 곧바로 제 편이 되지는 않겠지만, 상대가 미등록 각성자였다는 점을 카드로 협박과 회유가 가능할 터.
그러니 이번 이벤트의 목적은 상대를 협상 자리에 앉히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자리부터는 순전히 정치의 영역이었으며, 황희종은 스스로가 꽤 솜씨 좋은 정치인이라고 자부했다.
회유에 실패하더라도 괜찮았다. 신 S급을 제 손에 넣지 못하더라도 정체를 까발리는 것만으로 반절의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자기편으로 포섭하는 것이 베스트겠지만, 적어도 박주관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개회사 대본이나 줘 보게. 남은 시간 동안 읽어봐야겠군….”
흡족하게 히죽거리며 황희종이 연설문을 읽어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