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49화 – 테스트 (3)
‘뭐야? 저 사람은 왜 꼬라보는 거지.’
대기실 창구 뒤쪽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양복쟁이를 신재혁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혼자 표정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종이에 죽죽 낙서하는 꼴을 보니 좀 마음이 아픈 사람 같았다. 머리 위의 원형 탈모 끼를 보니 측은한 마음이 심해졌다.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신재혁은 이내 상대에게서 신경 끄고 자신의 대기 번호를 표시한 창구 앞에 앉았다.
"반갑습니다, 신재혁 예비 각성자님! 협회에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재혁이 제출한 서류를 전산 처리 프로그램에 입력하며 창구 직원이 환영했다. 지금은 한산한편이지만, 곧 연예인을 따라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올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직원은 곧장 자기 할 일을 했다.
"음, 우선 각성 여부 항목에 ‘예’라고 체크하셨던데…."
"넵. 자진 신고하러 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각성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자진 신고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요즘은 잘 없지만, 간혹 각성 사실을 숨기시다가 마나 측정기에 꼼짝없이 걸려선 징집되시는 분들이 꽤 많거든요…."
'그걸 끝까지 버티다 징병당하는 멍청한 사람들이 진짜 있긴 있구나….'
섬뜩하고 끔찍한 이야기였다. 전시 상황에 예비군을 동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긴 했지만, 그래도 21세기 대한민국에 강제 징용이라니.
신재혁이 자신의 진짜 명의로 헌터 라이선스를 등록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대중에 마나의 개념이 보편화되고 신성력마저 존재가 드러난 지금, 라이선스도 없이 함부로 힘을 드러냈다가 미등록 각성자로 신고받는 건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 끔찍한 일은 무조건 피해야지….'
군사 징용 따위로 낭비할 시간은 없다. 신재혁이 다시금 결심을 다잡았다. 자신은 마스터 팔라딘이자 12 영웅 최후의 생존자로서 에덴의 존속을 확인하고 악마를 죽일 의무가 있었다.
그렇지만 홀로 지옥의 악마를 모두 죽일 수는 없다. 지옥 탄생 이래 영겁에 가까운 시간 동안 번식을 거듭한 악마가 얼마나 불어났을지는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따라서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이 끔찍한 재앙의 원흉을. 그러니까, 사천왕과 마왕을.
‘문명 레벨이 오르면 자연스럽게 사천왕과 마왕이 지구로 소환될 터…. 그전까지 힘을 키워서 결전을 대비해야 해.’
신재혁의 굳은 표정을 검사받는 사람특유의 긴장이라고 해석한 직원이 살풋 웃으며 말했다.
"기본적인 인적사항에 대한 전산 처리는 완료되었고, 이제 안쪽으로 들어가셔서 마나량을 측정하고 이후 스킬 검사랑 신체 능력 테스트를 받으시면 됩니다! 아픈 건 전혀 없으니 걱정 마세요! 금방 끝날 거예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신재혁은 직원이 가리킨 방으로 향했다.안쪽은 병원 CT실처럼 넓고 깔끔한 검사실이었다. 검사결과에 정확도를 요하기 위해 오차를 발생시킬 수 있는 물건을 죄다 치워버린 결과였다.
“오, 저건.”
신재혁이 방 중앙의 정교한 기계장치를 보고 감탄사를 흘렸다. TV에서 본 동그란 기계가 있었다. 그 유명한 마나 측정기였다. 각성자 등급을 나누는 시초가 된 장치.
'박정광 교수가 발명한 희대의 발명품….'
테스트를 돕기 위해 앞에 여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이 검사자의 인적사항을 불러오기 위해 태블릿 화면을 두드렸다.
"안녕하세요."
"성함이… 신재혁 님? 아, 홍하린 부장님께서 말씀하신 분이시군요."
"홍하린을 아세요? 혹시?"
갑자기 직원이 목소리를 낮췄다.
"네. 예상하시는 대로 국정원 소속입니다."
과연. 국정원에서 협회에 심어둔 일종의 스파이인 모양이었다.
'어떻게 테스트 기록을 위조해주나 했더니, 내부 협력자가 있었구나.'
여직원의 말이 추측을 긍정했다.
"검사를 받았다는 기록은 남겨야 하니 테스트기에 손 올리시고 받는 시늉만 해주세요. 마나량은 B급 각성자 평균 수치로 작성해두겠습니다."
위조 라이선스 취득 과정은 순조로워 보였다.
‘흠…. 그런데 이것도 나름 인생에 몇 번 없을 기회인데.’
문득신재혁은 호기심이 생겼다. 실물론 처음 보는 검사기에 대한 궁금증이기도 했고, 자신의 객관적인 수준에 대한 궁금증이기도 했다. 그 호기심을 담아 조심스레 물어봤다.
"혹시 실제로 검사받아봐도 될까요?"
거절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직원은 흔쾌히 허락했다.
"호호, 궁금하신 모양이네요. 물론 문제없죠. 그럼 전방의 손바닥 모양 스티커에 손을 올려주세요."
신재혁이 그녀의 지시에 따라 장치에 오른손을 가져다댔다.
"그럼 작동하겠습니다. 제가 됐다고 말씀드리기 전까지 손을 떼지 말아주세요."
검사기가 기묘한 구동음을 내며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오….'
오른손으로 미약한 마나가 흘러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신재혁은 저항하지 않고 몸을 탐사하는 파동을 받아들였다. 장치가 쏘아 낸 마나 펄스는 마나로드를 타고 몸 구석구석을 훑더니, 다시 손을 통해 검사기로 되돌아갔다.
"다 됐습니다. 손 떼셔도 좋습니다."
"아…."
콧구멍이 뻥 뚫리듯 마나로드를 청소해주는 듯한 청량한 감각이 끝나자 신재혁이 아쉬움에 탄성을 질렀다. 직원이 이해한다는 듯이 말을 건넸다.
"기분 좋으시죠? 처음 검사받는 부분들은 대부분 그런 반응이더라고요. 그 시원한 느낌이 좋아서 비싼 돈 들여 일부러 검사장치를 구입하는 각성자분들도 계신다더라구요. 아무튼 결과는 곧 나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약 삼십 초 후 컴퓨터가 계산이 완료되었다며 알림음을 울렸다. 직원은 태블릿으로 결과를 확인하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 정도면, 마나량만으로는 D급이시네요. 물론 헌터 등급은 마나량뿐 아니라 신체 능력이나 실적 등도 종합적으로 평가해 결정되니 너무 낙심하지는 마세요.”
직원이 태평하게 고지했다. 네가 D급이건 E급이건 상관 안 쓴다는 말투. 신재혁은 그 어투가 마음에 들었다.
‘국정원 요원이라더니 내가 S급인 걸 모르구나. 국정원 내부 보안은 믿을 만하네. 적어도 저쪽에서 내 정보가 새어나갈 가능성은 적겠어.’
국정원 내에서도 자기의 정보는 철저히 기밀로 관리되는 듯했다. 기껏해야 국장이나 홍하린 정도나 알고 있겠지. 일 처리가 만족스러웠다.
신재혁이 마음을 놓는 가운데, 상대가 S급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요원이 태블릿을 툭툭 두드렸다.
“원래 다음으론 스킬 테스트 룸으로 가야 하는데, 그건 저희가 손 쓸 수 있어서 바로 체력 검사만 받고 귀가하셔도 됩니다. 각성 스킬은 무엇으로 위조해놓을까요?”
“최대한 눈에 안 띄는 걸로…. 무난하게 재생계 스킬이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급속 재생으로 보고해두겠습니다. 그럼 이제 여기서 할 일은 전부 끝났고, 저쪽 체력 검사실로 가시면 다른 국정원 친구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신재혁은 가볍게 인사하고 다음 시험장으로 갔다.
***
체력테스트가 끝나고 신재혁은 녹초가 된 몸을 이끌어 정문으로 향했다. 아침의 소란은 잦아들어, 협회 앞의 광장은 다시 한산해졌다. 아마 연예인이 보이질 않자 자리를 떴거나 일부는 연예인들 따라 행사장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신재혁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었고, 신재혁은 연예인이니 이벤트니 하는 것보단 당장 자신의 다리가문제였다. 나름 헬창인 그조차도 체력 테스트가 끝나니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다.
“간단한 줄 알았더니, 가장 힘들 줄이야….”
역기만 최대치 무게로 들어 올리면 됐던 근력 테스트는 그리 힘들지 않았지만, 지구력 테스트 때문에 런닝머신을 몇 시간 동안 미친 듯이 달렸더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능력 없이 순수한 육체의 힘만으로 한계까지 달려야 했던지라 간만에 땀을 아주 쫙 뺐다….
신성력으로 다리를 회복시키며 자판기에서 이온 음료 하나를 뽑아 마셨다. 갈증을 지우는 서늘한 감각에 기분이 상당히 좋아졌다. 그렇게 캔을 기울이는데, 자기처럼 테스트를 받고 나온 두 남녀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커플인 듯했다. 팔짱 낀 채 걷다 말고 여자가 멈춰 섰다.
“오빠, 나가는 길에 저기….”
여자가 가리킨 곳에 웬 천막이 있었다. ‘우리 아이 교육은 매직펜!’ 아니면 ‘지금 카드 만들면 혜택이 와르르?!’ 따위의 싸구려 광고 문구가 어울릴법한 길거리 천막. 나이 어린 커플이 그런 노점에 관심을 가지기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오히려 신재혁의 흥미가 솟아올랐다. 신재혁이 그 위의 현수막을 읽었다.
“낙원교에 가입만 해도 매달 포션 하나가 공짜..?”
신재혁의 얼굴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놀라움이 번졌다. 낙원교라면 요새 유명한 사이비교 아닌가? 천막에 박힌 역십자가 문양을 바라보는 신재혁의 눈에 불쾌감이 어렸다.
'신도들 등쳐먹을 생각밖에 없는, 근본도 없는 이단놈들…. 저런 단체는 에덴에서도 정말 수없이 봐 왔지. 딱 봐도 개인정보 빼가려는 사긴데, 저런데 누가 가입한다는 거야?'
“아, 저거! 나도 인터넷에서 봤는데 진짜 매달 주는가 보더라? 그럼 당연히 가입해야지."
"응, 응! 완전 개꿀이지? 일요일마다 교회 출석 체크도 열심히하면몇 병 더 준대!"
신재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순간 잘못 들은 건지 제 귀를 의심했다. 실제로 커플이 가입 서류에 망설임 없이 슥슥 서명하자, 사실 커플과 낙원교가 짜고 치는 마케팅 수법이 아닌가 또 의심했다. 교원이 천막 뒤쪽 박스에서 꺼낸 소형 포션을 받고 사라지자 그제야 제가 본 것을 믿을 수 있었다.
‘진짜 가입만 했는데 포션을 펑펑 뿌린다고..? 낙원교가 그렇게 돈이 많나?’
예전에 웬 의뢰 하나에 20억을 걸 때부터 생각했는데, 낙원교는 유독 돈을 헤프게 쓰는 경향이 있었다. 깊은 상처도 순식간에 회복시키는 포션이란 아무리 쓰레기라도 최소 20만 원은 하는 값비싼 제품이다. 그런 비싼 약을 가입만 해도 매달 준다니. 도대체 재정 상황이 어떻게 되어 먹은 것일까.
‘…뭐, 갑부라도 낚았나 보지. 어차피 저런 사이비교, 금방 망할 텐데. 뉴스나 보다 보면 언젠가는 교주가 돈을 갖고 튀었니, 사기였니 하면서 구설수에 오를 게 틀림없고.’
신재혁은 이내 낙원교에 대한 관심을 껐다. 낙원교가 기승을 부리든 어쩌든 제 알 바가 아니었다. 자신은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이었고, 곧 망할 사이비교 하나 따위에 들일 시간은 없었다. 신재혁은 무심하게 빈 캔을 휙 던져 쓰레기통에 골인시키고는 집에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
“어떻게 됐지?”
청와대 집무실에서 박주관 대통령이 물었다. 답지 않게 초조한 목소리. 협회에서의 긴급 작전을 총괄한 홍하린이 보고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황희종도 신재혁을 찾아내지 못한 눈치였구요.”
“후… 잘했군. 정말 잘했어. 수고했네.”
한숨에 안도가 물씬 묻어나왔다. 쥐새끼 같은 황희종이 무슨 개수작을 벌일지 예상할 수 없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별 탈 없이 각성 테스트가 끝난 모양이었다. 여유로운 스탠스를 되찾은 박주관이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댔다.
“당분간 헛짓거리 못 하게 좀 괴롭혀야겠어…. 다른 특이사항 있나?”
“네. 보고에 따르면, 신재혁 헌터는 마나도 보유하고 있다더군요. 수치는 D급 수준. 역시 신성력과 마나를 모두 각성한 특이 케이스 같습니다. 아무래도 <혼원>이라는 위업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흠…. 그래서 동레벨대에 비해 그런 엄청난 위력의 공격이 가능했던 건가?”
박주관이 서울에서도 희미하게 보였던 인천 하늘의 빛기둥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박주관은 비각성자라 서로 다른 두종류의 기운을 다룬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지만, 아무튼 이능력이라면 하나보단 두 개가 좋아 보였다.
D급이란 낮은 수치도 실망감을 주지 않았다. D급인데 그정도라. 미래가 상당히 기대됐다.
“좋군. 더 보고할 건?”
홍하린은 오늘 협회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 대통령도 아는 편이 좋겠지 싶어서 입을 열었다.
“이번 검사 때 ‘공식적인’ 스물네 번째 A급이 탄생했습니다. B급이었던 차은경이란 경찰인데, 협회에서 준비한 이벤트로 방송국 카메라가 잔뜩 모인 상황에서 승급에 성공해 단숨에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면서 첫 게이트 사태 때 민간인들을 구조하러 열심히 뛰어다닌 전적과 그녀가 소속된 특능반의 성과도 재조명받고 있는데, 워낙 실적이 뛰어나 국민들에게 칭찬이 자자합니다.”
“특수 능력 처리반! 내 정책 중 하나 아니었던가?”
뜻밖의 이름에 몹시 놀란 박주관이 간만에 포커페이스를 깨고 놀라움을 드러냈다. 특수 능력 처리반은 무작정 군대에 힘을 몰빵해 주기 눈치 보여서 경찰에 형식상으로 만든 부서였다. 그런데 그곳 소속의 경찰이 이렇게 귀한 인재가 되어 돌아오다니. 돌멩이가 옥석으로 돌아온 셈.
‘기대도 하지 않았던 정책이 월척으로 돌아오다니! 요즘 불안한 낌새가 보이는 지지율을 굳건히 하는 데 도움이 되겠구나.’
박주관이 흡족하게 껄껄 웃었다. 정적의 허탕에, 로또의 당첨이라! 연이은 희소식에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가 이유 있는 호의를 베풀 정도로.
“성장 가능성은 충분한가?”
“아직 20대 후반이라 S급으로 성장할 법한 재목으로 주목됩니다. 공무원이다 보니 황희종 본부장도 터치할 수가 없고요.”
“좋아, 좋아. 아주 마음에 들었어. 차은경이라고? 앞으로 그 여자 팍팍 밀어주게. 승진이든, 지원금이든, 장비든, 특혜든. 그냥 그녀 전용 부서를 따로 만드는 것도 좋겠군. 방송으로도 간간이 홍보해주고. 한번 S급으로 키워보자고….”
“씨팔놈아-!”
한편 모든 일정이 끝난 협회, 본부장의 집무실에선 험악한 고성이 날아들고 있었다. 청와대의 화기애애한분위기와는 정반대였다.
“이 무능한 새끼야! 애미 애비도 없이 자라서 교육도 못 받았냐? A급 헌터까지 붙여줬는데, 그 간단한 일 하나를 실패해-? 너 씨발놈, 박주관이 붙인 스파이냐? 간첩이야?”
황희종이 빨간 줄로 떡칠이 된 명단을 구겨 황희종이 비서 오병태에게 집어던졌다. 그의 얼굴은 명단만큼이나 새빨갰다. 살벌하게 날아간 종이뭉치가 꼴도 보기 싫은 면상을 정확히 맞췄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황희종이 집무실 내의 물건을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 집어 던졌다.
“으아아아아!!! 이, 이게 얼마나 금쪽같은 기회였는데! 두 번 다시 없을 역전 기회를-!!”
“죄,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비서 오병태가 상사의 화산 같은 분노를 피하고자 엎드려 벌벌 떨며 빌었다. 손바닥을 싹싹 빌면서 상사를 욕했다.
‘시발. 나는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오병태는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함을 금치 못했다. 명단 속의 인물들을 A급 헌터가 한 명도 빠짐없이 일일이 확인했는데. 그래도 S급을 찾지 못했단 말은 A급이 일을 잘못했던가, 애초부터 명단이 잘못됐단 말 아닌가? 어디에도 자신의 책임소재는 없었다.
오병태가 억울함을 곱씹는 사이 황희종의 분노는 잠시 사그라들었다. 황희종이 생각하기에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한층 냉정해진 머리가 전후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아무리 못났다 해도 내 비서 자리까지 온 이 새끼가 그 정도로 빡대가리는 아닌데…. 뭐가 잘못된 거지? 박주관이 손을 써서 감사자를 바꿔치기라도 했나? 그럴 리가…. 당일 아침에 보고받아 대응할 시간도 없었을 텐데.’
황희종이 구겨진 종이를 집어 들고 신경질적으로 휙휙 넘겼다. 뒷조사한 내용에서 다시 한번 수상한 점을 찾기 위해서였다. 궁지에 몰린 뇌가 팽팽 돌아갔다.
‘이 중 한 명이 S급임은 틀림없는데…. 나머지는 박주관 말대로 국정원 요원일 테고. …잠깐. 국정원 요원들 사이에 숨어있는 민간인 하나라?’
나무는 숲에 숨기는 법이다. 하지만 그 숲이 조화로 만든 숲이라면? 도리어 지나치게 자연스러운 조화 사이에 숨은 생나무가 더 눈에 띄는 법….
‘그래. 과거가 지나치게 깔끔한 놈들 사이에 분명 어색한 놈이 있을 거다.’
그놈이 S급이다.
바쁘게 보고서를 넘기던 황희종의 손이 멈칫했다. 멈춰선 페이지가 한 청년의 정보를 표시했다.
‘고아, 거주지는 관악구, 자기 명의 주택에 세금도 꼬박꼬박 내고….’
고아가, 서울에, 자기 주택을?
“-이놈이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정치판에서 단련된 야생동물처럼 날카로운 직감이 이놈이라고, 이놈이 S급이라고 마구 아우성쳤다. 입가에 희열에 찬 미소를 띠며 황희종이 페이지를 거칠게 찢었다. 그리곤 찢은 페이지를 아직도 바닥에 엎드려 있는 비서에게 툭 던졌다.
“네가 그렇게 바라던 마지막 기회다. 이 녀석 주변인들, 샅샅이 조사해와. …그래, 우선 고아원 쪽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군. 박주관 새끼한테 들키지 않게 흥신소에 하청 넣지 말고 네가 직접 발로 뛰어서 알아 와!”
최후의 동아줄 붙잡는 심정으로 오병태가 황희종이 던진 종이를 공손히 받았다. 꾸깃꾸깃한 종이 위쪽에 이름 석 자가 적혀있었다.
‘신재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