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51화 - 출장
인천 참사 이후 인류는 새로운 힘을 손에 넣었다. 시스템은 그 황금빛 기운을 신성력이라 불렀다.
수많은 장병과 헌터의 피와 맞바꾼 능력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신성력은 몬스터를 아이스크림처럼 녹이고 아군을 치유했다. 마나를 이용한 스킬만큼 다양한 스킬이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치유와 몬스터 사냥이라는면에선 탁월했다. 마나 각성자라면 누구나 신체 강화를 할 수 있듯이 신성력 각성자도 모두 신체 강화가 가능했고, 심지어 신성력을 운용하는 것만으로 자가 치유도 가능했다.
정부와 협회는 변화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신성력 각성자 하나가 끼는 것만으로도 고등급 게이트 공략에 사망률을 대폭 낮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기운은 몬스터에게만 특효약처럼 작용했기에 기존의마나 유저와 달리 범죄 사건도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반면 저등급 게이트 공략 때는 신성력 각성자가 환영받지 못했는데, 신성력이 몬스터를 녹여 사체를 팔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대부분 정부 소속 구조대나 고등급 게이트 공략조에서 활약했다.
신성력의 등장은 헌터계뿐 아니라 종교계에도 커다란 사건이었다.
무려 시스템이 증언한 명칭이다. 한국어로 신성력, 영어로 Divine Power. 이름만으로도 신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상에서나 존재하던 악마가 튀어나오는 마당에 신이라고 못 믿을 것도 없었다.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현대는 목숨이 촛불과 같은 세상이었고, 당장 오늘 밤에 저승사자가 방문을 노크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후를 보장받고 싶었다. 대부분의 종교는 믿음으로써 신자가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 주장했고, 신이 존재한다면 당연히 천국도 존재할 것이다…. 절박한 곳까지 내몰린 사람들은 그리 믿었다.
한 연구 결과가 풍조를 심화시켰다. 무신론자보다 종교인에서 신성력 각성자 수가 더 많다는 통계 자료였다. 많은 학자들이 이 결과를 의심하며 다른 여러 종교에까지 연구 범위를 확대해봤으나 놀랍게도 모두 동일한 결론을 도출했다.
종교를 믿으면 신성력 각성률이 높아진다.
사람들은 인과관계를 이해할 수 없는 이 연구 결과를 반신반의하면서도 교회나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 고작 그런 일로 각성할 수 있을지는 영 미심쩍었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일주일에 한 시간 투자하는 것으로 각성 확률을 높일 수 있다면야….
세계적으로 종교 열풍이 불었다. 비록 종교활동을 하는 모두가 독실한 신자는 아닐지언정, 대부분의 사람이 형식상으로라도 나 기독교인이요, 나 불교인이요-하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종교의 영향력이 상승했다.
그렇게 종교계는 중세 이래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교황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옛 신성 로마 제국 시절처럼 종교 단체의 힘이 몹시 커졌다. 무려 헌터 협회를 압박할 수 있을 정도로. 종교계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협회는 A급 이상의 신성력 각성자에게는 성인의 칭호를 내리겠다고 공표했다.
물론 허울뿐인 칭호였지만,그것만으로도 홍보 효과는 대단했다. 교파별로 신성력이 가장 많은 각성자를 최고 성인으로 치켜세우며 대중에게 자기네 종교를 홍보했다. 실제로 효과는 강력했다. 누가 봐도 사기인 사이비 종교에 우연히 성인이라도 나오면 순식간에 몇백, 몇천 명씩 인파가 몰리고는 했다. 그만큼 죽음의 공포와 각성의 열망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성인은 유일신을 신앙하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 유독 많이 탄생했는데,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
집으로 돌아온 신재혁은 본격적으로 낙원교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우선 가볍게 위키부터 켰다. 정확도는 신뢰할 수 없을지언정 차곡차곡 정리된 자극적인 정보는 흥미와 의욕을 일으키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낙원교의 로고인 역십자가 문양이 그를 반겼다.
“아브라함 계통에 포함되며 유일신 ‘엘로힘’을 숭배하는 낙원교는 약 10년 전부터 성행했고, 게이트가 열린 이후 몸집이 급격히 커졌다-라…. 하기야 세상이 혼란할 때 사이비가 성행하는 법이지.”
발생지도 교주도 알 수 없는 이 정체불명의 종교는 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게이트라는 재앙을 기회로 삼아 신도를 모으고 몸집을 부풀린 모양이었다.
약점 수집을 의뢰받은 신재혁으로서는 호재였다. 상대의 몸집이 클수록 파헤칠 곳이 많으니, 의뢰 성공 확률도 높아진다. 사기죄, 조세포탈죄, 뇌물수수죄… 워낙 선택지가 많다 보니 어느 쪽부터 조사할지 선택 장애가 올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미스터 B가 포션 산업 쪽을 파보라 충고했던가.”
신재혁은 기억을 더듬어봤다. 작년 어린이날, 자기가 헌터 라이센스를 만들러 헌터 협회에 방문했을 때 목격한 사건에 관한 기억이었다. 주저 없이 가입 서류에 서명하고 포션을 받아가던 커플.
‘틀림없이 낙원교의 포션 자선 사업을 말하는 거겠지.’
요새 유명한 이벤트였다. 가입만 해도 매달 포션을 하나씩 받을 수 있고, 열심히 종교 행사에 참여하면 그 이상도 받아갈 수 있었다. 고구려 공략조 아재들도 활동은 안 했지만 다들 가입은 해놔서 매달 포션을 지급받았다. 이 사업 덕분에 국내외 낙원교 신자 수가 껑충 뛰었더랬다.
“그러고 보니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포션을 구매하는 자금도 자금이지만. 어떻게 그렇게 많은 포션을 공급받는 것일까?
악마 피를 가공해 포션을 만드는 작업은 섬세한 공정을 필요로 한다. 독성을 제거하고, 지구에서는 ‘탁한 마나’로 통하는 마기를 없애고, 순수히 재생력을 극대화하는 인자만을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즉, 길드 하나가 한 달에 몇천, 몇만 병씩 뽑아내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포션 분야는 독점 시장이 형성되지 못하고 포션 생산 길드가 우후죽순 생겨날 수 있었다.
“…혼자 고민해봤자 알 수 있는 사실은 없지.”
신재혁이 손가락을 풀었다. 이제부턴 초법적인 조사를 할 차례다. 신재혁은 즉시 낙원교 한국 지부의 홈페이지를 해킹했다. 포션의 출처와 유통 경로를 알아낼 생각이었다.
과연 서버에 보관한 파일이 아주 많았다. 통관 내역을 정리한 명세서들. 그중 하나를 열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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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신고필증]
신고 번호 : 10031
품명 : 포션
수량 : 10,000정
수령인 : 전익광 신부.
발송지 : 미국, 뉴욕, 브루클린 … 코스코프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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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코프사로부터?”
코스코프사. 다른 회사들에 비해 유독 생산량이 많아 포션 사업의 선두를 달리는 기업형 길드였다. 길가는 헌터를 붙잡고 ‘혹시 코스코프사라고 아세요?’하면 ‘아, 포션 왕창 파는 길드 말이죠?’하고 대답할 정도로 나름의 인지도 있는 길드.
‘시중에 판매되는 것 외에도 그렇게 많은 양을 낙원교에 공급하고 있었단 말이야?’
파일을 뒤지며 포션 공급량을 확인하는 신재혁이 경악했다. 공급량이 지나치게 많았다. 심지어 이건 한국으로만 발송된 양. 다른 수십 개국에 공급된 양까지 생각하면… 다른 길드 몇 개를 합쳐도 코스코프사 하나가 생산하는 수량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거지?”
일개 기업에서 생산했다고는 물리적으로 믿을 수 없는 수량이었다. 상당히 수상쩍은 낌새를 느낀 신재혁이 답을 구하기 위해 곧장 코스코프 사의 서버를 해킹하려 시도했다.
그래. ‘시도’했다.
“어-?”
놀랍게도 시도는 불발로 돌아갔다. 신재혁의 실력으로 해킹에 실패한다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 각성 후로 실력이 더욱 날카로워진 지금이라면 특히나.
“뭐야? 폐쇄 회로?”
실패 원인을 분석하던 신재혁이 놀라움을 표했다. 코스코프사의 보안 체계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외부에서는 물리적으로 침입이 불가능한 구조. 바티칸 최심부나 펜타곤 정도 되는 중요 기밀 시설에서나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고작 산업 스파이 때문인 것 같지는 않은데….’
일개 회사의 보안치고 너무 삼엄했다. 회사 외부와 내부의 네트워크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라 직원들조차 인터넷을 이용할 수 없어 불편할 텐데. 그 정도 불이익까지 감수하면서 도대체 어떤 비밀을 감추려는 것일까.
구린내가 났다. 짙은 음모의 냄새가.
“보안을 뚫으려면 직접 뉴욕의 본사로 가야 한단 말인가.”
굳이 의뢰 하나 처리하느라 미국까지 가야 할까? 편한 길이 있었다. 코스코프사에 관한 내용 없이 다른 나라의 낙원교 지부 홈페이지를 털어보면 미스터 B가 바라는 약점은 간단하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자릿수의 마인을 찾아 죽인 이단심문관의 직감이 아우성쳤다. 물밑에 수상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노라고. 그리고 신재혁은 함부로 이 직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저번처럼 사천왕의 소환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인천에서 벨리알에게 한 번 크게 데였던 신재혁이다. 홀로 군대를 상대하고 인천을 멸망시킬 뻔한 괴물. 그런데 그조차 전력이 아니라 하였다. 약화되지 않은 사천왕이 얼마나 강력할지는 신재혁 자신조차 예상할 수 없었다….
망설임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것은 성기사의 미덕이 아니었으니.
“하, 시발. 나 영어 못하는데.”
신재혁이 미스터 B에게 보낼 메일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
[현재까지 낙원교 조사한 내용 첨부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코스코프사에 수상한 점을포착해서 직접 본사로 잠입하고 싶은데
개인적인 사유로 국정원에 경거망동하는 걸 걸리기 꺼림칙한지라 위조 신분으로 비행기표 좀 잡아주세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무기도 가져가고 싶은데, 위의 이유로 해외 장비 반입 신청서를 제출할 수 없는 상황이라 이 건도 처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메일을 닫은 창백한 손이 피처럼 붉은 와인잔을 기울였다. 뱀 같은 혀가 입술을 핥았다. 깊고 복합적인 맛이 뇌의 쾌락 신경에 폭죽을 터뜨렸다.
“역시 35년산! 해가 다르게 풍미가 깊어지는구나. 양조 되었을 때 잔뜩 구매해서 묵혀두길 잘했어.”
미스터 B는 와인을 음미하며 오랜만의 휴식을 즐겼다. 요새 그는 이 짧은 휴식이 생명수처럼 느껴질 정도로 바빴다. 정말 많이 바빴다.
시류를 탄 군수 사업 확장하랴, 낙원교 동향 파악하랴, 한국의 독재자를 후원하랴, 몸집이 불어난 적룡파 관리하랴, 신재혁이청소해달라고 부른 연구소에서 얻은 연구 자료를 해석하랴 정말이지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다행히 신재혁이 낙원교 조사 의뢰를 받았고, 적룡파 장악 작업도 대부분 끝냈으니 앞으로는 비교적 여유로워질 것이다. 그 후로는 벨리알의 지식을 해석하는데 몰두할 수 있겠지. 마인 개조 기술을 완성하면 적룡파를 자신의 충성스러운 군대로 만들 수 있을 테고.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아.”
최후의 전쟁을대비하는 계획이 순조로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그를 못내 흡족하게 했다. 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와인을 홀짝였다. 병을 비우는 동안 찬찬히 계획을 재점검해볼 생각이었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 ♪♪~
천금 같은 간만의 휴식을 방해받은 그의 미간이 살포시 찌푸려졌다. 전화 올 일이 없는데…. 아니, 생각해보니 딱 한 명 있었다.
“설마 또 곽태우 놈 독촉 전화인가?”
상대를 예상하니 기분이 더 언짢아졌다. 약 1년 전에 받은 곽태우의 의뢰를 떠올렸다. 신재혁의 위치를 알고 싶다는 의뢰. 신재혁과 충돌을 방지하려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고 있는데 자꾸 귀찮게 구니 그놈 이름만 들어도 혈압이 올랐다.
“참아야지…. 기껏 모은 패인데, 자기들끼리 싸우다 자멸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신재혁과 곽태우는 와일드카드였다. 운명의 소용돌이를 뒤틀 수 있는 변수. 자신과 현자의 계획을 위해서라도 두 명은 최후의 날까지 살아남아야 했다….
미스터 B는 한숨을 한번 푹 내쉬고 전화를 받았다. 불행히도 상대는 미스터 B가 예상한 대로였다.
“오늘은 왜 전화했지? 곽태우.”
평소 같았으면 ‘아직도 못 찾았냐’, ‘도대체 언제 찾아내는 거냐’ 따위의 짜증이 서린 목소리가 돌아왔을 텐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불행히도 미스터 B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신재혁! 그놈의 흔적을 발견했다. 5월 5일, 헌터 협회에 방문했더군! 이 정도 단서라면 CCTV를 통해 녀석이 어디로갔는지 추적할 수 있겠지?”
젠장. 신재혁이 우연히 곽태우의 눈에 띈 모양이었다. 미스터 B로서는 희소식이 아니었다. 이때까진 어떻게든 변명하며 버틸 수 있었는데, 이렇게 확실한 정황을 포착해버리면 더이상 오리발을 내밀기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대답을 회피하며 배 째라고 할 수도 없었다. 지금 곽태우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이후의 계획에서 협조를 받을 수 없을 터. 지금 그와 완전히 갈라져서는 안 된다.
가르쳐줘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손해가 발생했다. 외통수에 골치가 아팠다. 악마적 두뇌가 재빨리 수를 계산했다. 어느 쪽이 더 손해인지는 금세 도출해낼 수 있었다.
“알겠어, 알겠다고. 한번 조사해 보지. 며칠 안에 다시 연락하겠어.”
미스터 B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신재혁의 위치를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의뢰를 무시하면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버릴 공산이 높았기 때문이다. 조커 하나 잃는 것을 감수하기엔 대계의 성패를 자신할 수 없었다.
‘이제 곽태우와 신재혁이 충돌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군.’
그래도 최대한 둘의 접촉을 늦춰야 했다. 자신이 대처방안을 강구할 때까지.
미스터 B가 조금 전에 읽은 메일을 떠올렸다. 신재혁은 뉴욕에 가겠다 했었다. 설상가상의 소식이었다. 뉴욕엔 눈이 매우 좋은 S급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이 싸우기라도 한다면 몇 분 안에 S급에게 발각되리라. 그리고 그 S급은 제 도시에서 소란 피우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작자였다. 언제나 소란을 잠재우려 직접 출동할 만큼. 부하들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계획에도 없는 출장을 가게 생겼군….”
이제 좀 여유로워지나 했더니 성가신 일이 생겼다. 그가 남아있는 와인을 입안에 병째로 들이부었다. 숙성된 알코올이 두뇌를 활성화했다.
“일단 최악의 사태를 피하려면 현자에게 귀띔해 놓아야겠어.”
이 건은 조언이 필요해 보였다. 현자와 상의해 계획을 조금 앞당겨야 할지도 모른다.
목적지를 정한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것을 신호로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능력이 발동했다. 아득히 먼 옛날 신에게 하사받은 권능….
허공에서 피어난 검은 구체가 그의 몸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