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제 01계-챕터 01: 에볼루션 시스템
“글쎄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 공정이라는 건 결국 상대적인 개념. 서로가 서로를 상대로 합의점을 찾아내는 일. 그분은 자신의 눈에 든 이들이라면 제대로 존중해주고 제대로 합의점을 찾아 거래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정하다는 거죠. 하지만 아무리 그분께서 그 어떤 거래 제안을 해도 당신이, 거래에 응해야 할 이가 그분이 내민 합의점을 합의점이라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거래에 응해야 할 이에게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결국 세계가 공정했던 것인지, 부조리했던 것인지는 당신이, 개인이 느끼기 나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정말이지,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천사였다. 겉모습은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소녀인 주제에 말하는 거 하나하나가 죄다 ‘이성’으로만 치우쳐져 있는 ‘이성의 괴물’이 내뱉는 말 같았다.
‘조금은 인간의 감정도 생각해주라고.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이성적으로만 움직이는 게 아니잖아?’
열이 머리 끝까지 차오르다 못 해서 터질 것 같은 형의 인격. 그러나 그렇기에 오히려 역으로 냉정해질 수 있었다.
천사의 이론은 이해할 수 있었다. 단지, 감정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그리고 그렇기에 형의 인격을 결정했다.
“그 무엇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당신의 선택.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 또한 당신에게 있겠죠. 자,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거죠?”
“……선택하라는 건가?”
“네, 선택하세요. 당신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이대로 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소생했던 것을 없었던 일로 하여 죽음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제 제안을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거나.”
“……킥킥! 어떻게 봐도 죽고 싶지 않으면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협박으로밖에 안 들리는데 말이지.”
“결코 협박이 아니에요. 저는, 위대한 존재는 당신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거래를 하고 싶지 않다는 자에게 거래를 강요할 정도로 위대한 존재는 상식이 없으신 분이 아닙니다.”
“상식적인 것도 너무 상식적이어서 문제라면 문제인 것 같지만 말이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는데, 네 제안을 받고 소생하게 된다면 기억을 잃는 것과 기억을 잃은 뒤 기억을 통해 행동이 유도되는 것 외에는 대가가 없어?”
조금은 진정한 것 같은 목소리, 하지만 실상은 분노를 내면에 숨기고 있을 뿐인 목소리로 형의 인격이 묻자 천사는 대답했다.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고 해야 할까요. 챌린저가 살아갈 세계는 ‘멸망이 예정되어 있는 세계’입니다.”
“……하?”
“다시금 이야기해 드리죠. 챌린저들이 살아갈 세계는 ‘멸망이 예정되어 있는 세계’입니다. 요컨대 그런 세계에서 ‘살아가는 게 마지막 대가’라면 대가인 거죠.”
“……와우! 천사도 미치거나 하는 거야? 멸망이 예정된 세계에 던져지는 게 되살아나기 위한 마지막 대가? 어떻게 봐도 소생하기 위한 대가치고는 너무 무거운 대가 같은데?”
그야 기억을 잃는 대가를 치러 살아났다고 해도 멸망이 예정된 세계에 떨어져 시간부 인생으로 살아간다면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렇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챌린저 여러분께 ‘선택지’를 드리는 겁니다. 전부 알려 드리고, 멸망할 세계라고 해도 살아가고 싶다. 그럴 경우에는 거래에 응하시라는 이야기죠.”
……도대체 어디서부터 딴죽을 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뭐? 멸망이 예정된 세계에서라도 명을 이어가고 싶을 경우에만 거래에 응하라고?
이게 도대체 어딜 봐서 그 잘난 ‘공정한 거래’란 말인가? 그런 형 인격의 의지를 읽은 것인지 천사가 또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죽을 것인지, 기억을 잃고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갈 것인지. 이 두 가지 선택지만 존재하는 게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나요? 아뇨. 다시금 이야기하지만 공정합니다. 공정하지 않았으면 애초에 이런 제안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강조하죠. 당신은 위대한 그분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
“비하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아무런 연관도 없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 그대로 얼굴도 모르는 생면부지인 존재’라는 이야기니까요. 즉, 위대한 그분에게는 결코 당신을 도와 당신의 목숨을 구해줄 ‘의무’가 없다는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그분은 당신에게 원하는 게 있어서 당신의 목숨을 구해주는 대신에 그 원하는 것을 자신에게 달라고 ‘거래’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존재가 원하는 것은 공선자가 기억을 잃고, 멸망이 예정된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
“목숨이란 한 개인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 귀중한 것. 그 어떤 것과도 맞바꿀 수 없는 보물. 그것이 이미 저울추 위에 올라가 시점에서 위대한 그분이 반대쪽에 그 무엇을 올려놓던지 이 거래는 ‘공정해질 수밖에 없는 거래’라는 이야기죠. 설령 그 저울추 위에 당신의 ‘의사’조차 올려진다고 해도. 하지만 그분께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저울추 위에 올려놓은 것은 기억과 당신이 앞으로 살아갈 세계의 결정권. 아니, 솔직히 이야기하여 당신이 앞으로 살아갈 세계의 결정권을 대가로서의 가치도 없다는 걸 알고 계시나요?”
현재 공선자의 목숨의 유무는 그 위대한 존재라는 자의 손에 있었다. 그런 만큼 공선자를 되살린 다음 그를 어떤 세계로 집어 던지던지 그 위대한 존재의 마음이라는 이야기.
그저 목숨을 구원받는 공선자에게 본래라면 자신이 살아갈 세계를 결정할 결정권조차 없다는 소리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공선자 본인이 원래 살아가던 세계는 이미 멸망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선자의 경우에는 자신이 살던 세계를 멸망시켜 놓고서 자기는 안전한 세계에서 살아가겠다는 소리다. 그것참 뻔뻔한 이야기 아닌가?
“……그래, 그래. 알았어. 알겠어요. 천사 아가씨. 이해했어. 오케이. 확실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천사 아가씨 이야기대로 전혀 부조리하지 않은 이야기네. 결국, 내가 을이니까 주제 파악 해라 그런 이야기 아니야?”
“과장이에요. 그렇게 이야기할 거면 저희는 챌린저 여러분께 선택권조차 주지 않았을 겁니다. 대가 없는 갑질, 공정하지 않은 갑질, 선을 넘는 갑질은 위대한 그분이 싫어하시는 요소이니깐 말이죠.”
그렇게 말을 마친 천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표정 변화 하나 없는 그 눈동자로 공선자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시선에는 전해야 할 모든 것은 전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동시에 공선자의 ‘선택’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형의 인격을 실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의 인격에게 최종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파트너, 아무래도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 같은 상황인데 말이야. 역시 우리가 결정할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는 것 같지?’
-……응, 하나밖에 없어. 늘, 늘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쥐어지는 선택지는 언제나……, 언제나 어느 쪽이든 지옥이었으니까.
‘키키킥! 그래, 언제나 지옥밖에 없었지. 어느 쪽이든 지옥이야. 그렇다면 역시 조금 더 낳은 지옥을 선택해야 하지 않겠어?’
솔직히 말해서 공선자의 형의 인격은 이미 진작 결론을 내려둔 상태였다. 천사와 그 천사의 뒤에 있는 위대한 존재라는 자의 목적.
그 목적을 파헤치기 위해서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기 이미 오래전에 말이다. 구체적인 시점은 다름 아닌 천사에게 자신들에게 단 하나의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래, 공선자의 형의 인격은 이미 자신들이 저 천사와의 거래에 응할 것인지, 응하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존재한다고 들은 순간에 이미 결정을 끝마쳤던 것.
“그러면 그렇게 천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던 우리……, 나의 대답을 돌려주도록 하지. 단호하게 거절하마!”
“……진심입니까?”
공선자의 형의 인격이 내놓은 대답은 소생의, 거래 제안의 거절. 이것은 공선자 형의 인격만의 결론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결론을 내놓은 것에는 형 인격의 소망보다 동생 인격의 소망이 더 크게 작용했다.
광기에 물든 형의 인격은 아직 더 할 수 있었다. 더 날뛸 수 있었다. 더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광기에 의해서 정신을 무장한 형의 인격에 한정된 이야기.
……동생의 인격은 이미 진작 한계를 맞이했다. 아니, 애초에 형의 인격이 탄생한 시점에서 동생의 인격은 구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공선자의 인격은 둘로 나뉜 것이었다. 망가졌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정신의 축을 동생의 인격으로 분할시켰다.
그리고 아직 멀쩡한 정신의 일부를 망가지는 순간 정신 자체가 붕괴해버리는, 즉, 정신의 중심이 되는 동생의 인격을 지키기 위한 형의 인격으로 분할시킨 것.
애초에 형의 인격이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공선자라는 존재의 삶 그 자체가 지옥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런 지옥보다 더한 삶 속에서 여태까지 살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단순히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무려 세계 멸망이라는 목적을 실현하여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증명해냈다는 것부터가 대단한 일이었다.
설령 그 증명 방식이 악이라고 해도 본래라면 꼭두각시로서 살아가며 허무하게 스러져갔을 목숨.
그런 목숨으로도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해냈다는 사실은 결코 무시당할 일이 아니었다.
설령 그것이 세계 멸망이라는 최악의 방식이었다고 해도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공선자라는 존재가 걸었던 가시밭 길은 공선자라는 존재가 얼마나 처절하게 살아왔는지를 증명한다.
……그래, 처절하게 살아온 것이다. 너무나도 처절하게. 광기에 물든 형의 인격이라면 몰라도 이미 한참 전에 한계에 도달해 망가져 있던 동생의 인격은 도저히 견디기 힘들 정도로.
그런 동생의 인격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당연했다.
과연 누가 태어났을 때부터 절망밖에 존재하지 않는 삶을 이어가고 싶어 한단 말인가? 본래라면 존재 그 자체가 허무했을 인생을?
그런 인생을 살아오면서도 끝내 세계 멸망이라는 목적을 이루어낸 것부터가 대단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이제 나 좀 쉬게 해줘라, 그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설령 눈앞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온다고 해도 결코 그것을 섣불리 선택할 수 없을 터.
여태까지 살아온 삶 그 자체가 지옥에서 받는 고문이나 다름없었으니 설령 다시 살아나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겁부터 나는 게 인지상정.
아무리 새로운 삶이라고 해도, 아무리 새로운 세계라고 해도 과연 그 삶이 행복할 것이란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당장 평범하게 살게 해준다고 해도 공선자의 형과 동생의 인격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자신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며 평범한 행복을 손에 쥘 수 있을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지쳤다.
설령 평범한 삶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해도 과연 자신들이 그 삶을 진심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지쳐 있었다.
그저 쉬고 싶었다. 최악의 운명 속에서 세계를 멸망시킬 정도면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했다고 말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 아닌가?
이미 공선자라는 존재는 그 근본이 전부 하얗게 타버린 재라는 의미였다. 설령 겉으로는 광기로 무장해도 근본이 그러니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진심으로 당신들은 다시 살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그랬다면 애초에 당신들은 이렇게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럴 것이 죽는 건 싫었다. 여태까지 살아오며 쌓여온 피로 이상으로 억울했다.
오히려 삶에 의한 피로가 쌓여오면 쌓여올수록 더욱더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너무 억울한 것이다. 이렇게 삶 그 자체가 고통으로 느껴질 정도로 살아왔음에도 자신들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었다는 사실이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그렇기에 살아남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 여태까지 고생한 것을 전부 보상받을 정도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자유를……, 단, 한 번도 손에 넣어본 적 없는 자유를 갈망하는 것이었다.
정말로 아이러니하게도 삶에 지친 만큼 삶을 갈망한다. 삶이 고통스러웠던 만큼 결코 죽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살고 싶었다. 어떻게 모순되는 두 가지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인지 신기한 일이었지만 원래 인간은 그런 동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