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56화 - 뉴욕
뉴욕엔 한때 미국 최악의 악몽인 데스웜이 서식했다. 몸통 직경만 수십 미터에 달했고, 길이에 이르러선 킬로미터 단위로 계산해야 했던 초거대 지렁이.
지옥 사막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였던 데스웜에게 특별한 공격능력은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몸집과 수만 톤의 질량은 그 자체로 무기나 다름없었고, 몸을 꿈틀거리는 것만으로도 작디작은 인간을 죽이기엔 충분했다.
본래 필라델피아에서 소환된 이 S급 보스는 단지 지하에 굴을 파고 움직이는 것만으로 소환지를 초토화시켜 며칠 만에 미국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다. 지상에서 느껴지는 땅 울림이 사라지자 데스웜은 본능이 이끄는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그러니까, 부근에서 땅 울림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지역. 뉴욕으로.
미국 인구수 최대의 주가 필라델피아와 같은 결말에 처하는 것을 피하고자 군대와 헌터들이 이동 경로를 막아섰다. 그러나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재해를 동반하는 보스를 멈출 방법은 없었다. 그 재앙이 땅속으로 움직인다면 더더욱. 지반을 무너뜨리고, 헬기에서 마법계열 헌터들이 공격을 퍼붓고, 강물을 관개해 땅굴을 수몰시켜도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전진하는 보스를 세우지는 못했다.
지진이 심해질수록 시민들은 불안에 떨며 하나둘 도시를 떠나기 시작했다. 치안이 악화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대낮에 강도며 살인이 빈번히 일어났다. 뉴욕은 점점 죽어갔다.
그리고 미 정부와 시민들이 포기한 땅에 기어코 지옥에서 올라온 지룡이 당도했다. 아무도 데스웜을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죽일 방법도 없었거니와, 시도할 용기도 없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전의를 상실시키는 몸집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가 그 땅을 포기한 순간, 고향을 포기하지 못한 한 명의 헌터가 그곳에 있었다. 헨리 클라크라는 강체술사. 그는 죽음보다 뉴욕을 잃는다는 가능성이 두려웠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그는 행동에 나섰다.
도시를 지킨다는 일념으로 헨리 클라크라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기회를 기다렸다. 데스웜이 숨을 쉬고자 지상으로 올라올 타이밍, 놈을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
오랜 기다림 끝에 사냥감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룡의 거체가 공기 중으로 노출되며 무방비한 등을 내비쳤다. 헨리 클라크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때 세계 최고층이었던 마천루 꼭대기에서 사냥꾼이 낙하했다. 오로지 데스웜만을 죽이기 위해 만든, 수십 미터짜리의 특제 대검을 들고.
사백사십 미터의 가속력과 초인의 근력은킬로미터 단위의 몸통을 절반으로 갈라놓기에 충분했다.
다음 날, 전세계 모든 신문사 첫 면에 동일한 사진이 걸렸다. 마천루Skyscraper에서 하늘을 찢으며Sky Scrape 낙하하는 영웅. 서양에선 그 영웅을 하늘을 찢는 자Skyscraper라 불렀고, 동양에선 하늘에서 떨어지는 죽음이라 하여 천마天魔라 불렀다.낙하 중 바람에서 시야를 확보하기 쓴 야차 모양 탈이 그 별명과도 퍽 어울렸다.
과거 막노동자에 불과했던 헨리 클라크는 일약 미국의 영웅이자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다른 S급에 비하면 초라한 능력을 지닌 그가 S급으로 선정된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했다.
한순간에 인류 최강의 반열에 들어섰지만, 그는 여전히 몬스터를 죽이고 뉴욕을 재건하는 일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게이트에 들어가는 시간 외에 모든 시간을 뉴욕시를 지키는 자경단 활동에 전념했다.
자경단 활동이란, 종일 빌딩 옥상에서 대기하다 강체술사의 초월적인 시력이 비정상적인 사건을 발견하는 즉시 지상으로 떨어져 문제의 원흉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범죄자든, 몬스터든.
당연히 불법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뉴욕 시민들에게는 그런 사소한 일보다는 자기네의 목숨이 더 중요했고, 미국의 영웅을 고작 재물손괴죄나 기물파손죄 따위로 입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특혜에 가까운 법안이 압도적인 지지 하에 통과되었다.
이제 뉴욕시는 그의 자경단 활동을 만류하기는커녕, 어떤 옥상이라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준다. 그렇게 뉴욕의 하늘은 스카이스크래퍼의 영공이 되었다….
***
헨리 클라크는 오늘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옥상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S급에 이른 초인의 신체는 신진대사가 지나치게 활발한바, 24시간 내내 깨어있어도 육체적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필수적인 칼로리 수급과 불가피한 생리현상을 제외하고는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도시의 평화를 감시하며 보낸다. 성당 처마의 가고일 상처럼.
도시 절반을 망라하는 광활한 시야에 평화로운 일상이 들어왔다. 센트럴 파크에 아이와 산책 나온 부모, 하교하는 학생들, 바쁘게 뛰어다니는 월가의 금융인들. 행복한 일상을 구가하는 시민들이 보였다. 게이트 전과 다름없는 풍경. 사별한 아내와 그렇게도 누리고 싶었던 평범한 하루가 펼쳐져 있었다.
“라나….”
헨리 클라크가 무의식적으로 지금은 없는 아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입천장을 두 번 가볍게 두드리는 감각이 생각을 자극했다. 게이트가 열린 첫날에 세상을 떠난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신비로운 새파란 눈동자, 양털처럼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과 불변의 사랑을 약속하는, 영원토록 잊지 못할 목소리도.
그의손이 무심코 야차탈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할로윈에 라나가 선물한 불교 괴물 모양 가면. 괴물답게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는 탈이었다. 탈은 적의 사기를 꺾기 위한 일종의 워 페인트이며, 마천루에서 낙하 중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바람막이였다.
바람을 막기 위함이라면 스포츠 안경이나선글라스로도 괜찮았을 텐데 굳이 실전성 없는 가면을 고집하는 이유는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 잃은 날의 비탄과 눈이 뒤집히는 분노도 잊지 않기 위해서.
본래 표정 변화가 적은 헨리 클라크의 안면은 언제나 무뚝뚝했지만, 야차의 일그러진 얼굴이 평소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격노의 상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헨리 클라크가 가면을 뒤집었다. 야차탈 안쪽 면, 이름이 있었다. 잊어버리지 말라고 삐뚤삐뚤한 글씨로 쓴 ‘헨리 클라크’.
“이건 그때….”
그 기억이 기폭제가 되었다. 슬픔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파도에서 영웅이라 불리는 사내가 허우적거렸다. 회한의 해일에 휩쓸려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헨리 클라크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녀가 사랑한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정말로, 무엇이든지.
맹세와 함께 격렬한 감정은 잦아들었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압축되었을 뿐이다. 언젠가 도시의 평화를 무너뜨리는 적을 마주쳤을 때 한 번에 쏟아내기 위해서….
감정을억누르고 도시를 관찰하던 헨리의 시야가 한쪽에 닿았다. 브루클린 방향, 건물 사이로도 또렷이 보이는 흉측한 검은 구체로.
몇 시간 전에 클리어 소식이 들려온 S급 게이트였다. 자신에게는 하늘 나는 적을 처리할 수단이 없었기에 김재민에게 처리를 맡긴 게이트. 클리어했다는데 게이트는 몇 시간 째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연구와 지하자원 채굴을 위해 남겨 둔다던가.”
정부 요원의 귀띔이 생각났다. 식사 문제나 각종 잡일을 처리해주는 비서 같은 녀석이었다.
게이트를 저대로 두어도 안전할까?
헨리 클라크는 한때 뉴욕을 버린 미 정부를 그리 믿지 않았지만, 김재민의 일솜씨는 신뢰할 수 있었다. 그는 S급 중에서도 강자에 속하는 이다. 그가 클리어했다고 확신하면 저기서 갑자기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일 따위는 없겠지.
그는 이내 게이트에서 신경을 껐다. 대신 그 게이트를 클리어한 장본인을 생각했다. 내일 환영 행사에서 만남이 예정된 한국의 S급 헌터.
김재민은 비밀스러운 구석이 많은 사내였다. 숨겨진 십 년의 과거, 각성에도 불구하고 치유되지 않는 청각 장애….
‘게다가 그 능력.’
막 뉴욕에 도착한 김재민을 감시할 적이었다. 헨리 클라크는 호위조차 거느리지 않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혼자 시내를 돌아다니는 김재민이 무슨 수상쩍은 일이라도 꾸미나 싶어 그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다 놀라운 일을 목격했다. 김재민의 입술이 달싹거리나 싶더니, 한순간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놀랍게도 그는 수백 미터 떨어진 공중화장실에서 나왔다. 이동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순간이동..! 그의 각성 능력은 신성력인 줄로만 알았는데.’
거기에도 석연찮은 점이 있었다.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문명 레벨이 오름으로써 시스템이 명시한 보상은 신성력 ‘해금’이었다. 그러나 김재민은 그전부터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시스템이 해금하기 전부터 신성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건가?”
약한 놈들은 방해만 된다는 이유로 김재민은 언제나 게이트에 혼자 들어가기를 고집했다. 하지만 이제 헨리 클라크에게는 그것이 비밀스러운 능력을 숨기려는 의도로 해석됐다.
헨리 클라크는 S급 회의에서 본 김재민의 태도를 떠올렸다. 어떤 긴급 상황에서조차 김재민은 늘 여유로워 보였다. 어떤 문제가 닥쳐도 해결할 수 있으리란 절대적인 자신감을 지닌 것처럼. 이젠 그 이유가 짐작이 갔다. 그것은 힘에 대한 확신의 발로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능력만으로도 S급. 그렇다면 순간이동 능력까지 합치면? 그리고 어쩌면 더 숨기고 있을 힘까지도 고려하면?"
김재민은 얼마나 더 강력할 것인가. 헨리 클라크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새삼 그가 두렵다거나 질투난다던가 하지는 않았다. 그런 강자가 뉴욕의 게이트를 처리해줬다는 사실이 못내 든든할 뿐이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의문과 밝힐 수 없는 비밀이 많았으나 헨리 클라크는 더 괘념치 않았다. 내일 환영 행사에서 김재민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면 무엇이든지 해결될 것이다….
검은 구체를 응시하며 마천루의 지배자가 중얼거렸다.
“내일의 만남이 기대되는구나.”
***
국제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신재혁이 주머니 속의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비행기에서의 사건은 떠돌이 악마가 우연히 지나가던 비행기를 습격한 것으로 마무리된 듯했다. 공적은 모두 빌헬름 션에게로 돌아갔고. 그의 스킬인 번개 화살과 뇌창의 생김새가 흡사해 자신의 활약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안도하며 신재혁은 차창 밖을 바라봤다.
“여기가 뉴욕..!”
영화에서나 본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지천에 깔린 금발 머리. 반평생 방구석에 박혀 살던 신재혁에겐 생소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생소한 것은 시민들의 표정이었다. 게이트로 전 세계가패닉에 빠진 상태인데도 뉴욕 시민들의 얼굴엔 근심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신재혁은 기묘한 현상의 원인을 읽을 수 있었다. 저 표정, 자신이 안전하다는 확고한 믿음 아래에 깔린 것은… 그래, 여유였다. 인류 최강의 전력이 자기네를 지켜주고 있다는 걸 아는 자의 여유.
'그러고 보니 뉴욕엔 S급 헌터가 산다지?'
신재혁이 알기로 육체 강화 각성자인 스카이스크래퍼가 뉴욕에 살고 있었다. 미국의 악몽인 데스웜을 죽였다는 헌터.
‘데스웜, 뉴스 화면으로 봤을 땐 정말 어마어마하게 컸지. 바알제불도 한 수 접어줄 정도….’
무수한 악마를 상대해본 신재혁도 처음 보는 크기였다. 그 정도로 큰 악마는 전생에도 사천왕인 바알제불 정도밖에 몰랐다. 하지만 그 거대한 파리 악마조차도 데스웜 옆에 세워놓으면 초라해 보일 것이다.
도심 곳곳에서 몸집의 크기만큼이나 격렬한 파괴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이 택시가 호텔을 향해 곧장 가지 않고 빙 돌아가는 이유도 중심 대로가 데스웜에의해 파괴되어서 그렇다. 거대한 사체를 치우느라 몇 달간 군부대가 동원되었다는데, 지금은 사체는 다 치웠고 망가진 도로를 보수하는 모양이었다.
“Thank you, sir. Have a nice day!”
그렇게 신재혁이 이국의 경관을 감상하는 사이 택시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센트럴 파크 사이에 있는 호텔이었다. 미스터 B가 잡아준 호텔. 체크인 후 방에 도착한 신재혁은 객실 중앙에 놓인 커다란 상자를 발견했다.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짐이 무사히 도착했구나.”
곧바로 짐을 풀어보았다. 파손 방지용 랩을 벗기자 안에서 개인 소지품이 나타났다. 갈아입을 옷, 해킹 도구,그리고 자신의 장비.
“갑옷에, 창, 메이스, 그리고 파마의 단검까지. 좋아. 모두 무사하군.”
창대를 만지니 익숙한 감촉에 안심이 되었다. 이걸 모두 들고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지는 못하겠지만 가까운 곳에 무기가 있다는 사실이 안전을 보장하는 느낌이었다. 일단 들고 다닐 수 있는 단검만 품속에 넣으며 짧게 의지를 다졌다.
‘이번엔 결코, 인천과 같은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 …물론 사천왕과 전혀 관련 없는 별개의 사건일 수도 있지만.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 내 불길한 예감이 부디 착각이길….’
허가받지 않은 무기를 청소직원에게 들키지 않도록 짐을 상자 안쪽에 모두 숨겨두고 상자에서 노트북만 꺼냈다. 신재혁이 기지개를 피며 손가락을 풀었다.
“좋아. 그럼 이제 본 목적을 처리해볼까.”
코스코프사 잠입일은 오늘 자정,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 그전까지 계획을 재점검해볼 생각이었다.
신재혁이 노트북을 켰다. 메일에 미스터 B가 보내준 자료들이 있었다. 코스코프사 본사 건물 도면, 작업장 부지 시설, 경비 교대표, 순찰 계획서 등. 하나하나 찬찬히 읽어가며 신재혁이 루트를 머릿속에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