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1화 〉71화 - 회고 (4) (71/72)



〈 71화 〉71화 - 회고 (4)

결전의 날이 되었다.

***

“헉, 헉! 젠장, 이놈의 지긋지긋한 악마들은 끝도 없이 튀어나오네!”

마왕성 지하 487층 복도, 잠깐의 휴식 동안 기습을 감행해온 일련의 악마 무리를 가까스로 모두 격퇴한 차은경이 숨을 헐떡였다.

“젠장, 피해가 막심해…. 이제 몇 명이나 따라오고 있지?”
“처음 병력의 삼십 프로도 채  돼! 대장, 계속 진행할 거야? 이대로가다간 666층에 닿기도 전에 전멸할지도 몰라! 게다가 곽태우는 지금 짐덩어리밖에 안 되잖아!”

차은경이 더러운 천으로 오른 어깨를 지혈하고 있는 곽태우를 돌아봤다. 수많은 전장을 함께 헤쳐 온 자신의 가장 오랜 벗. 그는 직전 층에 악마의 기습으로 한쪽 팔을 잃은 채였다.

본래 양손검사였던 곽태우는 오른팔을 잃은 이후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무리 A급이라한들 이런 흉악한 마경에서 1인분 못하는 검사란 단지 걸리적거리는 짐덩이에 불과했다. 차은경이 다그쳤다.

“젠장,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냥 이대로 계속 간다! 이건 결사대 병력을 모조리 쏟아부은 최후의 기회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전력이 무척이나 귀중한 상황이야! 우리를 위해 희생한 동료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배를 손에 넣어야 해!”

성배냐, 전멸이냐. 살아남은 결사대원 모두가 그 사실을 알았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성배를 사용해 시간을 되돌리면 결국 희생한 동료들도 되살아나리란 한 줄기 희망에 매달려 그들은 계속해 지하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지하 535층, 끊임없는 죽음의 공포에 노출된 스트레스에 결사대원 하나가 불평을 터뜨렸다.

“젠장! 바포메트나 레오나르도 둘   명만 따라왔어도 이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진 않았을 텐데!”
“어쩔 수 없어. 누군가는 마왕을 상대로 시간을 끌어야 하고, 우리는 마왕에 대적할 전력이 없으니까. 우리가 성배를 사용하기 전까지 부디 그 둘이 버텨주길….”
“자자, 그렇게 불길한 소리만 하지 말고! 며칠 만에 사천왕을 둘이나 처치한 인물들인데, 오히려 2대 1로 싸우면 마왕도 쉽게 이기지 않겠어? 만에 하나 두 사람이 마왕을 이긴다면 순식간에 우리를 도우러   있을 거야. 자유자재로 게이트를 여는 바포메트의 능력으로 결사대  병력을  몇 초 만에 마왕성 내부로 순간이동시킨 것처럼!”

결사대원들 사이에서 자꾸 음울한 이야기만 나오자 차은경이 기운을 불어넣고자 희망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한  앞도 볼  없는 절망 속에서 간신히 희망의 빛줄기가 비쳐오자 결사대원들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그래..! 두 사람이 지원만 온다면..!”
“우리는 그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돼!”

차은경은 계속해서 대원의 사기를북돋우고 안심시켰다. 태연함을 가장했으나 정작 차은경 자신은 속으로 몹시 심란한 상태였다.

‘바포메트와 레오나르도.  명의 목적은 도대체 뭐지? 

레오나르도는 인류 멸망을 막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혔으나, 차은경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사천왕을 쓰러뜨릴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인류가 멸망 직전으로 몰릴 때까지 아무런 도움도 없이 지켜만 보고 있었던 주제에, 멸망을 막겠다고?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차은경이 고민을 이어갈 여유는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 다음 층에 도착하자마자 숨어있던 악마들이 습격해왔기 때문이다.


***


그들을 가로막는 수많은 고위악마를 물리치고 결사대는 한층 한층 마왕성 아래로 내려갔다. 그들이 마침내 지하 666층, 마왕성의 최심부에 도달하자 넓은 알현실 중앙에 마왕의 옥좌가있었다.

“이곳이 성배가 봉인된 장소….”
“수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마침내 이곳에..! 대장! 어서 바포메트가 가르쳐 준 대로 봉인을 풀어!”

모두의 재촉에 차은경이 옥좌를 올려봤다. 인간의 해골과 넓적다리뼈로 쌓아 올린 십 미터 크기의 건축물. 그 앞에 선 차은경이 상태창을 열었다. 그리고 새로이 생긴 위업을 확인했다.

「===

<성배기사> - 열쇠를 모아 성배의 이용 자격을 얻다.

===」

바포메트가 봉인의 열쇠라는 ‘게티아 코드’를 넘겨주면서 차은경의 상태창에 새로 만들어진 위업이었다. 위업의 효과 덕에 차은경은 게티아 코드를 어떻게 사용해 봉인을 해제할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리했다.

차은경의 손에서 황금빛 기운이 피어올랐다. 황금빛 기운은 공중에서형태를 이루더니, 열쇠의 형상이 갖추어 허공을 비틀었다. 그러자 옥좌 위의 공간이 일렁이며 하늘에서 성스러운 빛이 쏟아졌다.

“아, 저것이..!”

빛무리 속에서 황금빛 잔이 천천히 내려왔다.

‘이것이 성배….’

곽태우는 벅차오르는 마음속에서 그 성스러운 후광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만 있으면 동료들의 희생도, 인류의 쇠락도 모두 없었던 것으로 되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곽태우는 만장일치로 성배를 사용하기로 결정된 차은경이 과거로 돌아가 인류 멸망을 막을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차은경이 허공에서 천천히 하강하는 성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원들을 바라보았다. 마왕성 침입 과정에서 수많은 고위악마와 싸운 탓에 모두가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나 모두의 눈길에 강렬한 희망이 깃들어 있었다. 그 기대의 눈길 가운데서 차은경이 곽태우를 바라보았다.

곽태우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오가진 않았지만, 수천의 전장 속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쌓은유대로  고갯짓이 무슨 의미인 줄 알 수 있었다.

가서인류를 구해다오.

결연한 눈빛으로 차은경이 성배를 발동하는 시동어를 읊고자 했다.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궁-!!

지진이라도 난 듯, 마왕성전체가 거세게 흔들렸다. 벽과 기둥, 천장과 바닥이 갈라질 정도로 세차게.

“지진?!”
“무슨 상황이지!”
“모두 당황하지 말고 일단 사방을 경계해! 적습일지도 모른다!”

쿠구구구구궁-!!

격한 진동에 기둥에 금이 갔고, 바닥도 쩍쩍 갈라지며  모를 심연으로 떨어지는 균열이 형성됐다. 바닥에서 생성되는 틈에 빠지지 않게 조심하느라 결사대원의 주의가 천장에서 바닥으로 쏠렸고, 그 사이 천장에서 후두둑 떨어진 돌덩어리 하나가 재수없게 허공의 성배를 맞췄다.

“자, 잠깐! 성배가!”

추락하는 돌덩이에 직격해 바닥에 떨어진 성배는 몇 번 튕겨 오르더니 바닥을 데구르르 굴러 바닥의 틈 사이로 떨어질 듯했다.

“안 돼! 저걸 놓치면-!”
“누가 잡아-!!!”

가장 가까이 있던 곽태우가 균열으로 몸을 날렸다. 곽태우는 균열 사이로 떨어지던 성배를 아슬아슬하게 붙잡는  성공했다.

“씨발, 다행이다! 팔 한 짝 잘리고 짐덩이가 된 줄 알았는데, 여기서 1인분을 하는구나!”
“대가리는 나쁜데 그래도 반사신경은 좋네! 존나 잘했다 새꺄!”

곽태우의 재빠른 활약에 모두가 안심하는 가운데, 천장에서 들려오는 쾅! 쾅! 하는 진동음이 점점 커졌다. 소리에 집중하니 그들은 소리가 주기적이며,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결사대는 그 소리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뭔가, 내려오고 있어..!”

누군가 바닥을 뚫고 마왕성의 최심부로 향하고 있었다. 아주 강력한 누군가가.

계단도 이용하지 않고 저리 급히 내려오는 걸로 보아 아군일 확률은 희박했다. 차은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마왕성을 부수며 하강하는 누군가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자신이 성배를 사용하기 위한 주문을 완성하기 전에 정체불명의 인물이 이곳에 닿으리만큼.

차은경의 판단은 빨랐다.

“누군가 급속도로 접근하고 있다! 곽태우! 일단 성배를 숨겨! 일단 이곳에서 후퇴한 후 안전한 장소에서 성배를 사용한다!”

그녀는 곽태우에게 성배를 넘겨받아 사용하기보다 곽태우에게 성배를 숨기라고 명령을 내렸다. 대장의 명령에 따라 결사대원들은 안전한 곳까지 후퇴하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통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 천장을 쾅쾅거리는 소리가 이제 귓가에서 대포가 터지는 것처럼 커졌다. 귀가 멍멍했다.

결사대원 하나가 마침내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계단에 닿았을 때, 이때까지 들었던 소리  가장 커다란 폭음과 함께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조심해-!”

그러나 경고는 늦었다. 잔해를 꿰뚫으며 길쭉한 무엇인가 낙하했다. 불길한 적흑빛 번개로 휘감긴 칠흑의 창.

콰직-!

계단에 막 첫발을 내딛은 대원은 정수리부터 창에 꿰여 즉사했다.

“저 번개..! 설마!”

창의 주인을 예상한 차은경이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추측을 긍정하듯 위에서 강력한 기척이 느껴졌다.

“암흑기사다! 피해-”

경고가 채 끝나기도 전, 세계를 공포로 물들인 흑기사가 천장을 부수며 추락했다.

검은색 철갑이 바닥과 충돌하자 거대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움푹 패였고, 잔해 아래에 깔려있던 대원의 시체가 짓이겨지며 핏물이 찍-하고 뿜어져 나왔다. 왼손에 메이스를 든 흑기사가 오른손으로 잔해더미에 깊게 꽂힌 창을 뽑았다.

동료의 죽음에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모두의 머릿속이 충격과 공포로 굳었다. 발걸음이 느린 덕에 살아있던 결사대원 하나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암흑기사! 어떻게 여길 알고-!”

최후의 작전에 관한 정보는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극비로써 보안이 가장 뛰어난 인류 결사대 본부의 비밀 서버에 보관해 놓았을 텐데, 암흑기사가 어떻게 자기들이 이곳에 있으리란 사실을  것일까? 고민할 여유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암흑기사는 창을 뽑자마자 순식간에 돌진 자세를 잡고는 가장 가까운 적에게 달려들었다.  기습에 반응한 차은경이 검으로 그의 창을 가로막았다.

“-후퇴해! 후퇴해서 그걸 현자, 레오나르도에게 전해!”

차은경이 힘에 부치는  잇몸을 악물고 소리쳤다.

곽태우는 그녀를 도와야 할지 도망쳐야 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그녀도, 그도 알고 있었다.

악신의 사랑을받는 자.
S급 학살자.

암흑기사는 지나치게 강했다. 현존하는 최강의 헌터인 차은경이 시간 벌이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곽태우는 결사대원을 이끌고 암흑기사를 빙 둘러 그 뒤의 계단을향해 달려갔다. 그때 조용하기로 유명한 암흑기사의 투구 사이로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현자는 이미죽었다. 최후의 전장에서 나의 주께서 승리하셨으니. 얌전히 성배를 내놓아라. 그리하면 고통 없이 죽여주마.”

곽태우가 눈을 크게 떴다. 인종조차 밝혀지지 않은 암흑기사가 한국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놀랄 겨를도 없이 그가 내뱉은 말이 곽태우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성배는게티아 코드를 가진 자, 즉 자격을 갖춘 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 자격을 갖춘 차은경이암흑기사를 막느라 이곳에 묶여있다면, 이곳에서 도망친들 성배를 사용할 수 있는 이는 없다.

암흑기사는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음을 담담하게 알리고 있었다. 살아남은 일곱의 결사대원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차은경을 두고 도망치면 성배를 사용할 수 없다.

‘여기서 암흑기사를 쓰러뜨려야만 대장이 성배를 사용할  있다!’

모두의 생각이 일치했다. 대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암흑기사는 도망치다 멈춘 대원들을 등진 채 현란하게 창을 휘두르며 차은경을 상대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암흑기사라 한들, 등에 눈이 달린 게 아닌 이상 다섯의 기습이라면..! 다섯 명이 동시에 암흑기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최후의 발악이었다.

“어리석은. 기어이 고통스런 죽음을 바라느냐.”

어둠이여-. 흑기사가 아리아를 읊었다. 왼손에 든 메이스에 검붉은 지옥불이 화르르 타올랐다. 오른손의 창을 힘껏 휘둘러 차은경을 멀리 튕겨낸 암흑기사가 상체를 뒤로 돌리며 백핸드로 메이스를 휘둘렀다. 그 궤적을 따라 지옥불이 뿜어지며 기습을 시도하는 대원들을 덮쳤다.

“끄아아아─악!”

영혼마저 불태우는 불꽃이 전신을 태우자 끔찍한 고통에 대원들이 바닥에서 몸부림쳤다. 그리고 일 분도 지나지 않아 그 꿈틀거림은 멎었다.

전멸. 곽태우와 차은경을 제외한 생존자가 목숨을 잃기까지는  일 합이면 충분했다. 부상 때문에 사실상 전투 능력이 전무한 데다 성배를 숨기고 있던 곽태우는 달려들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기때문에 지옥불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곽태우를 힐끗 쳐다보더니 공격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암흑기사가 성배를 지닌 것으로 추정되는 차은경에게 달려들었다.

곽태우는 망설였다. 도망쳐봤자 성배를 사용할 수 없는 인류의 미래는 뻔했고 암흑기사에게 달려들어봤자 승산이 보이질 않았다. 차은경이 눈앞에서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음에도 그는 결정장애에 걸린 사람처럼 확실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순식간에  선택을 포기할 만큼 현명하지 못했다.

그사이 전투가 끝났다. 양손의 무기를 번갈아 내지르며 차은경을 압박하던 암흑기사가 몸을 한 바퀴 빙그르- 회전하더니 그 원심력을 이용해 메이스를 강하게 휘둘렀다. 정신없이 공방을 이어가던 차은경은 흑기사가 눈앞에 가져다 댄 창대에 가려 자신을 향해 엄습하던 메이스를 미처 보지 못했다.

검붉은 번개로 휩싸인 창과 메이스는 정말로 번개처럼 빨랐다. 그래서 마치 싸구려 호러 영화에서 유령이 튀어나오듯 메이스가 그녀의 눈앞에 불쑥 튀어나올 때 차은경은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뼈가 으깨지는 파열음과 함께 그녀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뒤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몸뚱아리가 주르륵 미끌어지면서 벽에 기다란 핏자국을 남겼다.

“아,  돼! 차은경-!!!”

암흑기사는 성배를 회수하기 위해 차은경에게 다가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곽태우가 암흑기사를 향해 달려들었으나 암흑기사가 가볍게 휘두른 창대에 복부를 얻어맞아 바닥을 구를 뿐이었다.

“늦지 않게 성배를 회수할 수 있어서 다행이군….”

암흑기사가 쓰러진 차은경에게 몸을 숙여 외투를 뒤졌다.

“음?”

암흑기사의 목소리가 당황으로 물들었다. 성배가 없었다.

 순간이었다. 기절한척하던 차은경이 재빠르게 품속의 단도를 뻗어 올리며 암흑기사의 머리를 노렸다. 당황한 상태였던 암흑기사는 0.03초 반응이 늦었다. 그리하여 공격을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그는 머리를 뒤로 빼려 했으나 그보다 빨리 그녀의 손이 투구를 올려쳤다.

얼굴 전체를 가리던 암흑기사의 검은 투구가 벗겨졌다. 땀과 눈물로 흐릿한 곽태우의 시야에 투구 속에 있던 남성의 얼굴이 비쳤다. 잘생긴 남자의 얼굴. 투구 아래 악마의 일그러진 얼굴이 존재하리라는 그의 예상과 달리 무자비한 학살자의 얼굴은 자신과 다를  없는 사람이었다.

“뭣! 네가 어째서─”

곽태우의 반응보다 차은경의 경악이 먼저 튀어나왔다. 차은경은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듯 충격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뒷말을 끊으려는 듯, 암흑기사가 그녀의 복부를 걷어찼다. 컥-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벽에 박히며 크레이터를 남겼다. 이번엔 정말로 충격이 컸는지, 그녀의 몸이 피를 뿜으며 경련했다.

“그래. 네놈이 성배를 가지고 있군.”

암흑기사는 곽태우를 다 잡았다는 듯이 여유롭게 그에게 걸어왔다. 오른팔 없는 부상자 따위야 마음만 먹는다면 단숨에 처리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

곽태우가 검에 몸을 지탱하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S급이던 차은경과 다른 동료들도 단숨에 죽여버린 적을, A급 따위가 어떻게…. 곽태우가 품속에서 성배를 꺼냈다.

“그래, 악마의 신이 이걸 원하나?”

악신에게 회귀 아이템을 뺏길 바에는 차라리 악신이 성배를 가지지 못하도록 부술 요량이었다. 암흑기사는 가소롭다는 듯이 그를 비웃었다.

“신께서 직접 만드신 신물 중의 신물을 네놈 따위가 부술  있으리라 생각하나? 나는 커녕, 사천왕조차 이기지 못하는 네놈이?”

천천히 곽태우를 향해 걸어오던 암흑기사는 그새 쓰러진 차은경과 곽태우 중간에 있었다. 한 손에 성배를 든 곽태우의 몸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 눈은 여전히 기회를 노리며 암흑기사 어깨너머를 보고 있었다.

입을 작게 중얼거리는 차은경을 향해, 무언가를 기다리듯이.

그는 차은경과 시선을 마주쳤다. 성배를 든 곽태우가 그녀를 바라보았고, 빈사 상태의 차은경이 그를 바라보았다.  사이에 말은 없었다. 그럼에도 뜻은 통했다. 차은경이 작게 중얼거렸다.

“…성배를 보우하는 열두 성인이여, 자격을 갖춘 이가 요청하노라…….”

초인적인 청각으로 그 작은 말소리를 알아챈 암흑기사가 차은경을 휙 돌아보며 포효를 내질렀다.

“안─돼──!!!”

그가 왼손의 메이스를 놓아 버리고는창 한자루만 들고 그녀를 향해 폭발적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뛰어가는 속도 그대로, 창을 힘껏 쏘았다. 그녀의 입을 물리적으로 막아버리기 위해.

번개가 내리치듯 창이 발사되었다. 그러나 차은경의 아리아가 완성되는 쪽이 먼저였다.

“과거로 돌아갈 권리를, 미래를 바꿀 기회를 나 차은경이 양도한다. 나의 가장 절친한 벗, 곽태우에게.”

주문이 완성되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곽태우의 머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성배를 사용할  있는 자격을 차은경에게서 양도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암흑기사가 뒤를 돌아본 순간, 곽태우의 입은 이미 성배를 사용하기 위한 아리아를 외고 있었다. 성배를 발동하는 데 집중하느라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하는 그의 눈은 창이 날아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창이 공기를 찢으며 날아가 차은경의 목을 뚫고 벽에 박히는 모습과, 그녀의 몸이  늘어지는 모습도.

두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으나 곽태우의 입은 아리아를 멈추지 않았다. 최후의 방심으로 주인의 명령을 완수하지 못한 암흑기사가 곽태우를 증오스럽다는 듯이 돌아보았다.

“다음번엔다를 것이다. 기다려라.내가 다시 한번 너의 절망이 되리니.”

암흑기사는 모든 일의 결말을 예상한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곽태우를 노려보았다. 곽태우도  시선에 맞서 물기 어린, 그러나 부릅뜬 눈으로 암흑기사를 노려보았다.

‘암흑기사..!  놈만큼은, 반드시!!!’

그리고  사람의 증오가 교차하는 찰나, 회귀의 아리아가 완성되었다.

“──최후의 최후에서, 자격을 갖춘 이가 바라노라. 세계의 운명을 내 손으로 움켜쥐기를.”

성스러운 빛이 성배에서 뿜어져 나왔다. 아주 강력한 빛이었다.

우주의 끝까지 뻗어 나간 빛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세계를 휘감더니, 곽태우를 제외한 모든 사물이 흑백사진처럼 색을 잃으며 천천히 정지했다. 바닥을 흐르는 핏줄기도, 벽에 늘어진 벗의 시체도, 그 강력한 암흑기사조차도.

 직후, 모든 것이 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세계가 거꾸로 움직이고 있었다.

 현상에서 홀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곽태우는 모든 사물이 자신이 응당 있어야  곳으로 돌아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바닥에 흩뿌려진 핏물이 중력을 거스르며 벗의 목으로 모이는 광경을. 그 목에 박힌 창이 저항 없이 뽑히며 상처가 아무는 장면을. 바닥에서 검은 투구가 날아오르며 벗의 단검이 투구를 쳐내는 모습을.

 과정은 찰나에 가까웠으나 인류 최후의 각성자의 초인적인 시력에는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릿했다. 회귀자는 증오스러운 원수의 얼굴을 머리의,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새기고자 눈을 부릅떴다.

‘절대로 네 얼굴을 잊지 않겠다. 반드시, 반드시, 이번엔 반드시-!!!’

곽태우가 맹세했다. 과거에서 그를 찾아내 기필코 죽여버리겠다고. 인류를  지경까지 밀어 넣은 악마의 조력자와 인류의 배신자를 전부 쳐죽여버리겠다고.

그리고 벗의 손이천천히 떨어지며 투구가 흑기사의 얼굴을 완전히 가리운 순간, 여섯 번째 하늘의 회귀자는 의식의 끈을 놓았다.


***


복수자가 눈을 떴다. 일곱 번째 하늘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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