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제 01계-챕터 01: 에볼루션 시스템
메인 스트림이라는 이름으로 떠올랐던 반투명한 창. 퀘스트 창으로 유추되는 그 창에 적혀 있던 보상.
거기에는 에볼루션 시스템의 기초적인 ‘정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공선자는 현재 자신이 알아낸 요소가 에볼루션 시스템의 한 가지 요소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요컨대 저 메인 스트림을 클리어하면 아마도 다른 이들 역시 스테이터스 창을 포함한 에볼루션 시스템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겠지.
즉, 어차피 나중에 다른 이들도 얻게 되는 정보인 만큼 굳이 지금 자신에 대한 의심을 사면서까지 숨기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
그리고 두 번째, 이것은 형의 해줬던 발언이 뇌리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정보는 어떤 시각에서 보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에 공선자는 일단 눈앞의 소녀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전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소녀의 시각이 자신과는 또 다른 어떤 정보를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이용해보려고 하는 것.
……이것은 전부 공선자가 무의식 속에서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그의 이성은 아직까지 이와 같은 사고를 진행할 정도로 회복되지 않았다.
아니, 설령 이와 같은 사고를 진행했다고 해도 상대를 서슴없이 이용하려는 이 행동을 공선자의 본래의 유약한 인격이 곧바로 실행하려고 할지도 의문이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공선자는 의식이 아닌 무의식적으로 위와 같은 사고논리를 진행하고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버린 것이었다.
“게임……?”
“네, 네……! 게임이요. 마치 게임에서 볼 것 같은 퀘스트 창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저, 저도 제가 조금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역시 비슷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서……! 그래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퀘스트 창이 있으면 스테이터스 창 같은 것도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 저기, 자, 잠깐만 기다려줄래? 뭔가 나한테 열심히 설명해주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미안, ……일단 그 게임이라는 게 뭔지부터 설명해줘야 할 것 같은데?”
그리고 열심히 일단은 되는 대로 내뱉기 시작하는 그.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자신의 발언이 전부 계산된 것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말을 내뱉던 공선자는 소녀의 제지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소녀가 자신의 말을 막았기 때문이 입을 다문 것이 아니었다. 소녀의 발언에 당혹스러움을 느꼈기에 입을 다문 것이었다.
‘……게, 게임이 뭔지 모른다고? 설마 판타지나 무협, 뭐, 이런 쪽의, 나, 나랑은 전혀 관계없던 세계에서 온 사람인가?’
“어……, 저기……. 과학이 뭔지는 아시죠?”
“알고 있다고……, 생각해. 호, 혹시나 아는 게 당연한 걸 모르고 있는 걸까? 아니, 게임이라는 단어는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말이야. 그게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안 떠올라서…….”
혹시라도 같이 움직이는 이들 중 몇몇처럼 과학을 모르고 마법이나 무공 같은 걸 아는 타입인가? 하는 생각에 던진 질문.
허나, 돌아온 소녀의 대답은 그녀가 공선자와 마찬가지로 과학 문명을 기반으로 하던 세계에서 살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게임에 대해서 무지했다. 그 사실에 공선자는 살짝 경악하며 혹시 게임이 없는 또 다른 지구에서 온 건가? 라는 의문을 떠올렸을 정도.
그러나 그런 추측도 곧이어 그 소녀의 대답에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게임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알고 있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떠오르지 못하는 상황에 가까운 것 같았다. 게임이라는 단어 그 자체는 알고 있는데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연상이 되지 않는다는 느낌.
소녀 역시 그 사실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인지 방금 전까지는 조금 의지가 되는 늠름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말이다.
“저기 그러면…….”
“어……, 그러니까 그건 기억이 나는데……, 아니, 그건 무슨 단어인지는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기억을…….”
그리고 그 뒤 공선자는 설마 하는 생각에 일단 소녀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녀는 그런 공선자의 질문에 착실하게 대답을 돌려주는 것이었고 말이다.
그를 통해서 공선자는 또다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한 기억, 그리고 인간관계에 가까운 기억‘만’이 사라졌을 것이라 생각했던 공선자.
하지만 아니었다. 공선자와 다르게 이 자리에 있는, 기억을 잃은 이들이 잃어버린 기억의 범위는 생각했던 것보다 광범위했다.
……앞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상식. 그 상식들은 제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지금처럼 공선자와 소녀의 대화가 성립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식사 방법을 모를 것이고, 또 지금처럼 동굴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방법을 알고 있는 이들 역시 없어서 동굴을 빠져나가기 위해 실시간으로 길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기억’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역으로 이야기하자면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기억‘만’이 남아있다는 이야기.
요컨대 생존에 필수적인 기억이 아니라면 지워져 버린 상태였다. 그 사실을 공선자는 소녀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며 알아낼 수 있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수적인 영양소를 3가지 이야기하라고 했을 때 소녀는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이라는, 공선자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답을 이야기해줬다.
그러나 공선자가 DNA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을 때 소녀는 그런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탄수화물과 단백질, 지방에 대해서는 알면서도 DNA에 대해서는 모른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역시 매우 드문 경우일 것이다.
위의 두 가지는 의무교육을 받은 이들이라면 필수적으로 알고 있을 요소일 테니까. 그 외에도 한 가질 알고 있으면 남은 한 가지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큰 요소들을 질문을 해봤다.
그리고 그 질문에는 한 가지 기준을 두었다. 한 가지를 알고 있고 다른 한 가지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클 때 두 가지 중 한 가지만 ‘생존’에 영향을 미친다는 기준을.
그리고 그 결과 공선자는 소녀가 ‘생존’과 밀접한 영향을 지닌 지식만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보존되는 지식의 범위는 생존과 관련된 지식에만 한정된다는 건가? 그렇다면 게임에 대해서 모르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기는 해.’
그 생존에 관련된 범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애매하기는 했지만 공선자는 일단 ‘개인의 인식’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럴 것이 공선자가 생존과는 그렇게까지 밀접하게 관련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되는 지식도 소녀는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었고, 오히려 역으로 생존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되는 지식을 소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게임. 소녀가 게임에 대해서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공선자로서는 도저히 소녀에게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손쉽게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래서는 네가 알려주는 정보를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겠네. 그러면 됐어. 굳이 지금 당장 설명해주지 않아도 돼. 단지, 네가 알아낸 정보의 중요도 정도는 알려줘. 그건 얼마나 중요한 정보야?”
그리고 소녀 역시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인지 더 이상 공선자가 알아낸 정보에 연연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어졌다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일 것이었다. 그럴 것이 소녀는 자신이 기억상실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는 있었기는 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자신의 기억이 어느 수준이나 날아가 버린 것인지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공선자와 질문을 주고받는 것으로 그녀는 자신의 기억이 얼마나 구멍투성이인 것인지를 깨달았다.
자신에 대해서는 그 무엇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기초적인 상식이라는 녀석 정도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야 이렇게 타인과 대화가 가능하고 또 이건 틀렸다, 이건 옳다, 라는 것을 결정할 정도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제대로 확인해보니 그 기초상식이라는 녀석들도 특정 분야에서만 남아있는 상황.
그야말로 구멍 뚫린 스펀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결락이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소녀는 또다시 약간의 쇼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상상하던 것보다 자신의 상태가 심각하다. 그 사실을 깨달게 되는 것으로 정신적 충격이 없었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 굳이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아마 빠른 시일 내에 알게 될 정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래, 그럼 됐어. 미안해. 난 이만 걷는 거에 집중하도록 할게. 너한테 방금 전처럼 잔소리에 가까운 걸 한 뒤인데 내가 낙오되면 꼴사납잖아?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걷는 거에 집중하지 않으면 그대로 생각에 빠져 있다가 낙오가 되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어서 말이야.”
공선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깨달게 된 것이 공선자의 생각 이상으로 충격인 모양이었다. 하긴, 자신에게 기억이 없다는 지금 상황조차도 본래라면 패닉에 빠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것이 그나마 당혹스러움에 그치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같은 사람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안도감 때문이겠지.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나마 남아있었던 것으로 생각했던 상식에 대한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공선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용케도 발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 그렇기에 소녀가 충격을 받은 모습으로 다시 동굴을 빠져나가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서 무리에 섞여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공선자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무슨 이유가 되었던지 이대로 나한테서 더 이상 신경을 써주지 않는 건 고마운 이야기인데…….’
하지만 어째서인지 쇼크를 받은 소녀가 비틀비틀 거리면서 걸어가는 모습을 보자니 가슴 한편이 아픈 것이었다.
이것은 자신만은 기억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숨기는 것에서 오는 죄책감일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었던 소녀에게 벌써부터 약간이지만 정을 주어서 느끼게 된 안쓰러움일까?
……어느 쪽이든 지금의 공선자에게는 필요 없는 요소였다. 이는 공선자의 무의식이 떠올린 생각이 아니었다.
공선자의 의식이, 이성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자신은 결코 누군가와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위인이 아니다.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았기에, 그리고 그를 위한 희생을 기억하고 있기에 공선자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삶의 목표는 없었다. 그저 지금은 살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형의 희생을 결코 개죽음으로 만들 수 없다는 부채감이 그런 강박관념을 만들어주었다.
……살고 싶어서,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살아가는 게 아니었다. 그저 죽지 못해서 살아간다.
그것이 지금 공선자의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과연 누군가와 친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또한 공선자는 자신이 한 짓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죽기 전 하나의 세계를 멸망시킨 존재.
그것이 바로 공선자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이 다른 세계에 왔다고 해도 자신이 해온 일을 전부 잊고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타인과 어울린다고?
공선자는 천벌을 믿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지금 자신의 상황에 천벌이나 다름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그렇다면 더욱 천벌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벌을 받고 있는데 여기서 더 떨어질 곳이 어디 있다고?
즉, 요컨대 자신이 한 짓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다. 아니, 이건 틀렸다. 죄책감을 가질 수가 없었다.
공선자가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죽기 전에 저지른 짓의 스케일은 너무나도 거대하여 공선자에게 그것을 자신이 일으켰다는 실감조차 나지 않았다.
실감이 없으니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진짜로 그 멸망을 실행한 것은 공선자의 형의 인격.
형의 인격은 자신과 다르니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라는 주장을 할 생각인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 형의 인격도 지금의 공선자와 융합한 상태이니 자신이 한 짓인 것을 결코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