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70화 – 회고 (3)
차은경을 필두로 모인 인류 최후의 생존자들, 인류 결사대는 악마와의 힘겨운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어떠한 노력도 소용없이, 멸망은 착실하게 운명의 카운트 다운을 내리고 있었다. 옆 대륙엔 여전히 사천왕 두마리가 버젓이 살아있었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최초의 S급인 초능자나 텔레포터, 파라오가 실행한 결사의 토벌 작전은 실패를 넘어 전멸이란 끔찍한 결말을 맺었다.
그리하여 사실상 인류의 실질적인 S급 전력은 차은경만이 남은 가운데, 어느 날 인류 결사대 본부에 방문객이 찾아왔다.
“차은경 대장님. 밖에 웬 스님과 미스터 B란 인물이 면담을 청해왔습니다. 혹시 지인이십니까?”
“미스터 B? 나는 그런 사람 모르는데…. 뭐, 일단 들여보내 봐.”
***
대원의 안내를 받아 웬 늙은 중과 말끔히 차려입은 사내가 집무실로 입장했다. 정장 차림의 흑발적안 사내가 정중히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정보상, 미스터B입니다. 옆의 늙은이는 ‘현자’라 불러 주시지요. 긴히 말씀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대담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뒤쪽의 저분은?”
“호위인 곽태우다.”
뒤편에서 차은경을 호위하던 곽태우가 답했다.
“반갑습니다, 곽태우씨. 지금부터 나눌 이야기는 극비인지라 대장님께만 말씀드리고자 하는데….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거절한다. 너희가 암살자일 줄 어떻게 알고? 본명조차 대지 않고 정체를 숨기는 상대를 어떻게 신용하겠는가.”
“흠…. 대장님?”
곽태우가 팔짱을 끼는 것으로 확고한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자 미스터 B가 곤란한듯 상석의 차은경을 쳐다봤다. 그때 잠자코 있던 늙은 중이 나섰다.
“아니, 그의 말도 옳지요. 손님의 입장으로 초면에 이름조차 밝히지 않다니, 결례를 사과드립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여. 이 사내의 이름은 바포메트며 필부의 이름은 레오나르도라 하옵니다.”
미스터 B, 아니 바포메트를 만류하며 레오나르도라 밝힌 노인이 말했다. 그말에 곽태우의 관심이 노인에게로 쏠렸다.
훤히 민 머리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훤히 보이는 레오나르도는 서양인의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을 승복을 입고 있었는데, 오랜 풍파를 겪었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이 늙은 서양인은 도리어 헤진 승복과 무척 어울렸다.
‘둘 다 아무 기운 안 느껴지는 거 보니 미각성자군. 암살자는 아닌가? 아니, 섣불리 단언하지 말자. 내가 A급이니, 어쩌면 정체를 숨긴 S급일지도….’
곽태우가 어찌 생각했건 차은경과 두 방문객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곽태우는 믿을 수 있는 이니 무슨 비밀 얘기든 들어도 상관 없습니다. 그래서 용건이란 건?”
현자가 답했다.
“이 세계는 미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럽에는 루시퍼, 아시아에는 바알이 돌아다니며 생존자를 색출해 죽이고 있죠. 그 작업이 끝나면?”
“…두 사천왕이 함께 최후의 생존자, 인류 결사대본부를 향해 진격하겠죠.”
“옳습니다. 더구나 문명 경험치마저 거의 백 퍼센트에 근접한 지금, 마왕 마라 파피야스까지 강림하면 인류는 결코 절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천왕에 맞설 유일한 가능성인 최초의 일곱 S급이 모두 사망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레오나르도는고저 없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파멸의 미래를 예언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잔혹한, 그러나 자명한 지적에 차은경이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누구나 아는 사실을 말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뜬구름 잡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곧장 본론에나 들어가시죠.”
레오나르도가 이어서 말했다.
“이 전황을 뒤엎을 방도가 있습니다. 멸망의 운명을 바꿀 최후의 가능성이.”
“무슨 수로? 방금 전까지 절멸을 피할 수 없다느니,비관적인 전망만 잔뜩 늘어놓았으면서.”
차은경이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더는 그들을 손님으로서 존중하지 않겠다는 듯이 말투는 이미 반말로 바뀐 후였다. 무례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레오나르도가 태연하게 설명했다.
“성배란 아티팩트가 있습니다.”
“성배? 이름 하나 거창하군. 하지만 이름이 아티팩트의 가치를 결정 짓지는 못하지.”
“성배의 효과는 시간 역행. 시전자가 원하는 순간으로 세계의 시곗바늘을 되감을 수 있는 일회용 아이템입니다. 세계 전체의 시간축을 돌리는 신화급 아티팩트이기 때문에 시전자를 제외하면 그 어떤 강력한 초월자라도 성배의 영향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S급도, 사천왕도, 설령 마왕이라도.”
“뭣! 즉, 성배만 있으면 게이트가 열리기 전으로 돌아가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곽태우는 자기가 호위라는 것도 잊고 놀라움을 표했다.
누구나 놀랄법한 이야기였지만 차은경은 시큰둥했다. 이 자리까지 오는 동안 그녀는 숱한 사기꾼을 만나 봤으며, 아직 그 부류의 작자들과 눈앞의 두 명 사이의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의심을 담아 차은경이 추궁했다.
“무슨 근거로? 각성자도 아닌 사람이 시간 역행이라는 SF 소설에나 등장할 헛소리를 꺼내면 나는 이걸 진실이라 받아들여야 할까, 악마 협력자의 함정이라 받아들여야 할까?”
“흠…. 확실히, 미각성자 주제에 신화급 아티팩트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수상할 법도 하겠죠. 그럼 이런다면 어떻겠습니까?”
“뭐? 허튼- 큭!”
곽태우가 허튼짓하지 말라 막아설 틈도 없었다. 실내의 공기가 쿠웅 내려앉았다. 산소가 아니라 납덩이라도 되는 듯이 대기가 곽태우의 어깨와 무릎을 짓눌렀다.
‘무슨 존재감이..!’
노인과 사내의 몸에서 숨 막히는 기세가 발산되었다. S급에게서조차 느끼지 못한 압박감. 머릿속에서 직감이 세차게 경종을 울렸다. 눈앞의 두 존재는 위험하다. 아니, 위험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저 둘은 움직이는 재앙이었다.
‘움직이면, 살해당한다..!’
눈을 깜박이지조차 못해 곽태우의 두 눈이 경련하며 충혈됐다. 눈꺼풀을 한 번 내리는 사이 자기 목숨은 한낱 개미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차은경 역시 곽태우 곁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디서 이런 녀석들이 튀어나온 거지? 감당할 수 없는 강자였다. 존재감을 드러낸 것만으로 곽태우를 제압한 현상이 둘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들을 짓눌러 죽일 것만 같다는 예상이 빗나가게, 정체 모를 두 손님은 온건한 스탠스를 취했다.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레오나르도가 마력을 갈무리하자 바포메트도 따라서 마기를 거두었다. 그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낯이었다.
S급조차 개미 짓누르듯 여유롭게 압박하는 무한한 기운이 저 낯짝 아래에 숨어있다 생각하니 차은경은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곽태우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차은경이었기에 곽태우와 달리 자신과 두 방문객 사이 격차를 더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결사대 병력을 다 끌고 와도 절대 이기지 못한다. 최소 월드 보스급…. 우리를 해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진작에 전멸하고도 남았겠어.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그럴 마음이 없다는 거겠고….’
바짝 긴장한 곽태우와 차은경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레오나르도가 말했다.
“보다시피 이 친구와 이 늙은이는 꽤 강합니다. 강한 만큼 여러분이 모르는 정보도 많이 알고 있고요.”
“…그럼 왜 당신들이 직접 성배를 사용하지 않는 겁니까?”
“저희처럼 막대한 힘을 품은자가 과거의 시간선에서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면 암막 배후에 숨어있는 진정한 적을 자극할 수 있으니까요. 시간을 거스르는 건 미약한 자, 그렇기에 눈에 띄지 않는 자여야 합니다. 게이트가 열리기 전까지는 일반인이었던 여러분들처럼. 본래 신화 속에서 운명을 바꾸는 건 초월적인 힘을 지닌 신도, 요정도 아니라 다만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죠….”
진정한 적? 차은경은 그것을 마왕을 일컫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게 뭡니까?”
“저희는 차은경 당신이 성배를 사용해 과거를 바꾸기를 바랍니다. S급을 살리고, 사천왕과 마왕을 처치해 인류를 구하는 것.”
“그럼 성배는 당신이 가지고 있습니까?”
바포메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타깝게도, 아니요.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성배가 봉인된 위치는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봉인이 마왕성 최심부, 마왕의 옥좌에 있다는 것입니다.”
***
바포메트가 계획을 설명했다. 그 설명은 대충 이러했다. 봉인의 열쇠 조각은 총 네 조각으로, 사천왕이 하나씩 지니고 있다. 자기들이 사천왕을 처리한후 완성한 열쇠를 차은경에게 전해주겠다. 분노한 마왕이 현세에 강림해 관심이 자기들에게 끌린 사이 차은경과 동료들이 마왕성에 침입해 성배를 사용해라.
너무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가득했기에 차은경은 잠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가까스로 계획의 허점을 떠올리곤 질문했다.
“마왕성은 필히 게이트 너머 지옥 깊숙한 곳에 위치했을 텐데, 어떻게 그곳까지 간다는 말입니까?”
“마왕성으로 향하는 길은 바포메트가 제공해 줄 것입니다. 그는 개인적인 이유로 인류에게 협력하는 특이한 악마고, 마왕성까지의 ‘지름길’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결사대 병력을 모두 순식간에 마왕성으로 전이시켜줄 지름길을요.”
‘인간에게 협력하는 악마?’
곽태우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인간을 잡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족속이 인간에게 협력한다고?
‘설마 생존자를 모아 한 번에 처리하려는 악마의 함정인가?’
차은경도 곽태우와 같은 의심을 품었다.
‘그렇지만 사천왕에게 승리를 확신할 정도의 강자들이라면 별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순식간에 이곳을 초토화할 수 있을 텐데.’
저 정도 강자가 굳이 번거로운 수고를 들이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제안의 진위를 판별할 시간이 필요했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마왕성의 병력을 돌파하려면 결사대도 전 병력을 동원해야 할 테니 물론 어려운 결정이겠지요. 이해합니다. 결심이 서면 연락 주십시오. 여기, 제 명함입니다. 제게연락할 수 있는직통 회선이죠.”
미스터 B가 품에서 명함을 꺼냈다. 고민에 잠긴 차은경 대신 곽태우가 대신 명함을 건네받았다. 곽태우는 마지막까지 혹시나 그 명함이 암살 도구인가 싶어 부릅뜬 눈으로 명함을 찬찬히 살폈다. 깔끔한 디자인의 명함은 전화번호 마지막 한자리까지 곽태우의 머릿속에 유독 선명하게 새겨졌다. 훗날 다시 떠올리라면 언제든 떠올릴 수 있으리만큼….
***
“차은경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협조하겠다는군요. 계획일은 열흘 뒤가 될 것 같습니다. 결사대 측 인원은 그전까지 과거로 돌아가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사건을 막아야 할지 조사하고 외우려는 듯하더군요.”
전화를 끊은 바포메트가 레오나르도에게 차은경의 뜻을 전했다.
“현명하구나. 필사적인 만큼 그쪽은 어련히 잘 준비하겠지. 이제 우리만 준비물을 모으면 되네. 봉인의 열쇠조각인 ‘게티아 코드’는 몇 개 남았지?”
“본래 제게 주어졌던것 하나, 사망한 김재민과 벨페고르에게서 회수한 것이 각각 하나가 있으니, 이제 두 조각 남았군요. 루시퍼와 바알제불에게 하나씩. 마침 그쪽도 둘이고 저희도 둘이니 한 놈씩 전담해 상대하면 되겠군요.”
“자네가 바알을 맡게. 내가 루시퍼를 맡을 테니.”
“잘 됐군요! 예전부터 거슬리는 짓거리만 골라서 하는 게, 언젠가 한 번 쥐어패고 싶었는데. 이참에 소원 성취해보겠네요.”
사천왕을 홀로 대적하라는 소리에도 바포메트는 두려워하기는커녕 군침을 다셨다. 그런 벌레 따위야 간식거리도 안된다는 듯이.
바포메트의 가벼운 태도에 레오나르도가 충고했다.
“조심하게. 적은 만만케 볼 상대가 아니네.”
“‘신성’도 각성하지 못한 바알 따위를?”
“아니. 사천왕이 아니라, 그 이후가 닥쳐올 적을. 교전 중, 또는 직후에 신과 마왕이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고 기습해올 가능성이 몹시 높으니. 그리고 둘은 우리처럼 신성을 각성한 시스템 사용자니 사천왕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게 강할 걸세.”
따끔한 주의에도 바포메트는 태연자약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앞으로의 일이 정말 기대된다는 투였다.
“후후. 둘 중 누가 누굴 노릴지는 뻔하죠. 마왕과 당신 사이엔 청산해야 할 골 깊은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마왕이야 틀림없이 제가 아닌 당신을 노릴 테고, 엘로힘이 저를 노리겠죠. 그리고 아버지께서 친히 저를 상대하러 와주신다면, 그야말로 제가 바라는 바죠. -이 들끓는 분노를 마침내 청산할 수 있을 테니-!”
잔뜩 흥분한 것처럼 바포메트의 말은 뒤로 갈수록 빨라졌고, 호흡도 없이 마지막에내지른 문장은 거의 환희의 포효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언제나 싱글생글 웃고 있는 가면이 깨지고, 그 유쾌한 웃음 뒤에 숨어있던 분노의 편린이 드러나자 레오나르도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방심하지 말게. 제 권한을 넘어서 시스템을 남용하느라 아무리 약해졌다 한들, 엘로힘은 창조신이자 최초의 시스템 사용자일세. 우리로선 상상할 수 없는 영겁의 시간 동안 시스템을 파고들고 연구한 놈을 결코 얕봐서는 안 돼.”
레오나르도가 엄중히 경고했다. 이전에 한 번 일을 망친 전적이 있는 바포메트가 두 번 실수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실수 한 번이 곧장 나락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주의를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바포메트는 여전히 태평했다.
“어차피 이기든 지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계획대로라면 차은경이 성배를 사용해 시간을 되돌릴 텐데. 그럼 승패와 무관하게 운명의 주사위는 던지기 전으로 돌아갈 테고. 나는 원없이 싸우다 세계가 역행하기만을 기다리면 되겠죠….”
“끄응, 그건 그렇지만….”
“그보다 어째서 차은경에게 제 이름을 멋대로 가르쳐 준 겁니까?”
늙은이 잔소리를 끊고자 바포메트가 화제를 전환했다.
바포메트와 레오나르도는 같은 적에 대항하기 위해 서로 협력한 관계였다. 구체적으로는 레오나르도가 계획을 짜고 위장에 능한 바포메트가 실행하는 관계.
그러나 오늘의 계획 중 ‘바포메트’란 악마명을 차은경 측에 밝히는 부분은 없었다. 괜히 악마임을 밝혔다가 상대의 경계가 한층 짙어져 자신들의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회귀한 차은경이 그 이름을 빌미로 자네에게 접촉해오겠지. 협력을 구하든, 협박을 해오든. 그리하면 회귀자의 존재를 통해 세계가 한 번 멸망했음을 알아챈 우리가 계획을 수정할 수 있을 테고. 게다가 ‘바포메트’ 역시 자네 진명이 아니잖나? 첫째 가명은 바포메트, 둘째 가명은 미스터 B. 이중으로 정체를 숨기고 있으면서 겁도 많구나.”
“흠….”
해명에도 바포메트는 레오나르도의 돌발행동이 못내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레오나르도가 바포메트가 한창 ‘미스터 B’였던 시절의 실수를 지적했다.
“그리고 우리의 계획이 꼬인 건 본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성기사가 자네 실수로 타락해버렸기 때문 아닌가? 그러게 그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누누이 경고했건만.”
“당신이 집필한 ‘현자의 예언서’를 읽으면 신재혁이 신에게 돌아설 줄 알았지, 멘탈이 나가 자포자기하곤 타락해버릴 줄 제가 알았겠습니까?”
그 질책에 바포메트는 억울하다는 듯 과장스럽게 항변했다. 낙원교에서 온 의뢰를 신재혁에게 추천해 신재혁이 교황청 금서고에 보관되던 현자의 예언서를 읽게 유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결과마저 유도한 것은 아니었다. 바포메트는 계획을 위해 신재혁의 각성을 앞당길 기회를 노렸을 뿐, 최강의 성기사라는 패가 완전히 저쪽 편의 손에 들어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책망한들 되돌릴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였고, 여러 번 지적한 잘못이었기에 잔소리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레오나르도는 한숨을 푹 내쉬곤 몇 년은 더 늙은 듯한 힘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여튼 성배를 쓰면 마지막 기회네…. 엘로힘은 제 비장의 카드를 우리가 가로채리라곤 상상도 못하겠지. 자네가 죽은 줄로 알고 있는 엘로힘은 자네의 죽음과 함께 게티아 코드가 소멸해 아무도 봉인을 풀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테니.”
“크크크, 정말 유쾌하기 짝이 없군요. 아무리 위대한 아버지더라도 당신께서 하사한 기만의 권능이 자기 눈마저 속일 정도로진화할줄은 예측하지 못하다니!”
“그 오만함 덕분에 우리와 인류에겐 마지막 기회가 생겼지…. 다음 회차에선 절대 실패해서는 안 돼.”
“지금 저희가 왈가왈부한들 과거의 저희가 영향받는 건 아니지만요…. 부디 차은경이 영웅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해주길 바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