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제 01계-챕터 01: 에볼루션 시스템
내심 긴장을 하고 있었던 공선자는 천사의 부정에 미세하게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실제로 듣는 것과 추측에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가?
“애초에 위대한 존재께서는 거래를 제안받은 당사자가 거절할 것도 상정해두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선택지를 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분은 아무런 이유 없이 타인의 의지를 강제하는 걸 싫어해요. 설령 막다른 절벽까지 몰린 상황이라고 해도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지 아니면 항복을 할지는 본인의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을 내릴 의지를 존중하기에 거절을 할 수 있는 선택지를 남겨둔 거라는 거죠. 그런데 상대가 거절했다고 억지로 에볼루션 시스템의 각인을 행하다니 그분의 신념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즉, 천사는 그런 일이 없을 거로 생각했지만 천사의 뒤에 있는 위대한 존재인지 하는 존재는 애초에 거절할 것도 상정해두었다는 이야기.
정확히는 설령 가능성이 아무리 낮다고 해도 상대의 의사도 묻지 않고 강매하는 것은 취향이 아니었기에 가능성이 낮아도 거절할 수 있는 길은 남겨뒀다는 소리였다.
“그것참 자비로우신 신님이야. 정말로 말이지. 그 정도로 상대를 배려할 줄 알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기 전에 구해줬으면 하는데 말이지!”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그분이 그래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무리한 요구는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당신의 거절에 당황한 건 결코 거절할 일이 없다고 오만하게 확신을 하고 있던 저지 그분이 아니라는 점도 명확히 해주시면 감사하겠네요.”
“실수를 한 건 너지, 그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는 이야기?”
“그런 거예요. 저는 애초에 어차피 거절할 리가 없는 이들이니 굳이 이렇게 사정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할 필요가 있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깐 말이죠. 하지만 과연 세상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기만 하는 게 아닌 것 같군요. 당신 같은 이레귤러도 존재하니깐 말이죠.”
오히려 이렇게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확률을 상정하고 있던 그분은 정말로 대단한 분이라면 무표정하게 찬송하는 천사의 모습에 공선자의 기준은 그저 나빠질 뿐이었다.
자신이 거절하는 것으로 저 갑질을 하던 천사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꽤나 기분이 좋았지만 위대한 존재인지 하는 녀석은 애초에 거절해도 별 상관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같았기 때문.
즉, 결국 자신을 이 자리에서 되살리고 이용하려고 했던 존재에게 자신은 이용할 수 있으면 좋고, 이용할 수 없어도 상관없는 작은 존재에 불과했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
실제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상대의 의사를 배려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형의 인격에게 있어서 그렇게 느껴졌다는 게 중요했다.
그렇기에 형의 인격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성공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실패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안식을 바라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떠올린 아이디어가 실패한다고 해도 더 나빠질 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이 이상 우리가 나눌 이야기도 없는 것 같은데 슬슬 마무리를 짓자고, 천사 아가씨. 그래서 난 댁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거지?”
동시에 자신이 떠올린 생각이 꽤나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사실 역시 인지하고 있었기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모습을 유지했다.
지금부터 형의 인격이 저지르려는 일은 매우 이기적이고, 또 괜한 화풀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차피 죽기로 결정한 거 뭔 짓을 못 저지르겠는가?
자신이 저지르려는 행동이 결코 정당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시키고 있었다.
이대로 그냥 흘러가는 대로 휩쓸릴 수는 없었다. 뭐가 되었던지 발버둥 쳐주겠다고. 설령 이 이상은 도저히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갈 수는 없다고 해도 죽는 그 순간에 무엇인가를 이루어내 보이겠다고 말이다.
그래, 이것은 자신의 죽음에 세계를 끌어들여 멸망으로 향하게 했던, 공선자라는 인물이 죽기 전에 보여주었던 행동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결코 이성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의 인격은 신경 쓰지 않았다.
동생의 인격은 형의 인격이 떠올린 막무가내나 다름없는 아이디어에 불안감을 내보였지만 형의 인격은 동생의 인격을 설득했다.
‘킥!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우리들이 죽는 건 달라지지 않아. 그건 뭘 해도 마찬가지겠지. 그렇다면 적어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제대로 날뛰어보자고 파트너!’
-……형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난 말리지 않을 게. 애초에 고통스러운 삶보다 죽음을 택한 건 내 어리광. 형은 사실 죽어 안식을 얻고 싶다는 마음보다 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잖아? 서, 설령 그것이 자신이 누구였는지 조차 잊어버리는 삶이라고 해도 형은 살아가고 싶은 거잖아?
‘후후! 그래, 역시 파트너한테는 못 숨기겠다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파트너도 알고 있지? 그건 어디까지나 파트너를 위해서 내는 욕심이야.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정말로 지옥보다 못한 심연만 보고 경험해온 파트너를 위해서 지옥에도 평범한 삶이, 우리들이 동경하던 자유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나온 욕심. 그런데 파트너가 더 이상은 못 살아가겠다고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하겠어? 포기해야지.’
형의 인격은 오로지 동생의 인격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인격이었다. 그것이 삶의 이유고, 존재의 이유였다.
자신에게 모든 힘든 일을 떠넘기는 동생에 대한 분노? 결코, 그런 것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럴 것이 형의 인격은 동생의 인격이 얼마나 착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태어나기 전 모진 생체 실험을 겪었던 것은 다름 아닌 동생의 인격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형의 인격이 태어났을 때 자신을 대신하여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에이전트로써의 삶을 살게 만들었다는 것에 평생을 죄책감에 휩싸여 살아가던 소년이었다.
그것이 동생의 인격이었다.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낸 존재. 그렇기에 자신을 대신해서 고생하는 것에 결코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음에도 죄책감을 가지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동시에 형의 인격의 괴로움마저 상당 수준 공유하며 함께 괴로워해 주었던 존재. 솔직히 이야기해서 동생의 인격이 형의 인격에 의지하는 만큼 형의 인격도 동생의 인격에 상당히 의존해왔다.
동생의 인격이 없었다면 형의 인격은 죽이고 싶지 않은 누군가를 죽였을 때의 죄책감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완전한 광기에 휩싸여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기억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애초에 세뇌를 풀 수도 없었을 것이다.
동생의 인격은 형의 인격에게 외부적인 괴로움을 떠맡겼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떠맡긴 것은 아니었다.
형의 인격의 백업이었으며, 동시에 형의 인격과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듣고 같은 것은 느끼며 대신 괴로워해 주는 존재. 공선자라는 인물의 순수함과 죄책감의 결정체.
과거 그야말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 뒤따르는 생체 실험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원망하지 못했던 순수하기 그지없는 아이의 인격이 남아있는 핵심 인격.
그렇기에 형의 인격은 동생의 인격이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자신에게 정말로 모든 것은 맡길 수 있었다.
자신과 공유하는 신체의 감각을 차단하고 모든 것은 자신에게 떠맡긴 뒤 심상의 저편으로 도망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의 인격은 형의 인격에 모든 것은 맡겼다는 죄책감에 결코 도망칠 수 없었다.
괴로운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형의 인격과 감각을 공유하고 그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자신 역시 같이 겪고 있었다.
그것이 형의 인격에게는 일종의 구원이었다. 이 어둠이 그지없는 세계를 걸어갈 수 있게 만들어주었던 각성제였다.
또한 동생의 인격을 언젠가 자유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은 인생의 목표이기도 하였다. 그것이 불가능하여 결국 세계를 동귀어진시킨다는 선택을 했다고 해도.
그렇기에 형의 인격은 세뇌를 푸는 과정에서 광기에 휩싸였다고 해도 결코 동생의 인격을 위한 행동방침만큼은 포기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각오하는 것이었다. 결코, 그냥은 못 죽어준다는 각오를.
설령 상대가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다고 해도, 아니, 오히려 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죽기 전에 제대로 한 번 동생의 인격을 삶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던 그 위대한 존재님에게 엿 한 번 제대로 먹여보겠다는 생각을.
동생의 인격 역시 그렇기에 형을 말리지 못했다. 형의 인격이 화를 내는 이유 중 상당 부분이 바로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화를 내지 못하고, 말리지도 못하고 그저 불안해하면서도 형의 인격을 존중했다. 아니, 어쩌면 그냥 형의 인격에게 선택지를 미루어버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저 책임을 전가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형의 인격은 그를 위해서 만들어진 인격.
스스로를 위해서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가녀린 소년이 그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인격.
그렇다면 결국 미루어진 책임을 다하는 것도 스스로를 위한 일. 그러니 얼마든지 어떤 선택지라고 해도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해도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 가능했다!
“말씀드린 대로 죽으실 거예요. 애초에 당신이 소생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저희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저희들이 원하는 것을 주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 그러나 그 제안을 거절한 이상 저희들은 당신에게 그 무엇도 드릴 수 없으니깐 말이죠.”
“뭐, 죽는 거야 각오하고 있었어. 애초에 그 제안을 받고 살아가는 것보다 죽는 게 훨씬 낫다는 판단을 내렸으니까 제안을 거절한 거야. 그러니 이제 와서 죽을 거라고 해도 별문제는 없는데 말이지……. 그래서 어떻게 죽일 생각? 자신들의 제안을 거절했으니 고통스럽게? 잔혹하게? 이래봬도 죽기 전에 산전수전 다 겪은 타입이어서 말이야. 살을 생으로 포 뜨는 것 정도로는 비명 하나 안 지르고 오히려 신 나게 웃어줄 수 있다고? 케하하하하!”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에도 재미있다는 것처럼 웃는 공선자의 그 모습에 천사는 이해를 할 수 없다는 것처럼 무표정한 그 얼굴 그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천사 역시 공선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반응을 보이던 별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하며 입을 여는 것이었다.
“별로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이미 전부 끝난 마당에 굳이 그런 비생산적인 일을 할 이유가 뭐죠? 깔끔하고 고통 없이 보내드릴 거예요. 무엇보다 위대한 존재께서는 자신의 거래를 거절했다는 것 정도로 경우 없는 분이 아닙니다.”
“크히! 그래! 그럴 줄 알았지. 그야 본래라면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어도 상관없는 나를, ‘우리’를 살려내서 거래를 제안할 정도로 마음이 넓은 사람이니깐 말이지! 안 그래?!”
어떻게 봐도 비꼬는 것으로밖에 안 들리는 공선자의 발언. 그러나 천사는 어차피 이제는 이 세계에서 사라질 존재라는 생각에 그가 뭘 이야기하던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그를 향해 자신이 할 말만은 전하는 것이었다.
“이리 가까이 와주세요. 고통 없이 보내드리도록 하죠. 이 또한 그분의 배려. 거래를 거절한 것은 아쉽지만 그렇다고 질질 끌 수도 없으니 깔끔하게 한 번에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눈앞의 존재의 목숨을 끊어내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천사. 그것은 천사의 모습을 한 사신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천사는 물론 죽음을 당할 당사자인 공선자조차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는 반응이 아니었다.
그야 자신이 거래를 거절하는 순간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선자는 후회하지 않았다.
이것이 자신에게 있어서, 동생의 인격에게 있어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냥 이대로 죽어주는 것은 너무 억울한 이야기 아닌가?
“그래그래, 본부대로 하죠. 그냥 너한테 다가가기만 하면 돼?”
“네, 제 손에 접촉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대로 편하게 해드리도록 하죠.”
천사가 이야기하는 대로 그녀에게 다가간다. 정신을 되찾을 때부터 천사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자신이 생각하는 안전거리를 유지해왔던 형이 인격이 그 안전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어차피 이제는 죽어 안식을 얻기로 결정한 몸.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은 없지. 그러니 어디 한번 제대로 일을 저질러 보고 가자고!’
그런 생각을 품은 채로,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그저 전부 포기해버렸다는 모습을 연기하며 천사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마침내 천사의 손이 닿을 정도로 그녀에게 가까워졌을 때 형의 인격을 행동에 나섰다.
“……?!”
조용하게. 그러면서도 망설임 없이. 방금 전까지의 광기 어린 행동과 말투가 전부 연기였다는 것처럼 신속하게.
푹!!!
그 어떤 일말의 낭비도 없이 움직였다. 이미 어떻게 움직일지는 머릿속에서 결정해둔 상황이었다.
소생되고 천사의 존재를 인식한 때부터 이미 시험해본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